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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전라남도

강진군 성동리 병영성

by 구석구석 2022. 8.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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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m 높이의 네덜란드 건축 양식 돌담 볼 수 있는 병영마을 

강진군 병영면 성동리 일원은 사적 제397호 전라병영성과 병영마을이 있는 곳이다. 조선시대 5백여 년 동안 전라도 육군의 총 지휘부가 있던 전라병영성은 1417년(태종 17년) 건립된 총 길이 1060m 규모의 성(城). 초대 병마절도사 마천목 장군이 꿈속에서 계시를 받고 눈의 자국을 따라 지었다 하여 설성(雪城)이라고도 부른다. 

 17세기 우리나라 바다에서 표류하다 잡힌 네덜란드인 하멜일행이 압송돼 약 8년간 억류돼 있던 곳으로 1894년 동학농민운동 당시 농민군에 함락된 뒤 막대한 피해를 입고 이듬해 폐영됐다고 한다. 이후 한동안 방치돼오다 지난 92년 전라남도 기념물로 지정되며 관리가 시작됐고, 97년 국가사적으로 지정된 뒤부터 복원작업이 한창 진행되고 있다. 

병영성 인근을 둘러싸고 있는 병영마을에서는 하멜이 남긴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주민들이 ‘하멜식 담쌓기’라고 부르는 빗살무늬 형식에 따라 지어진 돌담인데, 맨 아래층에 납작한 돌을 15도 정도 눕혀 촘촘하게 쌓고 흙으로 고정시킨 뒤 다음 층은 반대 방향으로 역시 15도 정도를 눕혀 쌓는 방식으로 촘촘히 쌓아올린 돌담을 말한다.  

전국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이 독특한 모양의 돌담은 하멜이 네덜란드의 돌담 건축 방식을 일러줘 쌓은 것이라고 한다. 이곳 돌담의 또 다른 특징은 다른 곳에 비해 매우 높다는 점. 병사들이 말을 타고 순시를 돌 때 집 안이 보이는 것을 막기 위해 어느 집이나 평균 2m 정도로 돌담을 쌓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마을 내 골목들도 말이 달릴 수 있도록 6~7m 너비로 반듯하게 뻗어 있어 이곳이 처음부터 군인과 민간인이 함께 살 수 있게 만들어진 ‘계획도시’라는 걸 짐작케 한다. 돌담길에서 성 앞을 지나 마을 외곽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가면 저수지가 나오는데, 그 앞으로 병영의 관문이었던 홍교(虹橋·돌로 만든 무지개 모양의 다리)가 있다.

사적397호 전라병영성지 

조선조 600년간 호남과 제주도 53주 6진을 통할한 육군의 총 지휘부로 1417년(태종 17) 본래 광산현에 설치되어 있던 병마절도사영을 이설한 성이다. 초대 병사인 마천목장군이 꿈속에 계시를 받아 눈(雪)의 자국을 따라 축조하였다 하여 설성이라고도 하는데 평지에 축조된 성으로, "대동지지"나 "색지"등에 따르면 둘레 2,820척, 높이 18척, 옹성 12개소, 연못 5개소, 우물 9개소, 포루 2개소였고 성문 4개소, 연회장, 객사 등 15동의 부속 건물이 있었다고 한다.

1599년(선조 32) 일시 장흥으로 이설되었다가 1604년 다시 이곳으로 옮겨왔으며, 제주도에 표착했던 네델란드인 하멜이 이곳으로 압송되어 8년여 동안을 억류생활 했던 곳이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으로 병영성이 함락되어 막대한 피해를 입었으며 이듬해인 1895년(고종 32) 갑오경장때 폐영되었다. 전라병영성지는 당초 1992년 3월 9일 전라남도 기념물 제140호로 지정되어 보호 관리되다가 1997년 국가사적 제397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당시의 성곽흔적이 뚜렷이 남아 있어 그 역사적 중요성과 의의를 한차원 높이기 위해 2007년까지 복원할 계획으로 성곽 등을 복원하고 있으며 관련유적으로 하멜체류지, 한골목, 병영홍교, 비자나무, 은행나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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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유형문화재129(86.2.7) 병영성 홍교

병영 남문에서 하고리 가는 길의 배진강 저수지 부근에 있다. 규모는 높이 4.5m, 넓이3.08m, 길이6.75m로, 직사각형 화강암 석재 74개로 조립된 다리이며, 조선 숙종 때 유한계 정승의 금의 환향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다리라고 전해오고 있다.

과거에는 이 길이 하고리, 상고리로 이어져 병영으로 들어오는 주된 통로 였으며, 벅수 한 쌍이 서 있었지만 분실되어 지금은 재현품이 세워져 있다. 이 다리는 특이한 축조 방식과, 다리 아래 가운데 아름답고 사실적인 여의주를 머금은 용머리의 조각이 찾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게 한다. 일제 시대 일본인들이 병영시내 세류교 다리를 축조할 때 기술자들이 이 다리 축조방식을 아침마다 연구하고 배워 낮에는 다리를 쌓곤했다고 전해온다.   그리고 유한계 정승에게는 아름다운 전설이 전해 오고 있다.

병영시내의 김부잣집에 머슴을 살고 있는 유총각이 있었는데 유총각은 부지런하고 영리하고 참으로 성실하여 주인과 이웃들로 칭송이 자자하였다. 사실 총각은 본래는 양반이었는데 집안이 몰락하여 김씨 집에 머슴을 살게 된 사람이였다. 마침 김부잣집에는 예쁜 딸이 하나 있었는데 비록 신분의 차이가 있었지만 너무 성실하고 잘생긴 유총각을 가슴 속 깊이 사모하는 마음이 싹트기 시작했다.

어느 봄날 김낭자는 뒷산에 나물을 캐러 가고 유총각은 나무를 하러 가게 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산에서 소나기를 만나게 되고 유총각과 김낭자가 비를 피한 곳이 같은 나무 밑이 되는 바람에 떨어질 수 없는 사이가 되고 말았다. 이리하여 그들은 어렵게 결혼하게 되고 여기서 태어난 이가 바로 유한계 정승이다. 현재 유정승의 묘는 학사리 뒷쪽 옴천 넘어가는 박실재 입구에 있다.

하멜기념관은 전라병영성 출토 유물 전시를 시작으로 17~18세기 네덜란드에서 사용된 생활용품, 우리나라를 세계에 알린 하멜표류기 사본, 자매도시인 네덜란드 호르큼시에서 기증한 전통의상 3벌 등을 선보인다.

 

삼인리 376  비자나무 (천연기념물 제 39호)이 비자나무는 수령 약 400년으로 높이가 10m이고 가슴높이 둘레가 5.2m이다. 북향 경사지에 있으며 주위에는 대나무 숲이 있고 밑에는 자주괴불 주머니가 자란다. 앞에서 볼 때에는 지상 1.87m에서 커다란 가지가 길게 뻗었으며, 뒤쪽에 가지는 짧고 양쪽 가지는 비슷하게 자랐다. 가장 큰 가지의 밑부분 둘레는 2.6m나 된다. 

비자나무 / 한국관광공사

 태종 17년에 전라 병마절도사영을 이곳으로 정했을때 쓸만한 나무는 모조리 다 베어 버렸으나 이 나무는 굽었고 키가 작아서 쓸모가 없었기 때문에 남게 되어 현재에 이르렀다고 전해오기도 한다. 조선 500년 동안 호남지방의 방어 진지였던 병영성이 갑오동란으로 동학군에 함락되어 마침내 폐영될 때가지 이 근처에는 많은 병사가 있었으나 열매를 촌충구제에 사용하기 때문에 잘 보호되어 온 것 같아 보인다. / 한국관광공사

 

* 애기바위

애기바위는 병영면에서 장흥으로 가는 길목인 삼인리 신지 마을 동쪽 산에 있는 바위로서 둘레 5m, 높이 13.5m의 이중으로 된 바위다. 이 바위를 먼 곳에서 보면 마치 수건을 쓴 부인이 아기를 업고 서 있는 모습이 틀림없다. 그래서 이 바위를 옛날부터 애기바위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애기바위가 생긴데 대해서는 안타까운 전설이 있다.

옛날 병영에 살던 가난한 한 부인이 밤에 꿈을 꾸니 비몽사몽간에 신선 같은 백발 노인이 말하기를 "그대는 내일 무엇을 보더라도 못본 체 해야 한다. 만약에 내 말을 어기면 후회를 해도 소용이 없다. 그리고 너의 귀한 자식도 천벌을 함께 받을것이니 각별히 명심하여라"라고 하는 것이었다. 놀라 깨어난 부인은 그저 괴이한일도 다 있구나 하고 생각했을 뿐이다. 다음 날 그 부인은 애기를 업고 산으로 산나물을 캐러 갔는데 때 마침 봄철인지라 춘색을 즐기면서 잠깐 쉬고 있노라니 산들이 움직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는 도읍지를 마련하기 위해서 산들이 자리를 옮기고 있었던 것이다. 부인은 너무나도 큰 이변이 일어남에 놀라 간밤 백발노인의 현몽도 잊어버리고 "이건 참으로 기이한 일이로다. 산들이 움직이고 있다"하고 스스로 말을 하게 된 것이다. 부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산들이 움직이는 일을 멈춤과 동시에 그 부인은 아기를 업은 그대로 굳어 버려서 그 자리에 큰 바위가 생겼다고 한다. 그 부인이 산이 움직인다는 말만 하지 않았더라면 병영성의 성터보다 몇 십배 더 큰 곳이 되었을 것이라고들 말하면서 못내 아쉬워 하였다고 전한다.

 

성동리 70 천연기념물385호(97.12.31) 은행나무  

강진읍에서 북동으로 14.8㎞ 떨어진 병영면 소재지에 위치해 있다. 이 지역은 고려시대에 도강(도강)현의 현청이 있던 곳으로서, 조선시대 태종 17년(1417년)에 병영을 설치하여 병마 절도사를 둔 곳이기도 하다. 이 곳으로부터 은행나무는 약 500m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다. 은행나무는 동성마을 중앙에 우뚝 솟아 마을의 상징목으로 되어 있으며 수고 30m, 흉고둘레 6.75m, 수관폭은 중심에서 동쪽으로 16.5m, 서쪽으로 13m, 남쪽으로 10.9m, 북쪽으로 3.5m나 뻗어 있다.

성동리 동성마을 한가운데 자리한 수령 500년을 넘긴 30m 높이의 우람한 은행나무 출처 : 투어코리아

은행나무(Ginkgo biloba)는 은행나무과에 속하며 중국을 원산지로 하고 있는 낙엽교목으로서 장수하는 나무인데 전라남도 화순 이서면의 은행나무도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나무의 크기나 마을의 역사성으로 볼 때 수령은 500년 전후가 될 것으로 보인다. 전해 내려오는 전설에 의하면 옛날 어느 여름철에 폭풍이 휘몰아쳐 큰 은행나무의 크고 작은 가지들이 많이 부러졌다. 이를 보고 받은 병사가 부러진 큰 가지를 성안으로 가져 오게 하고 이로써 많은 가구를 만들게 했다. 이 때 목침도 만들어 이것을 병사가 사용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이 목침을 베고 잠을 자던 병마절도사는 그날로 병이 나서 신음하게 되었다. 그러나 어떤 유명한 의원도 병의 원인을 알아내지 못하였다. 백약이 무효인지라 끝내는 무당을 불러 푸닥거리(굿)를 하고 점도 쳐보니 은행나무 목침을 병사가 사용한데 그 원인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가지가 부러진 은행나무에 제사를 올리고 목침을 다시 붙어 주어야 완쾌가 된다고 하였다. 이에 무당의 말을 따라 그대로 하였더니 병사의 병은 씻은 듯이 나았다. 지금도 은행나무 고목을 살펴보면 목침덩이가 들어있는 듯이 볼록해진 곳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천연기념물 제385호인 강진 성동리 은행나무는 동성마을의 상징목으로 왕성한 수세를 자랑하는데 1556년부터 7년간 억류 생활을 했던 네덜란드인 하멜 일행의 하멜표류기에도 기술되어 있는 역사를 간직한 나무로도 잘 알려져 있다. 출처 : 투어코리아

이 지역은 네델란드인 하멜일행이 1656.3 ~ 1663.2월까지 약 7년간 억류생활을 했던 곳이다. 하멜일행 33명은 이곳에서 생활하면서 몇몇은 결혼해 살기도 했으며, 생계를 위해 잡역을 하거나 나막신을 만들어 팔았고 춤판을 벌여 삯을 받기도 했다. 우리나라 나막신이 일본의 나막신과 달리 네델란드와 같이 통으로 만들어진 것을 볼때 이들이 나막신을 전래한 것이 아닌가 추측되기도 하며, 또 이 지역 일부에 남아있는 담장중에 빗살모양으로 쌓인 담장이 있어 하멜일행이 잡역을 하면서 쌓았을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하멜일행은 이 곳 은행나무 밑에서 수인산성을 바라보며 고향을 생각하기도 했다고 한다. 1663년 병영 생활을 마치고 좌수여 12명, 순천 5명, 남원 등지로 5명이 분리 이송되었으며, 마지막 체류지인 여수에서 일행중 7명이 1666년 9월 탈출후 「하멜표류기」를 저술함으로써 이곳에서의 생활을 최초로 서양에 알리기도 했다. 

/ 자료출처 : 한국관광공사

 

* 기알재 약수터

한학리 한림마을에 귀활재라 부르는 재가 있다. 이재는 병영면과 옴천면의 경계로 현재는 포장이 되어 있다.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병영 총지휘자인 병사가 병영성을 나와 인근 지방 순찰이라도 가게 되면 그 행렬은 10리에 달했고 병졸들의 창 검은 하늘을 찌를 듯 했으며, 이를 엎드려 바라 보는 백성들은 그 위용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데 죄가 있건 없건 병영성으로 끌려온 백성들은 온몸이 움츠러들고 조사 결과 무죄가 되었건 곤장을 맞던 간에 방면되어 집으로 돌아가게 되면 이 귀활재에 이르러서야 "이젠 살았구나" 하고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쉬었으므로 이 재를 살아서 돌아간다는 뜻으로 귀활재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기알재 도로변의 약수는 물 맛좋고 오염되지 않은 깨끗한 약수터이다. 

강진읍에서 장흥 방향으로 이어지는 2번 국도를 따라가다 군동에서 좌회전한 뒤 병영성 이정표를 따라가면 된다. 병영성으로 들어가기 전 오른쪽으로 병영마을이 먼저 보인다. 마을을 둘러보고 성에 들렀다 홍교로 가면 된다.

보호수인 성남리 느티나무

수인산과 수인산성

수인산은 높이 561m의 천혜의 요새로 고려시대부터 수인산성이 자리 했던 곳이다. 산 꼭대기에 자연그대로의 평탄지가 있고 샘이 많으며 산세가 험하다. 동쪽의 절벽이 천혜의 요새를 만들기에 병마절도사영에 소속되었던 수인산성이 자리하였다. 왜구의 침입을 막기위해 축조했다는 수인산성은 능선을 따라 자연조건을 최대한 활용하여 쌓아져 있다. 총 길이는 6km에 달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수인산성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돌로 쌓았다. 둘레가 3,756척이고 높이가 9척이다. 고려말에 도강, 탐진. 보성. 장흥, 영암의 백성들이 모두 이 곳에서 왜구의 침입을 피하였다> 라고 되어 있다.

수인산 등산코스로는 4군데가 있는데, 수인산성 상문이라 할 수 있는 동문(장흥 유치면 대리 계곡쪽), 서문(병풍바위쪽), 남문(성불계곡쪽), 북문(병영 흠골 저수지쪽)을 통하여 올라갈 수 있다. 이 중 북문코스가 가파르지만 가장 빨리 오를 수 있는 지름길이어서 등산코스로 가장 많이 이용된다.

 

병영시장 돼지불고기거리

그 명성 그대로 설성식당 061 433 1282

강진땅 병영에는 참으로 세상에 많이도 알려진 음식점 한 곳이 있다. ‘설성식당’이 바로 그 집이다.

이 집에서는 손님들에게 별도로 주문을 받지 않고 한식상을 차린다. 손님이 자리를 잡으면 주방에서 준비된 음식상이 손님들 앉은 자리 앞으로 옮겨지고 손님수에 상관없이 한상값을 받는데 예전엔 2만원이었는데 지금은 많이 올랐겠지.

술값은 별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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