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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전라남도

화순 818번지방도 봉하리 봉하마을 수락폭포

by 구석구석 2009. 11.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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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화순군 도암면 봉하리 봉하마을은 그야말로 ‘손바닥만 한’ 마을이다. 화순과 나주의 경계에 있어 마을에는 화순 군내버스도, 나주 시내버스도 드나들지만, 사실 ‘버스가 다닌다’고 말하기에는 민망하다. 하루 운행 차량이 몇 대 안 될 정도로 배차 간격이 긴 데다, 버스를 타면 화순군청에서도, 나주시청에서도 50개가 넘는 정류장을 거쳐야 하니 두 시간은 족히 걸린다. 두 지역의 경계에 있다는 건 이쪽의 중심에서도, 또 저쪽의 중심에서도 멀다는 뜻. 그만큼 오지라는 얘기다.

 

이 마을 뒷산에는 비가 내리면 비단처럼 걸리는 근사한 폭포가 하나도 아니고, 두 개나 있다. 아니, 계곡 입구의 폭포까지 더하면 도합 세 개다. 봉하마을은 광덕산(379m)과 소반바위산(492m) 골짜기 아래 있다. 마을 뒤로 골짜기까지 이어지는 길을 따라 차로 들어가면 미륵암이 있다. 암자의 이름을 달고 있지만, 사찰이 아닌 굿당이다. 굿당은 이른바 ‘기도발이 좋은 곳’에 들어서는 법. 주변에 알려지지 않은 은밀한 명소가 있는 경우가 많다.

 

미륵암 앞에서 두 개의 산자락에서 흘러내린 물이 우당탕 합류한다. 암자 맞은편 계곡에 폭포가 하나 걸렸다. 물줄기가 이리저리 꺾여서 쏟아지는데, 장맛비가 내린 직후라 물소리가 제법 우렁차다. 적요한 미륵암을 혼자 지키고 있던 이에게 폭포 이름을 물었더니, “저게 무슨 폭포냐”는 답이 돌아왔다. 좀 여위어 보이긴 했지만, 그래도 폭포 높이가 제법 돼 보였는데, 이 정도는 폭포 축에도 끼워주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러고는 물길 위에 놓인 나무다리 건너편 숲을 가리키며 “저쪽으로 올라가면 진짜 폭포 세 개가 있다”며 “이틀 전에 장맛비가 내렸으니 아직까지는 제법 볼만 할 것”이라고 했다.

 

# 비 오면 쏟아지는 두 개의 폭포

이건 산행이랄 것도 없다. 미륵암에서 물길을 끼고 오르니 금세 요란한 물소리로 폭포가 가까이 있음이 느껴졌다. 수락폭포다. 거대한 역암의 바위벼랑을 따라 물줄기가 쏟아지는데, 80도쯤 되는 경사를 타고 쏟아지는 물줄기가 온통 포말을 이뤄 마치 흰 비단을 걸쳐놓은 듯했다. 수락폭포 주변은 무성한 나무들로 가득해 가까이 다가가 위를 올려다봐야 폭포의 전모를 볼 수 있는데, 그래서인지 압도하는 느낌이 더 강했다. 폭포 아래는 짙고 축축한 원시림의 숲 그늘이었다. 염천의 더위에도 쏟아지는 물줄기가 밀어내는 바람은 서늘했다.

 

수락폭포 못미처에 다른 폭포를 알리는 이정표가 세워져 있다. 수락폭포에서 평탄한 숲길을 걸어 300m만 더 가면 만나는 ‘마귀할멈 폭포’다. 이정표에 ‘마귀할멈’과 ‘마고할미’가 혼재돼 있는 데다 이정표의 방향이나 거리표시가 제각각이어서 자칫 두 개의 폭포로 착각하기 쉽지만 같은 폭포다. 마귀할멈과 마고할미가 동일인인 셈이다. 둘 중 하나의 이름으로 통일한다면 단연 ‘마고할미’ 쪽 손을 들어줘야 하지 않을까. 화순 운주사에도, 화순 고인돌을 대표하는 핑매바위에도 마고할미 전설이 깃들어 있으니 말이다. 전설 얘기는 뒤에서 다시. ‘마귀할멈’이라면 어쩐지 서양 동화 속에나 나올 법한, 어색한 이름이지 않은가.

 

전남 화순의 소반바위산 아래 꼭꼭 숨어있는 마고할미 폭포. 장마철에 비가 내린 뒤에야 우레 같은 물소리와 함께 이런 웅장한 물줄기를 보여준다. 강원도나 지리산이 아니라 순한 지세의 남도 땅에 이런 폭포가 숨어있다는 게 뜻밖이다. 화순 사람들도 잘 모르는 곳이다.

마고할미 폭포 아래 물길에 나무다리가 놓여있다. 다리 위에서 장쾌하게 쏟아지는 폭포를 내려다볼 수 있다. 우레와 같은 물소리로 쏟아지는 폭포는, ‘할미’라는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힘이 넘친다. 폭포 위쪽에는 소용돌이치는 물살이 피워올린 물안개가 흘러다녔다. 비 올 때만 볼 수 있는 경관이라지만, 이런 풍경이 설악산이나 지리산 깊은 산골짜기가 아니라, 화순의 순한 산자락에 감쪽같이 숨어있다는 게 좀처럼 믿어지지 않았다.

 

마고할미 폭포를 지나 화학산 방향으로 더 가면 물줄기가 치마폭처럼 펼쳐지는 근사한 폭포가 하나 더 있다고 했는데, 그건 찾지 못했다. 원시림의 숲이 깊었다. 아기자기한 세 개의 폭포와 그 폭포로 가는 숲길의 서늘함과 청량함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으니 그다지 아쉽지는 않았다.

 

# ‘스님 마트’가 있던 마을… 중장터

봉하마을에서 멀지 않은 도암면 용강리에는 ‘중장터’가 있다. 중장이란 ‘중(僧)을 상대로 열리는 장(場·시장)’. 요즘으로 친다면 ‘스님 마트’가 있었던 곳이다. 중장터는 말 그대로 중이 장을 벌이고 물물교환을 하던 곳이다. 중이라고 사고파는 데 별다른 혜택이 있던 건 아니었고, 신분증을 검사하거나 뭐 그런 것도 아니었으니 일반인들도 함께 장을 이용했다. 그러니 중장터는 한때 번성했던 상업의 중심지였던 것이다.

 

고려 때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중장은 딱 두 곳밖에 없었다. 영남에는 상주, 호남에서는 나주. 당시만 해도 번듯한 대도시 나주에 서던 중장이 조선 시대에 여기 화순의 시골구석으로 옮겨왔다. 조선의 억불 정책 때문이었다. 스님의 지위가 백정이나 노비와 다를 게 없을 정도로 추락하면서 관의 횡포가 기승을 부리고 건달까지 업신여기며 시비를 걸자 아예 장을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었다.

 

중장이 열린 화순 도암은 인근의 절집에서 두루 찾아오기 좋은 자리다. 도암은 화순과 나주의 경계이기도 하고, 영암이나 장흥과도 가깝다. 주변의 절집만 헤아려도 숨이 차다. 운주사, 불회사, 보림사, 쌍봉사, 개천사, 죽림사, 다보사…. 이보다 더 먼 곳에 있는 내로라하는 큰 절에서도 중장을 보러 왔다. 어디서 출발하든 관가를 만나지 않는 외곽 길을 택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중장터는 다른 지역으로 건너가는 비밀스러운 경유지이기도 했다. 훗날 갑오 농민전쟁에서는 농민군이 이 길을 걸었고, 좌우대립의 시기에는 빨치산이 이 길을 탔다.

 

중장은 한 달에 한 번, 매달 보름날에 열렸다. 흩어진 실타래 같은 산길을 오래 걸어와서 장을 본 뒤에 그날로 다시 걸어 절로 돌아가야 하는 스님의 밤길을 밝히려면 달이 밝은 때를 택해야 했기 때문이다. 스님들은 달력을 볼 필요도 없이 차오르는 달을 보고 장날을 가늠했으리라. 중장의 거래방식은 대개 물물교환이었는데, 절마다 특산품이 있었다. 쌍계사에서는 차를, 화엄사에서는 목탁과 발우, 목기를 가져왔고, 내장사에서는 백지, 창호지, 닥종이를 가져왔다. 또 대흥사에서는 유기, 무위사에서는 자기, 송광사에서는 염주나 법상을 가져다 장에 내놨다.

 

중장은 이제 서지 않는다. 지금 누가 산길을 걸어서 중장에 올 것인가. 세상이 달라지면서 중장은 진즉 파장했다. 중장이 사라진 뒤 1980년 초반까지 5일 장으로 명맥을 유지해오다 그나마도 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중장이 서던 마을에는 지금 ‘도암 중앙교회’가 있다. ‘중장터’는 버스정류장이나 방앗간, 농기구상의 상호로만 겨우 남았다. 그저 슬레이트와 함석판으로 덧댄 누추하기 짝이 없는 집들이 줄 맞춰 늘어선 모습에서 오래전에 북적였을 장터와 좌판의 모습이 마음으로만 그려질 뿐이다.

 

# 천불천탑… 아직도 살아있는 꿈 / 운주사

중장터에서 가장 가까운 절집이 운주사다. 일어서지 못한 와불과 끝내 꺾이고 만 개혁의 꿈이 있는 곳. 운주사는 화순에서 가장 이름난 명소이니 건너뛸 수는 없다. 1000개의 탑이 세워지고 와불이 일어서는 날 천지개벽이 온다는 천불천탑의 전설이 전해지는 절집. 탑은 다 세워지지 않았으므로 운주사의 와불은 여태 누워 있다. 위엄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못생기고 비례도 맞지 않는 운주사의 불상에서는 서툰 솜씨로나마 정성을 다해 구원을 기다렸던 보통사람들의 간절했던 염원이 읽힌다.

길고 어두운 터널은 희망으로 건너는 법. 운주사의 와불이 일어서지 않은 건 어쩌면 다행이지 않은가. 실현된 희망은 더 이상 꿈이 아니고, 와불이 일어서서 희망이 실현되는 순간 꿈은 사라져버릴 것이므로…. 그러므로 운주사의 희망은 아직 살아있다. 지금처럼 뒤숭숭한 시절에 운주사에 가게 되거든 마음을 다해 깎아 세운 불탑과 불상을 바라보며 스스로 품은 희망 하나를 포개 놓고 와도 좋겠다. 그러기에 딱 맞는 자리가 미륵전 뒤편의 ‘불사바위’다. 죽지 않는 ‘불사(不死)’가 아니라, 사찰을 짓거나 고치는 걸 뜻하는 ‘불사(佛事)’다. 이 바위 위에서 도선국사가 운주사 창건을 지휘했다고 해 붙여진 이름이다. 자연의 풍광과 인문의 이야기가 한데 어우러지는 절묘한 자리. 그다지 높지 않은데도 불사바위 위에 올라앉으면 운주사는 물론이고, 일대의 경관이 한눈에 다 들어온다.

운주사를 들고나는 길에 화순 군립 ‘천불천탑 사진문화관’이 있다. 애초에 박물관을 생각하고 지은 것인데, 다 짓고 보니 ‘가져다 놓을 것’이 없어서 2년을 비워뒀다가 2017년에 사진문화관으로 문을 연 곳이다. 전시관에서는 명예관장이기도 한 오상조 작가의 ‘돌의 형상’ 전이 열리고 있다. 30년 동안 광주대 사진영상학과 교수로 재직하다 정년 퇴임한 오 작가는 평생 운주사와 불상, 고인돌, 당산나무 등이 가진 전통적인 아름다움을 흑백사진에 담아왔다. 전시에 걸린 노(老)대가의 흑백사진에서는 생생한 질감이 느껴진다.

 

/ 문화일보 2021 박경일 전임기자 

 

화순 818번지방도 대초리 운주사 (daum.net)

 

화순 818번지방도 대초리 운주사

<장길산>의 작가 황석영은 전남 화순 운주사를 배경으로 소설의 마무리를 하고 있다. 그는 왜 관군과 싸우던 노비들을 화순으로 보내 천불천탑과 와불의 대역사(大役事)를 시키고 운주사를 세우

blog.daum.net

 

봉하리 봉하마을 061-375-3258,

 

수락산 깊은 계곡에 파묻혀 기암괴석과 폭포가 어우러진 호남의 알프스라고 불리는 곳이 바로 봉하마을이다. 수락산 계곡의 무지개골은 무지개 폭포만 5개에 이를 정도로 골짜기가 깊고 험해 한 여름에도 한기를 느낄 정도이다.

 

 계곡을 따라 여기저기서 제각기 몸매를 뽐내듯 버티고 서있는 기암괴석들은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자연의 오묘한 섭리에 도취될 만큼 주변 경관이 멋스럽다.
수락산 깊은 계곡에는 6.25전쟁 당시 피난처로 이용한 동굴이 남아 있어 역사의 쓰라린 상처를 되새기게 하기도 하며 마귀할매폭포는 천불천탑을 쌓던 도중 그만 새벽이 되어 닭이 우는 바람에 999개를 쌓다말고 중단 되어 이름 붙여졌다는 전설도 지니고 있다. 숲속을 지나다보면 다람쥐와 야생노루를 쉽게 만날 수 있고 퇴적암괴, 소바위, 고사리, 석이, 표고버섯 등 지질생태적 체험도 할 수 있다.      

체험거리 : 봄 - 산나물채취, 산림욕 및 등산 / 여름 - 풀피리불기, 자연생태체험, 산림욕, 계곡체험 / 가을 - 농산물 수확체험 / 겨울 - 당산제(청룡제), 눈썰매타기, 온천욕체험 / 연중 - 청국장만들기, 장작패기, 뻥튀기, 민속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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