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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경상북도

경주 동천동-헌덕왕릉 백율사 탈해왕릉 굴불사지

by 구석구석 2008. 3.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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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덕왕릉

경주지역에 남아 있는 36기의 왕릉 중 평지에 십이지신상이 새겨져 있고 그 규모가 가장 큰 신라 41대왕 헌덕왕릉. 왕릉의 형식은 원형 봉토분으로, 호석이 돌려져 있다. 방향을 따라 십이지신상이 조각되어 있는데 현재는 쥐, 소, 토기, 돼지상만 남아 있다.

 

 

헌덕왕릉

 

헌덕왕 때는 통일신라의 국력이 쇠약해져 재위기간 중에 김헌창, 김범문 등 2차례의 반란이 일어났는데, 이처럼 호화롭게 능을 축조한 것은 다소 이례적이다. 원래는 아마 능 앞으로 석인상 2구식이 배치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삼국유사 등 역사서 기록에 천림사 북쪽에 장사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동천동 406번지 백율사  

054-772-8634

경주시청에서 도보로 10분거리

 

백율사는 아담한 절이지만, 신라 때는 상당히 번창한 절이었다. 이차돈의 순교와 관계있는 절이다. 법흥왕 14년(527)에 불교를 전파하기 위해 이차돈이 순교 의 방법을 택했을 때 그의 목이 하늘로 높이 솟구쳐 올랐다가 이곳에 떨어졌다고 한다. 그래 서 절(자추사, 후일 백율사가 됨)을 세워 이차돈의 명복을 빌었다고 한다. 현존하는 건물은 대웅전과 선원, 요사채가 있다. 이중 대웅전은 선조 때에 중창된 것이다.

 

 

 

동천동 산 17  탈해왕릉 사적 제174호 / 1969년 8월 27일 지정

 

 

경주시가에서 서남방 표암 근처에 있는 원형토분이다. 신라 4대 탈해왕 재위중 가야와 황산진구에서 싸웠으며 석씨왕의 최초왕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이 릉은 원래 성북쪽 양정구 혹은 소정구에 장사하였다고 하나 다만 성북이라고 한 점만 현위치와 근사하다. 원형봉토분으로서 릉의 형식 자체에는 특이한 점이 없는 일반적인 형식으로 높이 7m, 직경 10m 이며 주위면적은 37,926㎡(11,493평)이다.

 

이 능은 신라 제4대 탈해왕(재위 57∼80)을 모신 곳이다. 왕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왜국에서 동북쪽으로 1천 리 떨어져 있는 다파나국, 또는 완하국, 용성국)의 왕비가 잉태한 지 7년 만에 큰 알을 낳았다. 이는 상서롭지 못한 일이라 하여 그 알을 궤에 넣어 바다에 버리니 동해 아진포에 닿았다. 그때 한 할머니가 이것을 열어 보고 어린아이가 있어 데려다 길렀다. 배에 까치들이 울며 따라왔으므로 '까치 작(鵲)'에서 '새 조(鳥)'자를 떼서 '석(昔)'으로 성을 삼았다.

 

석씨는 62세 때 왕위에 올랐다. 왕이 세상을 떠나자 삼국사기에는 "성북의 양정 언덕에 장사하였다."고 하였고, 삼국유사에는 "수장하였다가 뼈로 소상을 만들어 동악에 모셨는데 지금의 동악 대신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삼국사기의 성북이라고 한 점이 현재의 위치와 부합된다. 이 무덤은 높이 4.5m, 지름 14.3m 크기로 둥글게 흙을 쌓아올린 봉토무덤이다. 주변에 아무런 시설을 하지 않았으며, 겉으로 보아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묘]으로 추측된다.

 

동천동 4 굴불사지석불상 보물 제121호 / 1963년 1월 21일 지정

굴불사터에 있는 이 불상은 바위의 서쪽에는 아미타여래불, 동쪽에는 약사여래불, 북쪽에는 미륵불, 남쪽에는 석가모니불을 각각 새긴 사방불 형태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신라 경덕왕이 백률사를 찾았을 때 땅속에서 염불 소리가 들려왔다고 한다. 땅을 파보니 이 바위가 나와서 바위의 사방에 불상을 새기고 절을 지어 굴불사라 하였다고 전한다. 이 기록만으로는 분명하지 않지만, 여러 가지 여건으로 보아 이때쯤 불상이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서쪽의 아미타여래는 신체만 돌기둥에 조각했고 머리는 따로 만들어 놓았는데 머리가 얼굴보다 크게 표현되어 꼭 모자를 쓴 것처럼 보인다.

 

신체는 당당하고 굴곡있게 표현되어 있으며 손과 발 또한 사실적으로 조각되어 있다. 좌우에는 다른 돌로 보살입상을 세워 놓아서 3존불의 모습을 띠고 있다. 동쪽의 약사여래는 양발을 무릎위로 올리고 앉아 있는데 몸 전체가 앞으로 숙여져 있다. 얼굴 표현은 매우 세련되었으며, 신체는 활기차고 긴장감이 넘쳐 보인다.

 

북쪽면의 오른쪽에는 도드라지게 새긴 보살입상이 서 있고, 왼쪽에는 6개의 손이 달려있는 관음보살을 얕은 선으로 새겼다.

 

오른쪽의 보살상은 둥글고 예쁜 얼굴, 굴곡있는 우아한 자세 등 그 표현이 매우 뛰어나다. 남쪽면은 원래 3존상으로 되어 있었는데 일본인들이 오른쪽 보살을 완전히 떼어가고 가운데 본존상의 머리마저 떼어갔다고 한다.

미래세계에 나타나 중생을 구제한다는 미륵불을 표현한 것인데, 굴곡이 진 신체의 모습과 얇은 옷주름의 묘사가 매우 뛰어난 솜씨를 자랑하고 있다. 이처럼 입체의 표현, 음각과 양각의 표현, 좌상과 입상의 표현 등을 변화있게 배치한 점은 매우 특이한 경우이다. 풍만하고 부드러우면서 생기를 잃지 않은 솜씨를 볼 때 통일신라 초기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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