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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부산광역시

동래 복천동 동래읍성 복천박물관 동래할매파전

by 구석구석 2024. 4.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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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래읍성

신화에서 성은 국조나 영웅의 절대적 능력과 신성함의 표상이다. 하지만 우리의 경우 대개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은 시설이고, 동래 옛읍성 또한 나라를 지키기 위한 호국의 의지가 서려있는 성지다.

성은 위엄과 권위를 상징하고, 이 성을 지키는 것은 나라를 지키는 일과 같다. 동래 읍성은 고려 현종 12년(1021)에 왜구의 노략을 방어하기 위하여, 현재의 부산지방 병무청을 중심으로 수영구 망미동 일대에 고쳐 쌓았던 성이다. 동래는 기원전 1세기, 삼한시대 독로국(또는 장산국, 거칠산국)으로 건국되어, 신라시대 경덕왕 16년 동래군이 되었다.

동래읍성

1731년 축성한 동래읍성의 둘레는 17,291척(약 3.8Km), 높이는 17척(약 5.1m)이다. 읍성 안에는 우물 10개와 못이 있었고, 자연 지형을 효과적으로 이용한 타원형에 가까운 형태의 평산성이며, 북쪽과 동쪽은 산으로 둘러 싸여 있고 남쪽과 서쪽은 열려 있다. 정면인 남문이 가장 중요한 출입문이다. 남문을 비롯해서 서문, 암문, 북문, 인생문, 동문의 6개가 있었다. 

각 문에는 문루가 있었는데, 동문에는 지희루, 서문에는 심성루, 남문에는 무우루, 암문에는 은일루가 있었다. 또 중요한 문루였던 남문에는 익성을 두고, 문은 앞의 세병문과 뒤의 주조문이 있는 이중 구조로 되어 있었다. 서문·동문·북문 등 다른 문에는 성문 보호를 위해 옹성을 부설하였고 장대, 망루 및 15개소의 보루를 갖추고 있었다.

동래읍성은 '동장대'가 있는 충렬사 뒷산에서 마안산을 거쳐, 서장대가 있는 동래향교 뒷산까지의 구릉지와 현재 동래 시가지 중심지역인 평지를 일부 포함하는 지세에 전형적인 평산성 형식으로 축조되어 산성과 평지성의 장점을 두루 갖춘 대표적인 성이다. 

동장대

고려 말 우왕 13년(1387)에 수축된 것으로 보이는, 동래읍성은 1592년 임진왜란 때 동래부사 송상현 공을 위시한 모든 군관민이 혼연일체가 되어 장렬한 전투를 벌였던 임란초기의 최대 격전지이다.

이후 부분 보수된 성을 1731년(영조 7) 정언섭 동래부사가 조선의 관문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훨씬 규모를 크게 고쳐 쌓았는데, 이 성이 현재 흔적으로 남아있는 읍성의 기원이다. 일제 때 '시가지계획'이라는 명목으로 서문에서 남문에 이르는 평지의 성벽은 철거되었다. 부산시에서는 이를 보수·복원할 계획이며 문화유적지를 원위치대로 보존해 교육적 자료로 활용하고 있다.

 

1731년(영조 7) 증축 이전 조선전기 때 읍성의 둘레는 3090척(약 657m), 높이는 13척(약 3.9m)이었다. 현재는 그 당시 읍성 규모의 약 1/6에 해당된다고 한다. 조선전기엔 기초 다짐석과 같은 크기의 돌을 3~4단 정도 허튼 쌓기를 하였는데 반해, 조선후기엔 가공기술의 발달로 수직에 가깝게 쌓았다. 산지쪽의 성은 바깥쪽만 돌로 쌓고, 안쪽은 지형에 따라 흙을 조금 파내고 잡석이나 판축 흙다짐으로 채워 놓았다.

동래읍성 역사관

동래 읍성 역사관, 관람 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며 관람료는 무료다. 매주 월요일 (월요일이 공휴일인 경우 그 다음날)휴관한다. 

/ 오마이뉴스 2008 송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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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구청 앞 동래삼계탕을 지나 동래향교 방향으로 가다 보면 ‘야문터’라 적힌 비석이 있다. 

동래읍성의 성문 중 옹성(성문을 공격하거나 부수는 적을 측면과 후방에서 공격할 수 있는 시설)을 부설한 성문터로 일명 암문으로 불린다. 4대 성문을 닫은 후 긴요한 일에만 통행이 허락됐던 곳이라고 한다. 이 어디쯤 성이 있었을 텐데 그림으로 보여주면 이해가 빠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 복천동 50번지 부산시립박물관 복천분관 051-554-4263~4

 

 

복천박물관은 복천동고분군에서 출토된 유물을 중심으로, 삼한시대부터 삼국시대까지 부산의 역사를 보여주는 고고전문박물관으로 1996년 10월 5일에 개관했다.


7차에 걸친 발굴 조사로 밝혀진 169기의 유구와 각종 토기 및 철기류 등의 유물을 종합전시하였다. 사적 제237호로 지정된 복천동고분군에서 출토된 충부한 유물과 다양한 무덤 양식들은 아직 미지의 왕국으로 남아있는 가야의 신비를 푸는데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웃 일본 고대문화의 원류를 규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도 평가되고 있다.

또한 복천박물관은 개관 이후로도 인근지역의 매장문화재에 대한 조사와 연구를 수행하여 부산의 역사와 문화, 나아가 가야사의 실체를 규명해 나가고 있다. 지속적으로 축적된 연구성과를 다향한 학술세미나 및 특별전을 통해 전문가와 시민들에게 제공함으로써 역사교육장으로서의 역할에도 내실을 기하고 있다. 

 

제1전시실

삼국시대의 모태가 된 삼한시대의 역사와 문화, 삼국문화의 비교, 그리고 가야멸망 이후 부산의 상황을 보여주는 유물 및
복천동고분군에서 조사된 무덤의 형태와 구조를 복원하여 전시하엿다.
삼국시대 부산의 중요한 유적인 덕천동고분군과 복천동고분군의 전체 유구를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모형으로 제시하는데,특히 복천동고분군을 대표하는 목곽묘와 수혈식석곽묘는 실제크기의 1/4모형으로 내부의 축조기술과 부장유물을 파악할 수 있도록 전시하였다.

제2전시실

복천동 고분군에서 출토된 다양한 유물을 토기,장신구,무구,무기,농공구,마구,외래계유물,일본의 가야계 유물로 나누어 전시하였다. 또한 복천동 고분군의 대외교류 상황을 알 수 있는 인접지역 출토 유물을 비교 전시하였다.

■ 고분공원

복천동고분군은 6세기 이전 부산유일의 지배층 무덤으로, 가야문화의 번성과 신라로의 편입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유적이다. 고분군의 규모는 해발 60m, 길이 700m, 폭 80~10m 정도이며 동래 중심가 북쪽의 마안산 중앙부에서 서남쪽으로 길게 뻗은 구릉 위에 밀집 분포되어있다.

여러 차례에 걸친 발굴조사로 40여 기의 무덤이 확인되었으나, 대부분의 무덤은 아직도 땅 밑에 남아있다. 무덤의 형태는 땅을 파서 넓은 방을 만들고 나무관을 넣은 덧널무덤(토광목곽묘), 땅 속에 네모난 돌로 벽을 쌓고 천장을 덮어 만든 구덩이식 돌방무덤(수혈식석실묘), 땅 속에 시체를 바로 묻는 널무덤을 비롯해 여러 가지 형식의 무덤들이 있다. 

이 무덤들에는 도굴되지 않은 큰 무덤이 많아 2,000점 이상의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굽다리접시(고배), 목항아리(장경호), 토제등잔을 비롯한 토기류는 4∼5세기 낙동강 하류지역의 특징적인 토기들이다. 철제 갑옷·투구류도 다양하게 출토되었다.

특히 4호 무덤에서 나온 단갑은 우리나라에서 처음 발견된 갑옷이다. 11호에서 출토된 괘갑은 부속 장식까지 완전하게 갖춘 상태로 발견되었는데 이런 완제품은 우리나라에서 처음 발견되는 것이다.

10호 무덤에서 발견된 말갖춤(마구)는 완전히 갖추어진 실전용으로 처음 발견되었다. 이러한 갑옷·투구류는 고구려 고분벽화에 그려져 있는 것과 같다. 복천동 무덤에서는 새로운 무덤양식을 발견하여 무덤의 변천과 흐름 연구에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해 주고 있다.

 

■ 동래시장으로 발길을 옮기면 송공단이 있다. 

송공단은 송상현 부사의 기제사를 올리는 단이다. 참고로 부산진성을 수호했던 첨사 정발 장군을 모시는 단은 정공단이라 부른다. 송공단은 1608년(선조 41) 동래부사로 부임한 이안눌이 동래읍성 남문 밖 야산인 농주단에 설치했다가 1742년 김석일 동래부사에 의해 송상현이 순절한 정원루로 옮겨졌다. 송상현을 비롯해 임진왜란 당시 순절한 선열을 모시고 있는데 제단은 대상의 신분에 따라 높이와 위치를 달리했다. 송공단의 현판은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필체로 알려져 있다.

 

■놓쳐선 안 될 동래의 유적들

동래 하면 향교를 빼놓을 수 없다. 향교는 조선시대 지방교육기관으로 현재 부산에는 동래와 기장 등 두 곳에 남아 있다. 동래향교는 1392년(태조 원년)에 세워져 임진왜란 때 동래성 함락과 함께 불탔으며 몇 차례 옮겨 다니다가 1813년(순조 13) 동래부사 홍수만이 지금의 자리로 옮겨왔다. 

 

향교 마당에 들어서면 반화루(攀化樓)라는 누각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더위잡을 반’ 자가 쓰였길래 더위를 잡으며 시를 읊은 곳이구나 생각했는데 실상은 좀 달랐다. 반화루라는 이름은 ‘반룡부봉’이라는 고사성어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출신이 미천했던 하우영 번쾌 등이 유방과 관계를 맺어 마치 용의 비늘과 봉황의 날개를 붙잡고 오르듯 제후에 봉해졌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다소 부정적인 의미여서 향교에 쓰이기에는 부적절하다는 평가도 있으나 이런 것을 경계해야 한다는 뜻에서 붙인 게 아닐까 좋게 생각해본다. 

 

향교 내부에는 명륜당이 있고 그 오른쪽 뒤편에는 대성전이 있다. 동래향교 전·현 정교인 양규명·박민희 선생은 “일반적으로 이 두 건물은 일자형인데 동래향교는 특이하게도 어긋나게 배치돼 있다”면서도 “사료가 없어 깊은 의미는 알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동래부동헌은 부사가 공무를 처리하던 곳으로 지금까지 부산에 남은 조선시대의 단일 건물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크고 유일한 동헌이다. 동래부는 부사가 재임하던 곳으로 국방 및 대일 외교상 중요해 다른 고을에 비해 규모가 컸다고 한다. 동래부 동헌에는 충신당과 좌우의 연심당과 독경당, 문루였던 망미루, 동래부 동헌 외대문(독진대아문) 등 많은 관아 건물들이 부속돼 있었는데 일제강점기에 대부분 건물이 철거됐고 망미루와 동래부 동헌 외대문은 온천동 금강공원 일원으로 옮겨졌다. 2014년 독경당 찬주헌을 복원하고 망미루와 동래부 동헌 외대문을 현재의 자리로 이전했다.

수안역에서 동래구청으로 가는 길에 있는 장관청은 동래부 청사 건물의 하나로 군 장관들의 집무소다. 

동래부는 예로부터 왜와 대치하는 국방상의 요충지로서 1655년(효종 6)에 동래부사 정석이 창건했다. 몇 차례 중창에 이어 1706년 동래부사 황일하가 지금의 자리로 옮겨와 다시 세웠다고 한다. 본 건물 외에 행랑채, 대문이 딸려 있는데 여러 차례에 걸친 개조로 많이 변형됐다. 동래에 오래 살았던 사람도 장관청의 존재를 모르는 이가 많다 하니 좀 더 적극적으로 알릴 필요가 있을 듯하다. 

 

■ 복천동367-2 동래할매파전 051)552-0729

부산시 동래구 복천동 367-2 / 낮 12시~오후 10시

동래지역에서 70년, 4대를 이어오며 동래파전 맛을 지켜온 집이다. 부산민속음식점 1호로 지정받은 부산시 지정 전통향토음식점이기도 하다. ‘동래파전’은 지역 특산물인 파와 해물을 이용하여 조선 말 수라상에 올려진 음식이다. 부산 근교에서 재배되는 파의 속대만 사용하여 연한 맛이 나며 달마다 맛과 향이 다르다는 특징이 있다. 물 대신 나오는 식혜 한 그릇과 식후에 숭늉을 내오는 것도 예전의 방식을 고수한 것이다. 동래파전 소(2만원)·대(3만원), 버섯파전 소(1만8000원)·대(2만5000원)로 나뉘며 동래고둥찜(2만5000원), 누룽지탕수(2만원), 가오리무침(2만원), 그 외에도 돌솥비빔밥 등 식사류를 판매한다.

주간조선 2010.1 강신혜 인턴기자

 

동래구청 앞 대궐갈비

부산에서 가장 오래된 주택 건물로 알려졌다. 1916년에 지어졌으니 101년이 지난 셈이다. 과거 동래부 객사로 쓰이기도 했고 부산 최초 양의원인 창생병원의 분원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광복 직후에는 동래은행 사택으로 사용된 적이 있어 지금도 인근 노인들은 ‘은행집’으로 부른다고 한다. 1980년대 초 이 집을 사들여 갈비집으로 문을 열 당시에는 사랑채와 직각이 되는 부분에 안채가 있었는데 도로가 생기고 옆집과 땅을 매매해 현재는 사랑채만 남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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