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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경상북도

구미 낙산리 낙봉서원 북애고택 의구총 낙산리고분군

by 구석구석 2022. 12.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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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미역(구미버스터미널)에서 선산방향, 고아읍 현일고등학교 신호등 삼거리에서 우회전 해평·대구방향, 숭선대교를 지나 2차선 도로를 계속가다 보면 상주↔대구방향 사거리 도로표지판이 보이는데, 사거리 가기전 30∼40m 지점의 좌측 농로를 따라 계속 직진하면 낙봉서원이 소재한 낙성리 마을이 나타남. 

 낙성리474 지방문화재자료 제222호 낙봉서원 054-452-5531

 

이 서원은 조선 인조(仁祖) 24년(1646)에 건립되어 김숙자(金叔滋), 김취성(金就成), 박운(朴雲), 김취문(金就文), 고응척(高應陟) 등 5인을 모시고 추모하는 곳이다.정조(正祖) 11년(1787)에 사액서원(賜額書院)이 되었으나, 서원철폐령에 따라 고종(高宗) 8년(1871)에 철폐되었다.그후 1933년에 강당을, 1943년에 외삼문을, 1977년에 사당을, 1989년에 동재를, 1990년 서재를 다시 지어 복원하였다.


마을 뒤쪽 경사진 언덕 위에 야산을 등지고 남향으로 앉아 두 구역으로 이루어져 있다.아래쪽 구역에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동·서재가 있고 그 중앙 높은 축대 위에는 2칸의 대청과 좌우에 온돌방을 배치한 강당이 자리잡고 있다.위쪽 구역은 제향공간으로 사당인 상덕묘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배치되어 있다.사당 뒤편에는 묘단이, 앞쪽 오른편에는 비각이 있다.

-ⓒ 마운틴월드

지방민속자료 제41호 북애고택

'북애고택(北厓古宅)'은 조선시대 영·정조 임금 때 실학자였던 최광익 선생이 1788년에 지은 집인데, 둘째 아들 승우가 살던 곳으로 처음에 '구미 쌍암고택(雙岩古宅)'에는 형인 성우가 살았고, 오래 뒤에 형이 아우한테 지어준 집이 쌍암고택에서 바라보면 북쪽 낮은 언덕 위에 있다고 해서 '북애고택'이라고 한다.

동생집인 '북애고택'은 지금 '지방 민속자료 제41호'로 지정되어 있고, 형님 집인 '쌍암고택'은 '중요민속자료 105호'로 형제가 서로 마주보고 살면서 오순도순 정겹게 살았지 싶다.

집 구조는 'ㄷ' 자인 안채와 '一' 자인 중문간채가 서로 마주보게 하여 전체로 보면 'ㅁ' 자 구조로 되어 있으며 또 사랑채는 대문채 바깥마당에 따로 두었는데, 안마당에서 따로 나누어 자리잡게 한 이런 양식은 매우 드물다. 

쌍암고택 / 오마이뉴스
중문간채
안채

쌍암고택은 북애고택과 비슷하며 이전에는 최상학씨가옥으로 불리었으나 대문앞에 큰바위가 두개가 있어 이리 바뀌었다한다.

쌍암고택 사랑채

1779년 건축된 쌍암고가에는 대문채를 시작으로 사랑채, 중문간채, 안채, 사당채, 이렇게 다섯 채가 남아있고, 대문채는 원래 7칸짜리였는데, 일제시대때 기와를 구하기가 어려워 수리하면서 다섯 칸으로 줄여서 새로 지었다. 

쌍암고택 사랑채

안채로 들어가는 곳에 따로 중문간채를 두었으며 문이 한쪽으로 비켜나 있어 여자들이 쓰는 안채를 쉽게 들여다볼 수 없도록 지은 조상의 슬기가 느껴진다.

 

낙산리 의구총

경상북도 민속자료 105호인 의구총은 주인을 구한 '의로운 개'를 기리는 무덤으로 해평면 산양리에 사는 '김성발'이라는 사람이 누렁이 개 한 마리를 길렀는데, 참 영리하고 주인 말을 아주 잘 들었다고 한다.
하루는 개 임자가 술에 취해 길가에서 잠이 들고 들판에서 불이 났는데 이것을 본 누렁이는 주인이 위험하다는 걸 알아차리고 멀리 떨어진 낙동강에 가서 제 몸에 물을 적셔와 불을 끄기를 여러 차례 거듭한 후 탈진하여 그만 죽고 말았다. 뒤늦게 깨어난 개 임자는 그제야 깨닫고 죽은 누렁이 시체를 거두어 정성스레 묻어주었다고 한다.

훗날 사람들이 개의 의로움을 기려 무덤을 좀 더 크게 다시 손보고 다듬었으며 이 이야기를 들은 선산부사 '안응창(1665년 현종 6)'이 '의열도'에 이것을 쓰고, 뒷날 화공이 화강암에 네 폭짜리 '의구도'를 만들어 누렁이 죽음을 기렸다. 도로공사를 하다가 한쪽이 깨진 것을 해평면 낙산리 산 148번지로 새롭게 옮겨와 지금까지 그 뜻을 기리고 있다.

 

낙산리고분군

 

사적 336호인 낙산리 고분은 무덤 둘레와 봉분 크기가 큰 원 삼국시대(3세기)부터 통일신라시대(8세기 쯤) 때까지 있는 여러 가지 모양의 고분이다. 205기가 분포되어 있으며 발굴조사만 세 차례하여 토기, 칼, 장신구 같은 유물이 많이 출토되었다. 

 

/ 오마이뉴스 손현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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