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방방곡곡/인천·섬

강화 광성보 용두돈대

by 구석구석 2022. 10. 6.
728x90

침략자들은 굶주린 맹수처럼 덤벼들었다. 파란색 눈은 마치 불이 붙은 것처럼 보였다. 포대와 신식총으로 무장한 채 새카맣게 기어올라오는 미 해병대를 내려다 보며 어재연 장군은 말했다. 두려워 말고 싸우거라. 우리가 물러서면 조선은 패망할 것이요, 앞으로 나아간다면 우리가 죽더라도 나라는 온존할 것이다. 1871년 신미양요. 강화 '광성보' 앞바다는 검붉은 피로 소용돌이쳤다.

135년이 지난 오늘, 당시 조선 군인들이 흘린 피는 선홍빛 단풍으로 피어났다. 갈색 노랑 연두… 광성보는 지금 울긋불긋한 나뭇잎들로 2006년 가을을 채색 중이다. 널찍한 주차장에 차를 대고 내리자 먼저 웅장한 '대문'이 기를 압도한다. 광성보 입구인 '안해루'다. 아아치형 문을 통과하자 왼 쪽으로 광성돈대가 눈에 들어온다. 오른 쪽은 오르막길이다. 그 길을 따라 양 옆으로 늘어선 나무들이 어서 오라는 듯 화려한 빛깔을 내뿜는다. 길 속으로 빨려들듯 '가을의 산책'을 시작한다.

바람이 불자 마른 잎들이 사선으로 흩날린다. 한 겹 두 겹 쌓이는 낙엽들… 길은 '뉴욕'이 되고 산책자는 '리처드 기어'가 된다. 동양적이면서도 깊고 그윽한 눈을 가진 그는 영화 '뉴욕의 가을'에서 '위노나 라이더'와 함께 낙엽의 바다를 걸었다.

넋 놓고 낙엽을 보고 있노라니 불현듯 하얀 눈이 오버랩된다. 마른 잎들이 땅 속으로 귀화할 때 쯤, 세상은 함박눈으로 뒤덮일 것이다. 계절의 무늬는 상상만으로도 사람을 로맨틱하게 만든다. 상념에 빠져 걷다가 마주친 것은 몇 개의 무덤으로 이뤄진 언덕. 신미양요 때 나라를 지키다 이름도 남기지 못하고 산화한 조선용사들의 합동무덤인 '신미순의총'이다. 공은 죽은 자가 쌓고 혜택은 산 자가 누리는 법이다. 우리 윗대의 희생은 현시대를 사는 이들에게 안온함을 남겨주었다.

손돌목돈대, 쌍충비각, 광성포대를 지나 용두돈대에 닿는다. 돈대 끄트머리에 서서 바다를 향해 시선을 던진다. 좁은 해협을 빠져나가는 물살이 사나워 보인다. 광성보 앞바다 유속은 6노트나 된다. 폭포수 낙하속도의 절반에 이르는 수치다. 조선 군인들이 잘 훈련된 미 해병대를 물리칠 수 있었던 이유는 이 급류를 이용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강화는 지리적 요충지"

"강화에선 예로부터 염하라고 부르는 곳이 있습니다. 강화해협이라고도 하는데 다른 곳은 모두 갯벌로 변해도 이 곳은 배가 다닐 수 있을 정도의 물이 흐르지요. 강화도 격전지는 바로 이 염하를 중심으로 설치돼 있습니다." 강화문화관광해설사 이병현씨는 '5진7보53돈대'의 배경을 이렇게 설명한다. 강화도를 가리켜 사람 목구멍에 해당하는 '인후지지'라고 하는 것을 볼 때 지리적으로 얼마나 중요한 위치에 있는 지 알 것이라고 그는 덧붙인다.

"신미양요 당시 미국은 세 명 죽고 한 명이 부상한 반면, 우리 나라 군인은 350명이 전멸했다고 전합니다. 당시 우리 군인들은 양 팔이 잘렸는 데도 입으로 물어뜯으려 덤빌 정도로 용맹하게 싸우다 전사했다고 하지요. 그 희생이 결국은 개항을 못 시키게 만든 것이지요."

손돌목

그가 갑자기 김포 쪽을 손으로 가리키더니 '손돌'에 대한 얘기를 끄집어낸다.
"음력으로 10월20일이 손돌님이 돌아가신 날입니다. 강화도엔 그 때가 되면 손돌추위가 찾아옵니다. 김포 땅에 뭍히긴 했지만, 강화에서 매년 손돌진혼제를 지냈어요."
강화 특산물 '순무'가 빠질 리 없다. "순무는 유럽에서 가져온 것인데 품질 개량을 거쳐 인삼과 겨자맛, 배추꼬랑지맛이 나도록 만들었죠. 다른 지역에도 심어봤지만 절대 이 맛이 나지않아 강화특산품이 된 것입니다." 

광성보의 성문인 안해루

'광성보'는 강화해협(염하)을 지키는 험한 요새로 강화12진보중 하나다. 고려가 몽골의 침략을 막기 위해 강화도로 수도를 옮긴 뒤 돌과 흙을 섞어 해협을 따라 길게 쌓은 성이다. 이 곳은 신미양요 때 가장 격렬했던 격전지다. 1871년 4월 미국 로저스 함대가 통상을 표방하면서 1천230명의 병력으로 침략하면서 초지진, 덕진진을 점령한 뒤 광성보에서 백병전을 전개했다. 이 때 조선군 지휘관 어재연 장군은 조선의 군인들과 함께 미국을 막아내고 장렬히 전사했다.

용두돈대 / blog.naver.com/llim34

강화해협 '용두돈대'는 암반위에 설치된 천연요새로 용머리를 닮아 붙여진 이름이다. 1679년 축성됐는 데 병인·신미양요 때 치열한 포격전이 벌어져 성축이 파괴된 것을 1977년 복원했다. '쌍충비각'은 어재연, 어재순 장군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각이며 '신미순의총'은 미군에 맞서 싸우다 순국한 이름없는 용사들의 묘이다.

용두돈대에서 김포 쪽을 바라보면 조그만 무덤이 하나 눈에 들어온다. 고려 고종 때 뱃사공인 손돌의 묘이며, 무덤이 보이는 지점을 '손돌목돈대'(손돌목)라고 부른다.

손돌은 당시 고종에게 충심으로 뱃길을 안내하다 몽고군의 첩자로 오해한 고종의 명령으로 처형된 인물. 그러나 나중에 고종이 자신이 잘못한 줄 알게 됐고, 그 때부터 이곳을 손돌목이라 부르게 됐다.

강화에는 광성보를 비롯해 지금의 군대로 치면 대대격인 '진'이 5개, 중대격인 '보'가 7개, 소대격인 '돈대'가 53개 있다. 5진7보53돈대는 강화섬을 중심으로 빙둘러 위치하고 있으며 강화사람들이 '염하수로'라고 부르는 강화해협에 밀도높게 배치됐다. 나라를 지키려고 산화한 순국선열들의 선혈이 낭자, 피바다를 이뤘던 격전지는 지금 '평화로운 유적지'로 사람들을 만나고 있다. 

/ 인천일보 김진국

 

고능리 아침가리 팜스테이마을

면소재지에서 화도돈대 가다보면 있는 부지런하고 부지런한 마을 마을 이름과 풍경과 그리고 사람이 하나가 된 것처럼 통일된 마을이다. 

아침가리란 조경이란 한자를 순우리말로 풀이한 이름인데 아침 일찍부터 밭을 갈고 씨를 뿌린다는 뜻이다. 또한 이 마을의 농부들이 그만큼 부지런하다는 말이다. 왜 그렇게 열심히 일하냐는 다소 우문에 가까운 질문을 했더니 마을 대표 역시 우답에 가깝게 대답한다. 〃원래부터 그랬지요〃 더 이상 물어볼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한살림쌀` 과 재래식 오이 그런데 알고보니 이 마을이 경주최씨 집성촌이었다. 왜 그런말이 있지 않은가? 최씨 고집이라고, 또 최씨가 앉은자리에는 풀도 안 난다고. 아침가리 마을의 부지런한 농부에 대한 보답인지 자연은 이들에게 옥토를 주었다.

마을의 토질은 강화에서 최고이며 미질도 최고다. 오리농법으로 재배한 `한살림쌀` 은 없어서 못 팔정도고 특히 재래식으로 재배되는 오이는 향이 뛰어나 최고로 인정받고 있다. 팜스테이 마을로 지정되면서 마을 사람들은 환경농업교육관을 만들어 많은 사람들에게 환경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있기도 하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