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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충청북도

진천여행 농다리 태령산 길상사 정송강사 배티성지

by 구석구석 2022. 1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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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천군 문백면 구곡리 굴티부락 앞을 흐르는 세금천에 농다리가 있다. 이 다리는 전체 길이는 100미터 정도의 긴 다리였으나, 현재는 28칸 가운데 25칸이 남았고 93미터 정도로 폭이 1미터 정도이다.

▲ 황사에 덮여있던 진천 농다리 모습

이 다리의 특징은 작은 돌을 물고기 비늘처럼 쌓아 올린 후 지네모양을 본떠 길게 늘여 만들었다고 하며, 장맛비에도 잘 견디고 있어 튼튼함을 보여 주기도 한다. 또 과학적 공법의 우수함을 짐작하게 할 만큼 특이하며 고려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되기도 한다.

태령산

김유신장군은 만노군 태수(萬弩郡 太守, 만노: 진천의 옛이름) 김서현(金舒玄)장군의 아들로 진평왕 17년(595년) 진천읍 상계리 계양 마을에서 출생하였다. 
 

국가지정문화재(사적 제414호) 김유신 탄생지

지금의 계양(桂陽) 마을 입구에 장군터(태수 관저가 있던 곳)라 불리워지는 곳에 1983년에 유허비(遺墟碑)를 건립하였으며, 이 곳에서 북동방향 500m 지점에는 태수 관저에서 사용했다는 우물터 연보정(蓮寶井)이 현존하고 있으며 무술 연습과 말달리기를 했다고 전해오는 치마대와 태실은 해발 461.8m의 산정상에 원형으로 석축이 있고 그 주위에 경사면을 에워싼 길이 216m, 높이 1-1.3m규모의 석축이 산성처럼 드리워져 있으며, 우리 나라 태실의 최고형식에 속하는 중요 유적이다.

길상사

길상사는 진천 도당산에 있는 삼국통일의 위업을 완수한 흥무대왕 김유신의 영정을 봉안한 사당이다.

김유신(金庾信) <595-673>은 진평왕(眞平王) 31년에 화랑이 되고 낭비성(娘臂城)싸움에 공을 세워 압량주(押梁州) 군주가 되었다.

진천군 덕산면 지역은 미호천 상류에 형성된 충적지대로 노령화된 낮은 구릉지대로 이루어져 있는데, 철생산유적은 덕산면 구산리, 석장리, 기전리 등 인접된 세개의 마을에 걸쳐 있는 해발 105.2m의 야산에 북족으로 흘러내린 완만한 구릉의 서쪽 사면에 자리하고 있다.

석장리 철생산유적지

발굴지역에서 모두 38기의 철 생산 또는 철제품 제작활동과 관련된 노적이 확인되었으며 노의 내벽과 바닥면의 구조는 고대 제철로의 복원에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유적은 낮은 구릉의 작은 골짜기를 이루는 경사지를 이용하여 한정된 공간에 다양한 노적이 밀집해 있었다. 또한 제련에서 단야까지 일련의 공정을 확인할 수 있었으며 규모와 형태에 있어서도 장방형의 대형 상형로를 비롯하여 원형로, 방형로, 장방형로 등 다양하게 조사되었다.

진천 석장리유적은 고대국가 형성과정의 중요한 경제적 기반이 되었던 철생산의 양상을 밝히는 중요한 유적으로서 국립청주박물관에 의해 1994년에처음 발굴,조사되었다.

지방기념물 제77호로 이상설(1870∼1917) 선생이 태어난 생가

이상철선생은 이행우의 아들로 태어나 1894년 문과에 급제한 뒤 성균관교수, 한성사범학교 교관 등을 역임하면서 영어, 프랑스어 등 7개국어를 구사하여 신학문을 깨우쳤다. 1904년에는 보안회의 후신으로 대한협동회를 조직하여 민족 운동을 하였으며, 탁지부 재무관 법부협판을 거쳐 1905년에는 의정부 참찬에 발탁되었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소련령으로 이주, 한흥동의 한인마을을 건설, 민족교육을 시키다 1917년 47세 때 병으로 세상을 떠나셨다.

도지정문화재(기념물제9호)인 정송강사

 정송강사는 송강 정철선생(1536∼1593)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으로 지방기념물 9호이다.

선생의 묘소는 원래 경기도 고양군 원당면 신원리에 있던 것을 현종6년(1665)에 우암 송시열이 지금의 묘소로 자리를 정하고 그의 후손 정양이 이장하여 사우를 창건하였으나 규모가 작아 1979년에 전면 신축정화하였다.

사당은 목조19평 맞배지붕이고 유물전시관은 시멘트32평 팔작지붕으로 되어있다. 경내에는송강묘소와 신도비가 있으며 송강선생의 은배, 옥배 그리고 연행일기65일분과 친필편지 등이 보관, 전시되어 있다.

정철선생은 조선시대의 정치가로 좌의정을 지냈으며 우리나라 가사문학의 대가로서 자는 계함, 호는 송강, 본관은 영일로 기대승, 김인후 등의 문인으로 명종 16년 진사와 별시문과에 장원, 지평을 거쳐 함경도 암행어사를 지내고 율곡과 함께 사가독서의 은전을 입었다.

노고산 아래 위치한 배티성지는 많은 순교자의 종교정신을 기리고 기도하는 장소와 피정의 집으로 활용되었으나 십자가와 묵주만이 남아 천주교 박해의 정도를 가늠케한다. 

동네어귀에 배나무가 많은 배나무 고개라서 이치란 말이 생겨났고 이것이 순수한 우리말로 배티라 불리게 되었다는 설과 조선 영조때 이인좌가 난을 일으켰을 때 백곡을 지나다 이 마을 노인 이순곤이 이끄는 주민에게 패한 뒤 다시 안성쪽으로 향하다 오명황이 이끄는 관군에게 진압 패전하였다는데서 패치라 불리우다 바뀌었다는 설이다.

1870년부터 다시 신앙이 싹터 1884년에는 선교사들이 진천에 배티, 삼박골, 용진골, 새울, 굴티등 5곳에 공소를 설정하게 되었으며 1890년에는 배티공소에 "교리학교"가 세워지기도 했다.

배티성지는 많은 순교자의 순교정신을 기리고 기도하는 장소나 피정의 집으로 사용되었으며 현재는 십자가와 묵주만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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