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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전라남도

해남 학동리 우수영관광지 명량대첩

by 구석구석 2022. 11.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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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군 문내면 관광레저로 12 / 우수영관광지 061-532-4088/061-530-5541

진도대교와 울돌목, 오른쪽 다리 왼쪽편 움푹 들어간 곳이 '명량리'이며, 그 뒤 크게 움푹 들어간 바다에 접한 마을이 임진왜란 당시 우수영이 있었던 곳으로 마을 이름도 '우수영'이다/김준

문내면 학동리에 위치한 명량대첩공원은 임진왜란 3대 수군대첩지의 한곳으로 이순신이 대승리를 이룬 명량대첩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하였다. 임진왜란 7년 전쟁을 종식시킨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한 곳으로 당시 최후의 교두보였던 울돌목을 성지화하기 위하여 세운 기념공원으로서 의의를 가지고 있다. 

 

명랑대첩

역사성을 지닌 전라우수영이 표면에 드러난 계기는 다름아닌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장군이 이룩한 명량대첩이다. 이순신장군이 옥에서 풀려나 권율 휘하에 있다가 백의종군하던 중 나라의 위태로움 때문에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을 받고 그날로 장흥 회령포에 이르러 간신히 12척의 범선을 수습하여 이곳 우수영에 당도했다. 이때 왜군들은 4백여척에 2만명의 군인을 싣고 울돌목을 통과하여 예성강으로 진출 이미 직산에 머물러 있던 육군과 합세해 서울을 침범하려는 계획이었으나 일본군에 있어 울돌목 장악은 중요한 과제였다.

임진년 전라수사로 있을때부터 울돌목의 지형조건을 파악한 장군은 치밀하게 준비해 나갔다. 쇠사슬 두줄을 안목과 밖목에 건너 매 올렸다 내렸다 할 수 있도록 울돌목에 장치해 두고 장수들을 불렀다. '병법에 이르기를 죽으려 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 하였고 또 한사람이 길을 막으면 천사람을 두렵게 할 수 있다 하였으니 이것은 지금의 우리를 이름이라. 

공들은 살 생각을 말고 조금도 명령을 어기지 말라' '나라를 위해 죽기로서 싸워라, 만일 조금이라도 영을 어기는 자는 군법을 시행하리라' 하여 임전결의를 다졌다.

1597년 9월 16일 새벽. 드디어 어란포에 머물고 있던 일본수군들이 밀물을 타고 명랑으로 공격해 왔다. 이순신이 12척의 배로 이를 공격하니 왜선이 이순신의 배를 포위하여 격전이 벌어졌으나 장군은 적장 마다시를 향해 시위를 당겼다.

이때 기다리고 기다렸던 조수가 썰물로 돌아서자 마다시와 기함을 잃은 왜군들은 혼비백산 도망가느라 바빴다. 이때 대파된 왜선은 1백 33척으로 세계해전사상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대승리였다. 이것이 그 유명한 명량대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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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량대첩제는 10월말경에 우수영에서 열리며 세계 해전사에 빛나는 명량대첩이 울돌목에서 재현된다. 

들리는가? 울돌목의 북소리가!’를 주제로 수군통제사 입성식, 명량해전 재현, 판옥선 만들기 등 체험프로그램과 각종 축하공연과 전시 등 특색 있는 프로그램으로 준비된다. 이순신 장군이 정유년 9월15일 우수영으로 입성하는 모습을 재현한 삼도수군통제사 입성식을 필두로 한 명량거리 퍼레이드는 개막행사로 펼쳐진다. 대흥사에서는 스님과 신도 등 50여 명이 참여해 임진왜란 당시 활약을 한 서산대사 등 승병의 모습을 재현한다.

우수영 울돌목에서 410년 전 이순신 장군의 명량해전이 재현된다. 이 행사에는 이순신 장군의 후예이면서 명량대첩의 주역인 해남어민이 직접 자신의 선박 50여척을 가지고 참가해 의미를 더한다. 강강술래와 전통혼례, 소고춤, 대북 공연, 삼도수군통제사 입성식, 의장대·특공무술 시범, 해상퍼레이드도 볼 수 있다.

마지막 날은 우수영 부녀농요, 기예단과 국악단 공연 등으로 갈무리한다. 함거 후송과 거북선 만들기, 장군복 입고 말 타기, 난중일기 쓰기 등은 행사기간 내내 해볼 수 있는 체험이다.

울돌목은 해남과 진도사이의 좁은 해역이다. 이곳은 바다물의 유속이 매우 빠르고 소용돌이를 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매우 보기드문 지형이다. 넓은 해역에서 물이 마로해를 통과해 좁은 수로를 따라 울돌목을 통과하게 될때, 이 좁은 수로를 많은 물이 통하게 되므로 울돌목에서는 수면의 높이가 올라가고 압력이 생긴다. 이 물이 진도대교 밖을 빠져나가서 우수영 남쪽의 넓은 해역으로 빠져나갈때는 마치 봇물이 터지듯 펴져나가게 되므로 굉장한 유속을 형성하게 된다.

밀물때 넓은 남해의 바닷물이 좁은 이 울돌목으로 한꺼번에 밀려나와서 서해로 빠져나가게 된다. 이렇게 되면 해안의 양쪽 바닷가와 급경사를 이뤄 물이 쏟아지듯 빠른 급조류가 흐르는 것이다. 최고유속은 11노트이며, 1초에 5.7m정도이다.

또한 울돌목의 해저지형은 수십개의 크고 작은 암초가 솟아있다. 급조류로 흐르던 물살이 암초에 부딪혀 방향을 잡지못하고 소용돌이를 치게 되는 것이다. 

바다가 운다고 해 명량이라 이름되기도 하는 울돌목은 해남군 우수영과 진도군 녹진사이를 잇는 가장 협소한 해협으로 넓이가 325m, 가장 깊은 곳의 수심이 20m, 유속이 11.5노트에 달해 굴곡이 심한 암초사이를 소용돌이 치는 급류가 흐른다.

우수영 관광지에서 바라본 울돌목과 진도대교 야경/주간동아

이러한 빠른 물길이 암초에 부딪쳐 튕겨져 나오는 바다소리가 20리 밖까지도 들린다고 한다. 이러한 지형의 특징이 정유재란 당시 4백여척의 왜선들에게 손쓸 방도도 없이 참패를 안겨준 큰 요인이 됐던 것이다. 울음을 터트리는 울돌목 바다위로 지금은 아취형 진도대교가 허공을 가른다.

 

구경하기좋은 곳

진도대교 북쪽 끝단에 휴게소와 대교관리소가 있다. 이곳으로 들어가면 울돌목의 물흐름을 제대로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뜰채로 고기를 들어올리는 이색낚시를 구경할 수 있다. 또한 진도대교 남쪽 끝자락 파출소 앞에서 산쪽으로 난 길을 따랄 올라가면 녹진 전망대가 있다. 여기서 명량해협과 녹진리 주변 경관이 한눈에 보인다.

해남우수영과 진도타워 간에 운행중인 케이블카. 사진/ 박상대 기자

충무사

충무공 이순신의 충성심과 구국정신을 추모하기 위해 1964년 건립한 사당이다. 명량대첩 비 와 충무공 영정을 봉안하고 있다.

충무사에 세워진 명량대첩 비 는 조선 숙종 때 충무공이 정유년(1597) 9월 16일 우수영 울돌목에서 거둔 명량대첩 을 기록한 것인데 비문은 숙종 때 대학자 예조판서 이민서가 짓고 당대의 명필(名筆) 판돈령부사 이정영이, 홍문관 대제학 김만중이 전자로 써서 숙종 14년 3월에 문내면 동외리에 건립했다.

그런데 2차대전을 유발한 일본의 조선총독부가 왜란당시 크게 패한 기록이 담긴 그 비(碑)를 가만둘 리 만무했다. 그래서 1942년 전남 경찰부에 비를 뜯어서 서울로 올리라는 명령을 내리자 일본인 경찰들이 인부들과 목수, 학생들까지 강제 동원하여 높이 2.67m, 폭 1.14m나 되는 거대한 비석을 500m 떨어진 우수영 선창으로 옮겼으며 비각을 흔적도 없이 헐고 말았다.

명량대첩비 는 1965년 보물 503호로 지정, 66년에는 사당이 지어졌다. 그후 75년 성역화를 위한 조경사업을 시작해 충무공 탄신일에 고 박정희 대통령이 친필한 충무사라는 현판을 걸었으며 매년 4월 28일 제향(祭享)하고 있다.  우수영성지지방기념물 제139호 (92.3.9)로 지정된 곳이다. 조선조 세종 8년(1426년)에 설치 고종 32년(1895년) 폐쇄까지 약 500여년 동안 우리나라 서남해안을 지켜온 해군기지이다.

세조 11년 (1465)에 수군절도사영으로 승격·개편되었다. 성종 10년(1479) 순천 내례포에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영이 설치된 후부터 전라우도 수군절도사영(약칭 전라우수영)이라 칭하게 되었다. 영역은 원문내 남북 길이 10리, 동서 너비 5리이었다. 영성(營城)은 석축 둘레 3,843척, 높이 11척, 여첩 607개, 호지 3개소가 있었다.

『전라우수영지』(1787)에 의하면 영내의 민호는 620호, 수군 장졸의 병력은 1,085명을 보유하였다. 한편 본 영의 관할구역은 시대에 따라 변화가 있었으나 임란 이후부터 한말에 이르기까지 대체로 나주·영광·함평·무안·영암·해남·진도 등 7관을 속읍으로, 관내의 속진으로는 금갑도·남도포·어란진·고금도·신지도·마도진·목포진·이진진·다경포·법성포·임치진·지도진 ·주도진·금모포·고군산·선산진·흑산도·청산진·가리포 등 19진이었다.

우수영의 축성은 설치 위치로는 해안성, 축성재료로는 토성과 석성의 혼합성, 평면형태로 사각형과 원형의 중간형태인 부정형성, 축성방법으로는 편축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성돌의 크기는 일반적으로 아랫쪽은 150㎝ 이상이 되는 것들도 있으나 올라가면서 50㎝에서 30㎝정도로 작아진다.

/ 자료 - 명량대첩기념공원, 해남문화유적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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