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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충청남도

서천 영모리 문헌서원

by 구석구석 2022. 9.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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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천군 기산면 서원로172번길 66 (영모리) / 문헌서원 충남 지정문화재 자료125호(1984.05.17)

문헌서원은 고려말 대학자 가정 이곡과 목은 이색 두 분을 배향하기 위해 선조 27년(1594년)에 건립외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된 이후 광해군 3년에 한산 고촌으로 옮겨 다시 세워졌으며 이듬해 (1611년) 문헌서원으로 사액되고 앞의 두분과 이종학, 이자, 이개 등 다섯분의 위패를 모셨다. 현재는 이종덕 한분을 더해 여섯분의 위패를 모시고 매년 음력 3월과 9월에 제사를 올리고 있다. 문헌서원은 크게 두 공간으로 나뉜다. 하나는 강당과 진수당, 서재가 배치된 강학 공간이고, 다른 하나는 강학공간 뒤 한단 높은 대지에 사당을 배치한 묘당 공간이다.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125호로 지정된 문헌서원 일원은 서원내의 건물인 3칸의 사우(祠宇), 이색선생 문집 목판각 등이 잘 보존된 창고가 있으며, 2층 누각으로 된 6칸의 강당, 3칸의 목은영당, 목은선생 신도비, 이종덕 효행비각 등이 있다.

이곡은 고려 후기 학자로서 이색의 아버지이다. 원나라의 과거에 급제하여 실력을 인정받았고, 문명을 떨쳤다. 이색은 고려 후기 문신이며 학자이다. 원·명교체기에 친명정책을 지지하였고, 유교의 입장에서 불교를 이해하고자 하였다. 그의 문하에서 권근, 김종직, 변계량 등을 배출하여 조선 성리학의 주류를 이루게 하였다.

특히 문헌서원일원 중 이색영당의 후면에 아름드리 백일홍이 피어 있어 백일홍이 만개하는 8월은 백일홍 꽃이 가지를 따라 피어오른다. 백일홍 꽃이 지붕위로 부채살처럼 펼쳐져 목원 영당과 아름답게 어우러진 우리 전통건축의 자연미를 볼 수 있는 문헌서원 일원은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경관 또한 수려하여, 사철 언제든 들려보기에 좋은 곳이다.

 

시도유형문화재77호(1978.03.31) 가정 목은선생문집판(稼亭牧隱先生文集板)

고려 후기의 대학자인 가정 이곡(李穀,1298∼1351)과 그의 아들 목은 이색(李穡,1328∼1396)의 문집을 간행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이곡은 이제현의 문인으로 도첨의찬성사를 지내고 한산군으로 봉해졌다. 이색은 성균관 대사성을 지낸 성리학자로서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와 함께 고려가 망할 때 태조 이성계에 굴하지 않고 절개를 지킨 삼은(三隱)으로 불린다. 현존하는 목판은 975판이 있으며, 문헌서원 장판각에 보존되어 있다. 이 목판은 한국 문화사 뿐만 아니라 국문학사의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문화재자료 127호(1984.05.17) 이색신도비(李穡神道碑)

이색(1328∼1396)은 고려 후기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를 따르지 않고 충절을 지켰던 삼은(三隱)의 한 사람으로, 공민왕 때에는 전제의 개혁, 국방계획, 교육의 진흥, 불교의 억제 등 여러 개혁정책에 관한 건의문을 올리기도 하였다.

또한 중국의 원·명교체기에 있어서는 친명정책을 지지하였으며, 고려 후기 유교가 들어오면서 불교를 배척하자는 의견이 대두되자, 유교의 입장에서 불교를 이해하여 점진적인 개혁을 통해 불교의 폐단을 없애고자 하였다.

조선 태조 4년(1395) 조정에 머물라는 왕의 권유를 끝내 거절하고 여강지역으로 가던 중 생을 마치었다.

비는 낮은 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우고 지붕돌을 올린 모습이며, 비문에는 ‘선생은 후에 죄를 얻어 폐출되었으나, 하늘과 땅만이 그의 고결한 마음을 알리라’라는 내용을 새겨 놓았다. 세종 15년(1433)에 처음 세워졌으나 임진왜란 때 잃어버리고, 현종 7년(1666) 후손들이 다시 세워 지금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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