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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경상북도

울진 북면-두천리 십이령트래킹 십이령옛길

by 구석구석 2009. 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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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지게꾼들 울진~봉화 넘나들던 열두고개 흔적 좇아

길은 새로운 길을 열기도 하고 지우기도 한다. 가장 빠르게 이곳에서 저곳으로 가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을 반영한다. 아직 두 다리가 가장 믿을 만한 이동수단이던 시절, 사람들은 편평하지만 돌아가는 길보다는 첩첩 산을 넘고 또 넘으며 가까운 길을 찾았다. 산마루에는 수없이 많은 고개가 생겨났다.

 

자동차가 등장하면서 고갯길은 빠른 속도로 지워지기 시작했다. 굳건히 대지를 딛고 육신을 지탱하던 두 다리의 당당함도 함께 거세당하기 시작했다. 많은 고갯길은 육체의 원시성을 가슴에 묻은 채 풀더미에 묻혀갔다. 지금 우리는 그러한 길을 ‘옛길’이라 부른다. ‘12령길’도 그런 길이다.

 

‘십이령길’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도로가 사통팔달한 요즘도 오지 중 오지인 경북 울진에서도 오지인 산골에 있는 까닭이다. 실제로 울진 주민 가운데도 십이령길 가까이에 살거나 향토사에 관심이 깊은 사람이 아니면 아는 사람이 드물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왜 십이령길을 호명하는가? 아니, 왜 십이령길로부터 호출 당하는가?

▲ 계곡과 오순도순 길동무 하는 십이령길. 계곡가의 활엽수림이 고운 단풍을 예고한다.

옛길을 걷는다는 것은, 문명에 감금된 육체의 복권이다. 하루만이라도 온전히 몸으로 삶을 경영하던 시절로 돌아가 보는 일이다.

 

십이령길은 경북 울진의 흥부장(현 부구리)에서 경북 봉화장을 오가던 행상(行商), 즉 등짐장수들이 낸 길이다. 이들을 교과서식으로 ‘보부상’이라 말하면 이들의 실체가 피부에 와닿지 않는다.

 

귀중품이나 장신구, 잡화 따위를 보따리에 꾸려 다니던 봇짐장수[褓商]와 소금이나 곡물, 해산물 따위를 지고 다니던 등짐장수[負商]를 싸잡아 이르는 ‘보부상’이란 말은 이 지역 사람들의 ‘입말’이 아니다. 울진 사람들에게 이들은 ‘바지게꾼’으로 불렸으며 ‘선질꾼’이라고도 일컬어졌다.

 

여기서 ‘바지게’라 함은 지게 위에 얹는 ‘바소거리’를 이르는 것이 아니라 동해안 일대의 등짐장수들이 쓰던 다리 없는 지게를 가리킨다. 무거운 해산물을 지고 좁은 산길은 날렵하게 다니기 위해 지게 다리를 없애고 쉴 때조차도 서서 쉬었다 하여 ‘선질꾼’이었던 것이다.

 

그 바지게꾼이 흥부장에서 소금이나 해산물을 지고 봉화장으로 향하던 하루거리에 있는 마을이 바로 두천2리(바깥말래)다. 당연히 주막이 열렸을 것이고 바지게꾼들과 말래 사람들의 삶은 불가분의 관계를 맺었을 것이다.

 

행상 우두머리 권재만·정한조 기리는 비도 서 있어

 

십이령길은 두천2리에서 봉화에 이르기까지 열두 개의 고갯마루를 넘는 길을 말한다. 150리에 이르는 산길에 어찌 고개가 열둘뿐일까만 하도 많다보니 열두고개라고 이름 지었을 것이다. 따라서 십이령길에는 ‘십이령’이라는 이름의 고개가 없다.

 

국토지리정보원의 5만분의 1 지도에 표기된 십이령은 이 길의 한 부분이긴 하지만 오류임이 분명해 보인다. 십이령은 특정 고갯마루가 아니라 열두 고개의 통칭이다.

 

취재팀은 최대한 바지게꾼의 삶을 느껴볼 요량으로 두천 가까이에 있는 구수곡 휴양림에서 야영을 하기로 했다. 울진군과 삼척시 경계에 있는 응봉산(998.5m·울진에서는 ‘매봉산’이라 함) 남서쪽으로 아홉 물줄기가 흘러든다는 구수곡의 그윽한 풍광만으로도 우리는 등짐 가득 질 좋은 해산물을 채운 듯하다.

▲ 십이령길에서 안말래 쪽으로 갈라져 흐르는 십이령골. 너럭바위와 급류의 조화가 아름다운 계곡이다.

 

느긋이 초가을 아침 햇살을 즐기며 두천2리로 향한다. 마을회관 앞에서 신들메를 조이고 산으로 오르는 길을 따른다. 5분 남짓 걷자 계류를 만난다. 다리를 건너지 않고 오른쪽으로 제방을 따라 100여m쯤 흐르자 맞은편 협곡 초입에 비각이 보인다. 십이령길의 들머리다. 징검다리를 건너자 비각 안에 철로 만든 두 개의 비가 서 있다.

 

쇳물을 끓여 만든 비에는 다음과 같은 글자가 돋을새김 돼 있다. ‘乃城行商班首權在萬不忘碑(내성행상반수권재만불망비)’,  ‘乃城行商接長鄭韓祚不忘碑(내성행상접장정한조불망비)’.

 

행상 전체의 우두머리인 권재만과 행상단 하위 동아리의 우두머리인 정한조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않겠다는 이곳 사람들의 순정을 담은 비(경상북도 민속자료·1890년대에 세운 것으로 추정)일 터이다.

 

그런데 이를 언급한 앞선 글들은 산적이나 산짐승으로부터 바지게꾼을 보호해 준 은공을 기린 것으로 해석하는데, 조금 주의 깊지 못한 판단이 아닌가 싶다. 왜냐하면 두 사람 다 내성(봉화의 옛 이름) 사람이고 행상을 이끌던 사람인데, 그렇다면 당연히 봉화 사람들이 비를 세우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더욱이 이곳 두천 사람들은 직접 행상을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 까닭은 다른 데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이에 대한 의문은 잠시 제쳐두고 일단 길을 따르기로 하자.

 

길은 불망비 맞은편 산기슭 왼쪽을 향한다.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밭 옆으로 곧게 난 길을 따르기 쉽다. 가파른 기슭을 오르면 곧 효자각이 나타난다. 이곳에서 능선과 밭 사이로 길이 이어진다.

▲ 새재[鳥嶺]를 지나면 풀 더미 속에 지워져 가는 옛길을 만나게 된다.

기서도 조금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밭을 따라 곧장 가면 길을 잃을 수 있다. 왼쪽 능선을 타야 한다. 그 다음부터는 풀이 무성하게 덮이긴 했어도 길 흔적이 뚜렷하다.

 

참취꽃과 쑥부쟁이꽃이 해맑게 웃고 있는 오솔길을 헤치고 된비알을 오르자 금강송 사이를 지나는 완연한 능선길이다.

 

드문드문 화전을 일구었을 듯한 곳과 얕은 석축을 두른 집터도 눈에 띈다. 우엉도 심심치 않게 보이고 배나무도 발견된다. 돌배가 아니라 과수로 보인다. 아직도 남아 있는 화전민들의 숨결이다. 손바닥만한 땅에 기댄 이들의 삶이 얼마나 곤고했을까만 그래도 이곳에서 아들딸 낳고 가족을 이루어 살았을 것이다. 눈물겨워서 아름다운 이들의 삶 앞에서 오늘 우리들의 풍요는 오히려 누더기 같아서 슬프다.

 

호젓한 산길을 걷는 즐거움과 착잡함이 엇갈리는 길을 40여 분쯤 지나자 찻길이 나온다. 임도처럼 보이는 길이지만 사실은 임도가 아니다. 36번 국도에서 소광리로 갈라져 울진군 북면 부구리와 죽변면 죽변리의 동해안 7번 국도와 만나는 917번 지방도다. 행정용어로 도로 등급은 국가지원지방도. 지극히 국지적이면서도 광역성을 지닌 길인 셈이다.

 

이 길을 이용하면 36번 국도에서 울진읍을 거치지 않고 대각선으로 북면에 이르러 삼척으로 갈 수 있다. 편안한 길은 아니지만 받아들이기에 따라서는 소광천의 풍광을 즐기면서 소광리 금강송 군락을 둘러보고 덕구온천까지 갈 수 있는, 다듬지 않은 보석 같은 드라이브 코스일 수 있다.

 

단풍 들면 계류도 광채를 더할 것

 

어쨌든 찻길과 합류한 지점이 바로 발현동이다. 이곳에서부터 새재까지는 십이령 옛길과 찻길은 포개져 있다. 부분 포장과 비포장이 반복되는데, 옛길의 정취가 없다고 투덜거릴 일만은 아니다. 예나 지금이나 이 길은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계곡 물길이 사람에게도 길을 열어준 셈이기 때문이다.

 

옛길을 걷는다는 것은, 자연의 흐름에 공명하는 일이자 옛사람들의 방식대로 자연에 깃드는 일이다. 따라서 옛길의 의미를 제대로 느끼려면 생태적 감수성뿐만 아니라 인문지리적 감수성도 필요하다.

 

발현동은 산골치고는 제법 너른 밭이 펼쳐진 곳이다. 두 채의 농막을 지나자 아름드리 엄나무가 서 있다. 이곳이 발재다. 나무 뒤 산기슭에 성황당이 있다. 바지게꾼들이 한숨을 돌리며 이제부터 이틀은 좋이 가야할 행로의 안녕을 기원했을 것이다.

 

발현동에서 느긋이 25분쯤 가자 길 왼쪽으로 거침없는 계류가 암반을 녹여 이룬 근사한 계곡이 나타난다. 취재팀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배낭을 부린다. 계류에서 탁족을 즐기며 한껏 게으름을 피운다. 이곳에서 점심을 먹고 낮잠까지 즐긴 다음 새재로 향한다.

▲ (왼쪽)살짝 계곡으로 내려서면 청신한 계류를 만날 수 있다./(오른쪽)금강송이 동무를 해 주는 십이령 길.

 

길은 계속 계곡을 끼고 간다. 계곡 가로 졸참나무, 서어나무, 누리장나무, 물박달, 층층나무, 쪽동백, 다래덩굴, 고로쇠나무들이 원시의 기운을 내뿜는다. 사이사이로 단풍나무가 가을 햇빛에 곱다. 이제 곧 물이 들면 계류도 광채를 더할 것이다.

 

십이령골과 십이령길이 만나는 지점에서 새재 직전까지는 계속 찻길이다. 십이령길이 찻길을 버리고 새재로 올라서는 지점까지는 쉬엄쉬엄 걸어도 1시간30분 정도. 거듭 강조하지만, 이 길을 걸으며 옛길의 분위기가 망가졌다고 타박하는 건 감정의 사치거나 낭비다.

 

계곡 물소리에 귀를 맡기고 나무들의 춤사위를 따라 함께 너울거릴 일이다. 환상적인 계곡이라고 하면 분명 호들갑이 되겠지만 자연의 충만한 생명력을 느낄 수 있는 길이다. 이 일대가 산양 서식지임이 그것을 보증한다.

 

새재가 가까워지면서 길은 가풀막으로 바뀌고 거의 말발굽 모양으로 휘어 돌기 시작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왼쪽 산기슭으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급하게 흐르는 작은 계곡이 새재로 오르는 길이다. 이곳에서부터 찻길과는 안녕이다. 도로공사를 하면서 허문 산허리의 바위에 붉은 스프레이 페인트로 화살표가 되어 있기 때문에 길을 잘못들 염려는 없다.

▲ 십이령길이 시작되는 말래(두천 2리)의 내성행상불망비각. 십이령을 넘나들던 등짐장수들을 기리는 말래 사람들의 아름다운 마음씨가 철조비에 새겨져 있다.

 

화살표시를 따라 10여 분쯤 된비알을 오르자 홀연히 당집 하나가 나타난다. 조령성황사(鳥嶺城隍祀)라는 편액을 달고 있다. 이곳이 바로 새재(595m)다. 새재를 넘어 대광천까지는 마냥 내리막길이니 무거운 짐을 진 바지게꾼들이야 어찌 성황님께 무사 안녕에 대한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안도와 한숨이 섞인 노랫자락이 절로 나왔을 법하다.

 

“미역 소금 어물 지고 춘양장을 언제 가노/ (후렴) 가노 가노 언제 가노 열두 고개 언제 가노  / 시그라기 우는 고개 내 고개를 언제 가노 / 한 평생 넘는 고개 이 고개를 넘는구나 / 서울 가는 선비들도 이 고개를 쉬어 넘고 / 꼬불꼬불 열두 고개 조물주도 야속하다 / 대마 담배 곡물 지고 흥부장을 언제 가노 / 오나 가나 바지게는 한평생 내 지겐가 / 오고 가는 원님들도 이 고개를 쉬어 넘고 / 꼬불꼬불 열두 고개 언제 넘어 고향 가노.” -<모퉁이를 돌면 무엇이 나올까>(글 이정숙, 사진 김부래)에서 인용.

 

일제 강점기에도 바지게꾼들 수없이 넘어 다녀

 

조령성황사의 내부에 있는 중수 기록을 보면 소화 10년이라고 적혀 있는데 서기로는 1935년이다. 미루어 보건대 최소한 보부상이 전국적으로 조직화되고 보부청이 설치된 1866년(고종 3년) 이전부터 일제강점기까지도 바지게꾼들이 끊임없이 십이령길을 넘나들었다는 얘기가 된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이 길이 잊혀지기 시작했을까. 두천2리 노인회장 김용호(73)씨의 얘기를 들어 보자.

 

“북면(흥부장)에서 장사꾼들이 미역이나 어물을 사서 하루만에 여기(두천2리)를 와요. 여기서 하루 자고 이삼일씩 걸려서 춘양 봉화장으로 갔지. 그래서 이곳에는 주막도 있었고, 또 이곳 사람들이 등짐을 져 나르는 일을 하기도 했어요. 마지막으로 그 사람들을 본 건 1950년대 중반이야. 6·25전쟁이 끝나고 무장공비 때문에 장사꾼들의 발길이 끊어졌지.”

 

무장공비가 아니어도 그 무렵부터는 바지게꾼의 구실은 없어지기 시작했을 것이다. 통로로서 길의 운명은 문명을 흐름에 따를 수밖에 없으니까. 한편 김용호씨의 얘기 속에 왜 내성(봉화) 사람인 행상의 우두머리에 대한 불망비가 이곳에 섰을까 하는 의문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모든 것이 부족할 수밖에 없는 산마을 사람들에게 행상들은 상당한 보탬이 됐을 것이다. 농한기에는 등짐을 져 주는 일로 가용을 보탰을 것이니 마을 사람들에게 바지게꾼은 장사꾼 이상의 존재였을 것이다.

 

더욱이 일제 말기인 1944년에 그야말로 ‘억지 춘양’격으로 주민을 강제 동원하여 영주와 춘양을 잇는 철도를 놓기 시작하여 1955년에 철암까지 영암선이 개통된 후 교통의 요지가 된 영주로 상권이 넘어가기 전까지 이 지역 상권의 중심지는 봉화였다고 한다. 이런 사정을 알고 보면 당시 행상의 우두머리는 상당한 영향력을 지난 인물이었을 것인데, 인품 또한 되바라진 장사치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새재에서 다시 찻길을 만나게 되는 대광천까지는 편안한 내리막이다. 시작 지점인 두천리 불망비의 해발고도가 112m인데 비해 대광천 합류지점은 460m로 새재와의 표고차가 135m에 불과하다. 빼어난 풍광은 없지만 재잘거리는 계곡물을 따라서 1시간 정도면 충분하다.

▲ (왼쪽)십이령골에서의 탁족. 옛길 걷기의 즐거움이 배가된다./(오른쪽)내성행상 불망비.


금강송 군락지에서 약 3.7km 떨어진 지점이다. 불망비에서 이곳까지는 약 9.5km. 걷는 시간만 따지면 3시간10분에서 30분 정도. 충분히 쉬고 즐기면서 하루를 보내기에 적당한 길이다.

 

이곳에서부터 옛길은 대광천과 나란히 달리는 917번 도로를 따라 1km쯤 가다가 찻길을 버리고 저진치, 지심곡, 평전, 한나무재, 넓재를 지나 울진군 서면 광회리에 닿는다.

 

옛길을 걷는다는 것은 문명에 감금된 육체의 권능을 회복하는 일이다. 옛 사람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 보는 일이다. 자연의 파동에 공명하는 일이다. 그리하여 이동수단으로서의 걷기가 아니라, 생태와 역사를 길동무시키고 우리 산천을 몸으로 읽는 일이다. 옛길을 새로운 길로 다시 열어가는 일이다.

 

산행길잡이

일행 중 한 명은 차량운행 맡아줘야

 

십이령 옛길 탐승시 가장 까다로운 문제는 교통편이다. 대중교통편이 불편하고, 자가용 차량을 가져가더라도 산행이 동에서 서로 고개를 넘어가서 끝나므로 일행 중 누군가 한 명은 차량운행만 맡아줘야 한다.

 

대중교통편을 이용할 경우, 무엇보다 소광리 계곡 중간의 후곡동에서 서울행 시외버스가 정차하는 서면 소재지 삼근리까지 나가는 오후 4시50분 버스를 놓치지 않도록 시간을 잘 맞추어야 한다. 그래야 삼근리를 오후 7시에 지나는 동서울행 막차를 탈 수 있다.


이 시간을 맞추려면 울진에서 오전 7시30분 발 두천리(상당리) 행 시내버스는 타야 할 것이다. 그래야 느긋한 산행이 가능하다. 단, 택시를 탈 작정을 하면 여유로운 시간 조절이 가능하다.

 

일행 중 한 사람이 운전만 하는 수고를 감수하기로 하고 자가용 차량으로 가면 산행이 한결 풍요로워진다. 산행 전후 구수곡 자연휴양림이나 통고산 자연휴양림을 찾아가 이용할 수 있고, 바닷가 드라이브도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교통

울진농협중앙회 앞 울진여객(054-783-4141) 종점에서 두천리나 그 전의 상당리, 하당리 가는 시내버스가 하루 6회(06:30, 07:30, 11:00, 13:20, 16:25, 18:20) 출발. 30분 소요. 울진에서 두천리 말래 마을까지 택시료 13,000원(전화 054-782-4444).

 

소광천 중간 후곡동 마을에서 동서울행 시외버스가 서는 서면 소재지 삼근리까지 가는 버스가 하루 2회(08:40, 16:50) 있다.

서면소재지 삼근리 버스정류장(054-782-9031)에서 동서울행 시외버스 정차시각 08:20, 10:30, 11:40, 15:20, 16:50, 19:00. 동서울까지 4시간30분 소요, 요금 20,400원.

 

숙박(지역번호 033)

말래 마을이나 안말래 마을에는 민박집이나 음식점이 없다. 그러므로 대중교통편을 이용할 경우는 울진에서 숙식을 해결한 뒤 다음날 아침 들어가야 한다.

 

상당 삼거리 북쪽 3km 지점의, 고개를 넘으면 바로 이르는 덕구온천장에 숙박시설이나 음식점이 많다. 덕구온천은 수질이 뛰어난 온천수로 이름 높다(덕구온천호텔 대중탕 054-782-0677).

 

덕구유황천원탕은 시설은 작지만 계란 썩은 냄새가 나는 진짜 유황물을 뽑아올려 사용하는, 울진군민들이 애용하는 온천장이다(054-783-6219).

 

구수곡 자연휴양림(054-783-2241)이나 통고산 자연휴양림(054-782-9007)의 숲속의집(산막)은 가을철엔 다소 여유가 있는 편이다. 캠핑장에서 야영을 해도 좋은 휴양림들이다.

 

소광천 안 후곡동에 하늘채펜션(054-782-9939)이 있다. 실평수가 4평과 6평인 방들을 갖추었으며, 1평당 10,000원. 소수 인원의 경우 된장찌개(5,000원) 등 매식이 가능하다.

 

울진의 조망 좋은 숙박업소들(지역번호 054) : 모텔아리아(782-4952), 굿모닝라이브하우스(782-3392), 강변민박(781-6611), 골장모텔(783-0848), 나곡비치타운(783-9999). 

 

맛집
죽변 횟집거리  울진 사람들이 가장 애용하는 곳으로 울진 북방 8km 지점. 부둣가 도로 따라 끝까지 들어간 지점에 횟집들이 모여 있다. 회도매시장 11호 횟집 전화 054-783-0693. 뉴태평양회센타 782-4936(조식 가능). 영광가든은 양념 숯불구이가 유명(782-8881).

 

드라이브 코스

불영계곡~울진~삼척 간 해안도로

불영계곡과 울진~삼척간 해안도로를 조합한 길은 일부러라도 찾아갈 만한 가을 최적의 드라이브코스다. 해안도로는 남에서 북으로 달려야 바닷가쪽 풍광을 제대로 볼 수 있으므로 불영계곡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다.

 

불영계곡은 두어 번 오가며 보아도 질리지 않을 만큼 경관이 수려하다. 산과 산 사이에 형성된 계곡임은 분명하되 도로에서 내려다뵈는 계곡은 간혹 아찔할 정도로 깊어서 흡사 빙하로 형성된 거대 유(U)자 협곡을 보는 듯 이국적이다. 붉은 기암절벽과 그 중턱에 선 노송들로 불영계곡 풍경은 전형을 이룬다.

 

불영계곡은 통고산 기슭에서 시작돼 울진읍 남쪽 망양정 앞에서 바다로 흘러든다. 이중 근남면 행곡리에서 서면 하원리까지 15km에 이르는 절경 구간은 1979년 명승 제6호로 지정됐다.

 

▲ (왼쪽)옥계휴게소에서 바라본 해안 풍경. 7번 국도와 영동선 철도, 동해고속도로가 함께 지나는 곳이다./(오른쪽)불영계곡 가로 다랑이논이 곱다. 자연에 깃들어 산 우리네 삶의 풍정이 담겨 있다.

 

의상대, 창옥벽, 조계등, 부처바위, 중바위, 거북돌 등의 명소가 많으나 안내팻말은 아직 제대로 세워두지 않았다. 또한 계곡가 전망대인 불영정과 선유정에서도 주위 수목이 크게 자라나 계곡 풍경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깊은 협곡을 이룬 불영계곡의 진면목을 보려면 불영계곡 중간에 자리잡은 비구니사찰 불영사(佛影寺)에 들러보도록 한다. 절에 이르는 진입로 변의 울창한 숲과 거목, 불영계곡 계류와 직립한 기암봉 풍치 등이 볼만하다.

 

깊은 협곡을 이룬 불영계곡을 내려볼 수 있는 곳이 도로변에 한 군데 있다. 불영사 주차장 진입로 입구에서 답운치쪽(봉화쪽) 약 1km 지점의 도로변이다. 승용차를 노변에 주차할 수 있다.

 

울진~삼척 간은 약 80km에 걸쳐 바다풍경이 끊이지 않는다. 해안 풍경이 길게 내려다뵈는 둔덕, 혹은 갯바위에 파도가 부딪쳐 부서지는 바닷가 바로 옆을 달리기도 한다. 조망 좋은 곳엔 작은 주차공간, 혹은 휴게소가 있어 잠깐씩 멈추어 풍경을 즐길 만하다.

 

울진읍내 동쪽을 곧게 가로지르는 신설 국도를 타고 북상하다가 죽변쪽으로 빠져야 바닷가 드라이브가 가능하다. 둔덕 조망처는 원덕을 지나며 연이어 나타난다. 삼척에 다다르면 정라진항으로 나가 새천년해안도로를 돌아본 뒤 영동고속도로로 향한다.

 

월간산 / 글 윤제학동화작가·현대불교신문 논설위원 | 사진 허재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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