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방방곡곡/경기도

안양 동안구-비산동 산림욕장 비봉산(망해암)

by 구석구석 2012. 3. 4.
728x90

 

비산동34-2 산마을우물가 031-388-8816

안양종합운동장 지나 비산동 관악산산림욕장 초입에 위치한다.  

 

도심속에서 시골마을의 정취를 만끽할 수 있는 곳이다. 흙벽집에 지붕을 덮은 건물은 크게 본채와 별채로 나뉘어져 있는데 본채에서는 돌솥밥 위주의 한정식 상차림을, 별채에서는 보리밥을 판매한다. 건물 내부는 호롱불을 켠 듯 다소 어두운 편인데 옛스러운 분위기의 작은 방들이 곳곳에 위치하며 마당 뒷편 정원에는 평상을 놓아 여름에도 시원하게 이용할 수 있다.

 

 간단하게 맛볼 수 있는 보리밥은 잘 지은 보리밥에 가지, 버섯, 도라지, 오이채, 취나물 등 15가지 재료와 모듬 야채가 곁들여진다. 된장찌개를 한술 떠서 갖은 나물에 비벼 야채쌈에 올려 맛을 보면 자연속으로 돌아간듯한 느낌이 들 정도. 해물 파전에 동동주 한 사발 곁들여도 좋겠다.

 

초가집이다보니 고풍스러운 멋보다는 향토적인 정감이 느껴진다. 상다리 휘어지는 한옥집 한정식보다 초가집 시골밥상이라 할 만하다. 주말 가족 나들이나 단체 이용에도 적합하다.

 

비산동 관악산산림욕장

관악산은 예로부터 개성의 송악산, 파주의 감악산, 포천의 운악산, 가평의 화악산과 더불어 경기 5악의하나로 소금강이라 불렀다. 연주암은 연주대 남쪽 400m지점에 자리하고 있는데, 신라 문무왕 17년(677)의상대사가 연주대 바로 밑에 창건한 관악사를 조선 태종 11년(1411) 둘째 왕장인 효령대군이 현재의 위치로 옮겨 왔다고 전해오고 있다.

 

관악산 산림욕장은 종합운동장 뒷편 충의대 입구에서 출발해 관양1동 간촌까지 5.6km가 조성되어 있으며,관양고 뒤 및 간촌마을에서도 접근할 수 있다. 10개의 숲과 만남의 광장, 약수터, 자연학습장등이 설치돼 있으며, 무엇보다 숲이 울창해 산림욕의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어 찾는 이들을 즐겁게 한다.

 

원불교 3.1절 망해암 산상기도 답사/경인교구청운회

728x90

비봉산 망해암

망해암은 원불교 경기인천교구의 산상기도터이며 안양8경중 제1경으로 산행과 더불어 안양시내를 조망하기에 더 없는 곳이다.

경성출장소 창립주중 한 사람인 김낙원교도가 열반하자 경성회원으로서는 최초 열반인이 되므로 소태산 대종사께서 신정예법에 의한 치상절차를 지도하기 위해 원기 15년 음6월 20일 상경하였다. 치상절차를 마친 소태산 대종사는 여자들만 살고 있는 경성출장소인 창신동회관의 울타리가 허술하여 동네아이들이 동산으로 무상 출입하고 도둑의 위험이 있어 걱정이었다.

 

이를 본 소태산 대종사께서는 8월 27일부터 노진허와 김영신을 대리고 직접 목재와 철주 및 소용물품을 구입하고 사람을 구해 바위에 구멍을 뜷고 목재로 기둥을 세워 찬자로 담을 만들어 인부들과 5일간의 공사를 미친 후 다음날인 8월13일 소창차 안양 망해암을 가기 위해 경성역에서 9시차로 출발하였다.

 

정황으로 보아 몇 일 동안 머무를 계획이었던 것으로 보이나 이튿날 창신동출장소로 돌아왔다.

 

망해암을 어떤 인연으로가 무슨 사정으로 다음날 돌아 왔는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망해암은 1922년 화재로 전소되어겨우 법당과 요사를 신출한 상태여서 일반인이 몇 일을 머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소태산 대종사는 망해암에서 돌아온 다음날 익산 본관으로 귀관하였다.

 

망해암은 경기도 안양 관악산에 있는 암자로 665년 원효대사가 창건하여 망해암이라 했다. 1922년 화재로 전소되어 소태산 대종사가 망해암을 찾은 원기15년(1930)에는 법당과 요사채만이 신축되어 암자가 어수선한 상태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암자는 한국전쟁으로 암자가소실되어 소태산 대종사께서 망해암을 찾았을 때의 모습을 현재로서는 상상할 수밖에 없다. 당시에 있었던 것으로는 용화전 안에 모셔진 미륵존불만이 있다. 망해암 중심건물인 용화전에 모신 석조 미륵불은 원효대사가 망해암을 창건하고 석조 미륵불을 조성하여 모셨다고 한다. 그러나 옷자락선, 균형감각, 의복의 차림등으로 볼때 고려 초 미륵불로 추정된다.

 

망해암에는 조선 세종 때의 설화가 전해진다.

 

조선 세종 때 삼남지방에서 한양까지 조세를 운반하는 여러 척의 배들이 곡물을 가득 싣고 인천 월미도 부근을 지나가다가 심한 풍랑으로 뒤집힐 지경에 이르렀다. 사공들이 당황한 채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뱃머리에 한 승려가 나타나서 사공들을 진정시키고 인도하여 무사히 위기를 넘겼다. 풍랑이 잠잠해진 뒤 한 사공이 승려가살고 있는 절이 어디인지를 묻자 '관악산 망해암에 있다'고 함란 뒤 홀연히 사라졌다. 사공들이 한양에 도착하여 은혜를 갚기 위해 망해암을 찾았으나 그와 같은 승려는 살지 앟고 용모가 아주 닮은 부천미이 법당 안에 봉안되어 있었다. 그들은 부처님의 자비신력으로 구원받았음을 깨닫고 나라에 상소를 올려 이 사실을 알렸다. 이를 가상히 여긴 세종은 매년 한 섬씩 공양미를 이 절의 불전에 올리도록 하였다. 이일이 있은 후 400년 동안 계속되었다.

 자료 : 경인교구 산상기도 안내문

 

원불교100년을 맞이하여 비봉산에서 3.1절 산상기도를 하기위해 대종사님이 걸으셨던 길을 따라 태극기와 일원상기를 들고 안양역에서 출발하여 도보순례하며 비봉산에 오르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