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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인천·섬

강화 부근리 봉천산 봉가지 창후리포구

by 구석구석 2007. 1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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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맛·섬 西海 매력을 한꺼번에 ' 창후리'

 

석양에 붉게 물든 호젓한 창후리 포구/주간동아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초겨울 바다는 언제 봐도 쓸쓸하다. 하지만 그 쓸쓸하고 고즈넉한 느낌이 오히려 마음을 편안하게 감싸준다. 또한 낭만적으로 다가온다. 그런 바다 분위기를 온전히 맛보고 싶다면 창후리 포구(인천광역시 강화군 하점면 창후리)는 어떨까. 한적한 초겨울 바다 정취는 물론 아름다운 낙조에 흠뻑 젖을 수 있다.

길만 막히지 않는다면 서울에서 1시간 정도면 닿는 강화도 끝자락에 위치해 당일치기로 다녀오기에도 그만이다. 1박2일로 여유 있게 일정을 잡으면 포구와 함께 코앞에 보이는 석모도, 교동도 등 섬 속의 섬도 돌아볼 수 있다. 여기에 뜨끈한 온천까지 즐길 수 있으니 금상첨화.

강화읍을 지나 48번 국도를 타고 창후리 포구로 가는 길목(하점면 부근리)에선 청동기시대의 대표적 유물인 고인돌을 만날 수 있다. 

  

부근리 고인돌

우리나라는 고인돌무덤의 나라라고 할 만큼 숫자 면에서 전 세계적으로 단연 으뜸이다. 강화도 고인돌무덤은 동부아세아 고인돌무덤의 흐름과 변화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유적이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2000.11.29)된 이 고인돌무덤은 이른바 북방식 지석묘라고 분류되는 우리나라의 대표적 고인돌무덤이다. 규모는 높이 2.6m, 개석의 길이 7.1m, 너비 5.2m로 남한 최대의 것이다. 이 지석묘의 재질은 주로 흑운모(화강암), 편마암으로 구성되어 있다. 덮개석의 무게는 약 8,000kg이나 된다. 특히 현재까지 조사된 북방식 지석묘의 분포로 보아 가장 남쪽에 위치하고 있어 학술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넓은 잔디밭 한복판엔 청동기시대 주거 형태인 움막집이 있고, 집을 중심으로 크고 작은 고인돌이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다. 이곳 고인돌은 2000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소중한 유물이다.

 

부근리 봉가지

 

하음 봉씨의 시조인 우가 태어났다는 전설을 지니고 있는 연못이다. 고려 예종 1년(1106) 봉천사 밑에 사는 한 노파가 연못가로 물을 길러 갔을 때 홀연히 하늘에 구름이 가득 끼고 우레같은 이상한 소리가 나더니 연못에 석함이 떠올라 이를 건져내 열어보니 옥동자가 들어있었다 한다. 이를 기이하게 여겨 왕에게 바치자 왕은 궁중에서 양육하고 봉우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한다. 봉우는 성장하여 인종 때 과거에 급제하여 위의소랑, 정당문학, 좌복야로 공을 세워 하음 백에 봉해져 이때부터 그 후손들이 이곳에 살며 본관을 하음으로 하여 봉씨 세계를 잇게 되었다는 것이다. 후손들이 세운 유적비가 있다. 이 연못은 흙으로 약 1m정도의 둑을 쌓고 시멘트로 곽을 짜 놓았으며 수면으로부터 높이는 약65cm이다.

 

강 건너 개성 땅 지척인 봉천산

봉천산은 반나절 산행하기 딱 알맞은 산이다. 세계문화유산인 부근리 고인돌과 봉가지, 오층석탑, 석조여래입상을 두루 돌아보고 나서 하점면사무소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가볍게 삼림욕을 겸한 원점회귀 산행을 즐길 수 있다. 문화유산답사를 겸하기 때문에 어린이를 동반한 가족 나들이에도 적합한 곳이다. 정상에 오르면 북쪽으로 예성강 하구와 조강 건너 북한 개풍군 땅이 한눈에 들어온다. 날씨 좋은 날이면 개성 송악산도 볼 수 있는데, 송악산까지 직선거리로 불과 20km밖에 안 되는 곳이 바로 봉천산이다.

 

이 산 꼭대기의 봉천정(奉天亭)에 오르면 괜히 눈이 시리고 가슴이 아파온다. 굳이 북에 가족을 두고 온 실향민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예성강 하구며 반세기 넘게 드나들 수 없는 북녘 산하를 굽어보노라면 왠지 슬프고 쓸쓸한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리라. 더구나 멀리 아스라하게 보이는 개성 송악에 이르기까지 올망졸망 솟은 둥글둥글한 봉우리들 모두 나무 한 그루 없는 황토색 민둥산임에야 한숨이 절로 나오고 마음이 더 없이 무거워지게 마련이다.

 

강화도 어느 산이나 그 꼭대기에 오르면 주변 바다와 더불어 멀리 북녘 땅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 곳이 없지만 그 중 민통선 남쪽에 있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으며 가장 북쪽에 솟아 있는 산이 바로 봉천산이다. 그래서 봉천산은 비록 해발 291m에 불과한 낮은 산임에도 ‘망향의 산’이라는 각별한 이름으로 전쟁 이후 이 산을 오르는 이들의 가슴에 새겨진 지 오래다.

 

 봉천대는 고려 후기에 평장사(平章事)로서 하음백(河陰伯)에 봉해진 봉천우(奉天佑)가 쌓았다는 설이 있다. 봉천우는 자신의 선조가 발상(發祥)한 은혜를 기념하고 그 덕을 기리기 위해 산 정상에 대를 만들어 봉천대(奉天臺)라 했다. 고려사 등의 기록에는 1234년(고종 21년) 강화로 피난 온 고종이 개성의 봉은사를 대신해 세운 이 절에 행차해 연등회를 했고, 참지정사(參知政事) 차척(車倜)의 집을 강화 봉은사에 귀속시켰으며, 민가를 철거해 왕이 행차하는 연로(輦路)를 넓혔다는 기록이 전한다. 인천시 기념물 18호인 봉천대는 고려 때에는 축리소(祝釐所)로 사용되었으며, 조선 인조(1633년) 때 이후 봉화대로 사용되었다. 봉은사가 언제 폐사되었는지는 전해지지 않는다.

 

역사적으로 보면 봉천산은 이름 그대로 ‘하늘 받드는 산’이며, 마니산 참성단보다 규모는 작지만 마찬가지로 돌로 쌓은 장방형의 ‘봉천대(奉天臺)’가 있다. 이는 산 아래 부근리 고인돌에서도 뚜렷이 보일 정도로 큰 규모여서 그 기원이 선사시대 거석문화와 관련돼 있으리라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더구나 남쪽 산자락에는 보물 10호로 지정된 고려시대 오층석탑이나 석조여래입상(보물 615호)이 있어 연중 끊이지 않는 답사객들의 발걸음이 이 산의 진가를 더하고 있다.

 

신비로운 봉가지 탄생 설화

원래 봉천대는 고려시대 하늘에 제를 올리던 제단으로서 ‘축리소(祝釐所)’였으며, 조선시대에는 봉수대가 있었다. ‘축리(祝釐)’란 부처님에게 향을 사르면서 복을 비는 행위인 ‘행향축리(行香祝釐)’에서 나온 말로, 축(祝)은 빈다는 뜻이고, 리(釐)는 복이란 의미로서 축리는 복이나 소원을 비는 행위를 일컫는다. 특히 고려시대에는 불교가 번성해 일반 백성이나 임금들이 복을 빌 경우 절에서 ‘행향축리’하는 경우가 많았다. 정월 초하루나 보름에 국가의 안녕이나 왕실의 번성 또는 특정 임금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행향축리’는 원나라의 예법이었다고 전하는데 실제로 고려사에 보면 충렬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묘련사에 가서 원나라 황제를 위해 복을 빌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봉천대에 관해서는 부근리 봉가지(奉哥池), 석조여래입상과 더불어 하음 봉씨의 시조인 봉우와 그 5대손 봉천우에 관한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고려 예종 2년(1107년) 지금의 하점면 부근리 마을에 사는 한 노파가 연못가로 물을 길러 갔을 때 홀연히 하늘에 구름이 끼고 우레 같은 이상한 소리가 나더니 수면에 석함이 떠올라 이를 건져내서 뚜껑을 열었다. 놀랍게도 석함 안에는 아기가 있었고, 할머니는 너무나 이상한 일이라 임금께 아기를 보내게 되었다. 세 살 때 글을 읽을 정도로 총명했던 이 아이가 바로 봉우(奉佑)였다. 봉우는 인종 때 등과했으며, 공을 많이 세워 하음백에 봉해져 하음 봉씨의 세계가 시작된 것이다. 이후 할머니의 보살핌에 감사해 5대손 봉천우가 봉은사를 지어 보답했다고도 전한다.

 

 

 

하점면 봉천산 아래에 위치한 고려시대의 석조여래입상 은 보물 615호다. 두꺼운 화강암 판석에 돋을새김으로 조성한 불상인데, 현재 돌담으로 둘러싸인 전각을 만들어 그 안에 모시고 있다.

 

고려의 탑이 여기 있다

 

강화에서 부근리 고인돌에 들렀다가 봉천산을 찾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남서쪽 하점면사무소에서 정상에 올랐다가 다시 내려간다. 따라서 서쪽 산자락에 있는 오층석탑이나 석조여래입상을 찾아가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일부러 다리품을 팔아서 가 보면 그만큼 얻는 것도 있다. 사철 푸르게 우거진 세죽(細竹) 숲을 뒤에 두고 약간 삐딱하게 서 있는 오층석탑은 그냥 평범한 석탑일 뿐이다.

 

인터넷을 뒤져 보면 다 나오는 문화재 설명문 정도쯤이야 하는 마음으로 안내문을 주의 깊게 읽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다 보면 일부 탑재를 잃고 지붕돌이 겹쳐진 채 불완전하게 남아 있는 이 석탑이 ‘보물 10호’라는 게 의아할 뿐이다. 그러나 이 탑이 남한 땅에서는 찾아보기 드문 고려시대 유물이며, 그것도 개성 봉은사지에서 옮겨다 놓은 것이라면 보는 눈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개성 봉은사라면 광종 2년(951년)에 창건된 이래 태조 왕건의 진영을 봉안한 원찰로 고려 최고의 절 이른바 국찰(國刹)이다. 고종 19년(1232년) 몽골의 침입을 피해서 강화로 천도하면서 봉천산 일대에 개성에 있는 절과 똑같은 이름의 봉은사를 세웠다는 기록이 전하는데, 총탄 자국도 선명한 몸돌에 비뚤게 서 있는 오층석탑이 그 유력한 증거다.

 

하점면사무소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소나무 울창한 삼림욕장 길을 걷다보면 기분이 절로 상쾌해진다. 어울리지 않는 가로등을 산책로 끝까지 심어 놓아서 거치적거리는 걸 빼고는 소년처럼 싱싱한 소나무들과 호흡을 함께 하다 보면 어느덧 몸과 마음은 날아갈 듯 가볍고, 중턱 샘터에 이른다. 키 크고 묵은 나무가 많은 숲길은 그 깊고 어두운 그늘 덕분에 사색에 잠겨서 걸을 수 있는 반면, 젊은 나무로 이루어진 숲길은 간간이 비껴드는 햇살을 즐기면서 흡사 실내악을 듣는 것과도 같은 가벼운 마음으로 걸을 수 있어서 좋다. 그리 길지는 않지만 봉천산 오르는 길이 바로 그런 즐거움을 선사하는 소나무 숲길이다.

 

제대로 된 샘터와 쉼터까지 있으니 봉천산은 비록 그 높이가 낮을 뿐이지 갖출 건 다 갖춘 산인 게 분명하다. 사철 마르지 않고 흐르는 봉천산 샘물은 그 물맛이 혈구산 동쪽 끝자락 ‘찬우물’, 고려궁지 옆의 ‘왕자우물’, 마니산 정수사의 ‘용우물’, 강화산성 북문 고개 아래 ‘오읍약수’와 같은 강화 명수(名水)에 비해서 조금도 손색이 없다. 대체로 물이 귀한 게 섬 사정인 데 비해 강화는 이렇게 좋은 물이 풍부한 걸 보면 예로부터 문화와 산업이 발전했으며, 연개소문과 같은 뛰어난 인물이 배출된 것도 다 까닭이 있었던 셈이다.

 

샘터를 지나 능선 길로 접어들면 길은 뜻밖에도 가팔라지고 화강암 벼랑까지 펼쳐진다. 게으른 소처럼 길게 드러누운 형국의 봉천산을 절대 얕잡아 볼 수 없는 것은 이 산 구석구석, 오밀조밀하게 갖추고 있는 나름대로의 얕은 매력과 눈 맞추는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말끔한 화강암 바윗길에 올라서 남쪽으로 고려산이며 혈구산, 연개소문이 태어나서 자란 곳이라는 시루메봉 일대, 서쪽으로 별립산과 멀리 석모도 삼산과 교동도 화개산을 둘러보는 조망의 즐거움이란 결코 높은 산에 오르는 게 능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함으로써 봉천산을 다시 찾게 만드는 행복에 다름아니다.

 

한적한 초겨울 바다 정취 흠뻑

부근리에서 10분 정도 더 들어가면 창후리 포구다. 여느 바다와 달리 물이 빠진 거무스름한 갯벌 곳곳에 발목 잡힌 배들이 독특한 풍경을 자아낸다. 그 사이로 섬세한 발자국을 남기며 총총걸음으로 갯벌을 누비는 갈매기들 모습도 별나다.

이곳은 해 질 무렵, 갯벌 너머의 찰랑이는 바다 밑으로 서서히 빠져드는 붉은 해의 모습이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로 아름답다. 포구 앞에 떠 있는 석모도와 교동도도 발그스름한 숫처녀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포구 주변은 붉은 해가 넘어간 뒤에도 한동안 발갛게 물들어 있어 긴 여운을 남긴다.

포구 위 야트막한 언덕에는 무태돈대가 자리하고 있다. 1679년(숙종 5)에 축조된 것으로 강화도 방어진지 구실을 하던 곳이다. 사면이 반듯한 돌벽으로 싸인 돈대 안으로 들어서면 축구장만한 공간에 듬성듬성 잔디가 심어져 있다. 돈대 위에 오르면 창후리 선착장과 함께 교동도를 오가는 배, 인근 섬들의 정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창후리 황복마을’이란 큼지막한 입간판이 서 있는 이곳은 황복 산지이기도 하다. 특유의 쫄깃한 맛으로 미식가들의 발길을 잡아당기는 황복철(매년 5~10월)이 지나 아쉽긴 하지만 이즈음에는 숭어와 생새우, 밴댕이회를 맛볼 수 있다. 선착장 옆에는 어부들이 운영하는 횟집들이 많아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싱싱한 회를 맛볼 수 있다. 직접 담근 각종 젓갈도 판매한다. 강화 밴댕이젓은 2만원(2kg), 새우젓은 2만~3만원(새우가 굵을수록 값이 더 나간다) 정도면 살 수 있다.

 

 

각종 어패류와 젓갈을 판매하는 자그마한 어시장(왼쪽).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된 강화 고인돌·움집 등을 볼 수 있는 하점면 고인돌공원.

창후리 포구여행의 또 다른 즐거움은 이색 온천 맛을 볼 수 있다는 점. 포구 옆에 자리한 ‘마라칼슘탕’이 바로 그곳이다. 외관은 동네 목욕탕과 별반 차이가 없지만 온천의 특성과 내부는 아주 독특해 이 지역의 명물로 유명하다.

마라(MARAH)는 히브리어로 ‘쓴 물이 있는 곳’이란 뜻. 그 이름에 걸맞게 이곳 물은 바닷물이 유입된 ‘짠물’이 아닌 다량의 칼슘 성분이 녹아 있는 광천수로 물맛이 쓴 것이 특징이다. 각종 미네랄 성분과 천연 알칼리성이 함유되어 아토피성 피부염에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이곳은 대형 욕조가 아닌 가족탕 중심으로 운영된다. 칸막이로 분리된 1평 남짓한 공간마다 아담한 통나무 욕조가 마련되어 있어 가족끼리 오붓하게 온천욕을 즐길 수 있다. 각 욕조는 바닷가 쪽으로 창이 나 있어 해 질 무렵 노을도 감상할 수 있다. 온천욕을 하려면 접수를 한 뒤 20분 정도 기다려야 한다. 온천 이용객을 위해 새로운 온천물을 준비하기 때문. 비누나 샴푸, 각종 목욕세제 등을 일절 사용하지 않는 것은 이곳만의 특징이다. 가족탕 이용료 1만5000원. 오전 7시30분~오후 8시(오후 7시까지 입장). 032-933-4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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