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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거 저런거/주변이야기

산상기도와 원불교 평화행동

by 구석구석 2023. 3.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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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로 3.1절 산상기도를 수년간 교당 자체적으로 시행하였으나 올해는 망해암에서 교구행사를 하게 되었네요. 

예년처럼 비봉산 망해암에서 10시30분에 기도를 올렸는데 일부 교도들은 안양역에서 도보로

대종사님께서 걸으셨을 그 길을 따라 1시간 정도 걸어서 올라갔습니다.

 

역대 산상기도 중에 날이 제일 좋았어요. 

집에서 나올 때는 조끼를 입을까 어쩔까 고민하다가 그냥 나왔는데 

날이 너무 좋아서 걷는 내내 땀이 났네요. 

안양역에서 기념촬영후 도보순례

산상기도는 원불교 초기 3.1운동과도 연관이 있고 청운회 주관으로 개최되었으나

교단 백년성업을 기해서 재가 4개단체가 주관이 되어 진행하고 있는 전국적인 행사입니다. 

안양역에서 함께 한 인천교당 교도들

1919년 대종사님께서는 삼일운동이 일어났다는 말씀을 들으시고

《개벽을 재촉하는 상두소리다. 하시고 어서 서둘러서 방언공사를 마치고 천지신명께 기도 올리자》

하신 말씀을 받들어서 원기 85(2000)년 3월 1일에 서울청운회원들이 칠갑산에서 산상기도의 첫발을 내딛었고

원기 86년(2001년)에 중앙청운회 차원으로 격상시켜 전국적인 기도운동으로 확산시켜 나가기로 결의하였고

원기 87년(2002)년 3월 1일에는 경남 거창군 실내 체육관에서 해원,상생, 평화-통일을 위한 기도식을

좌산종법사님을 모시고 출.재가 교도가 함께 거룩하게 기도를 진행하였습니다.

이후 각 교구에서 산상기도를 진행하던 중

원기91년 4월부터 100년 성업기도가 시작되어 10년간 성업기도 일원으로 산상기도를 진행하였으며

처음에는 청운회 단독으로 진행하다가 백년성업기도부터 4개단체가 함께진행하고 있으며

앞으로는 일과 기도를 구분하지 않는 선진님들의 순교의 정신으로 3.1절 산상기도를 계승발전하여

교단기도문화로 정착함을 다짐하였습니다.

3.1산상기도에 올려진 기도금은 중앙청운회를 통하여 군종교구에 후원금으로 전달합니다.

군종교구를 통해 전국 교구의 군종교당에서 군장병들에게 대종사님의 교법을 전하는 소중한 법공양비로 쓰여지며

코로나로 기도가 취소되었어도 군교화 취지에 부합되게 각 교구에서 지원을 이어 왔습니다.

안산교당 교도들

우리 경인교구는 원불교 백주년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안양역에서 망해암까지 1시간 정도 도보순례를 사전행사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경인교구의 3.1절 산상기도터인 망해암은 안양8경중 제1경으로

산행과 더불어 안양시내를 조망하기에 더 없는 곳으로 대종사님의 발자취가 서린 곳입니다.

산상기도 식전행사

경성출장소 창립주중 한 사람인 김낙원교도가 열반하자 경성회원으로서는 최초 열반인이 되므로 소태산 대종사께서 신정예법에 의한 치상절차를 지도하기 위해 원기 15년 음6월 20일 상경하였다. 치상절차를 마친 소태산 대종사는 여자들만 살고 있는 경성출장소인 창신동회관의 울타리가 허술하여 동네아이들이 동산으로 무상 출입하고 도둑의 위험이 있어 걱정이었다.

 

이를 본 소태산 대종사께서는 8월 27일부터 노진허와 김영신을 대리고 직접 목재와 철주 및 소용물품을 구입하고 사람을 구해 바위에 구멍을 뜷고 목재로 기둥을 세워 찬자로 담을 만들어 인부들과 5일간의 공사를 미친 후 다음날인 8월13일 소창차 안양 망해암을 가기 위해 경성역에서 9시차로 출발하였다.

 

정황으로 보아 몇 일 동안 머무를 계획이었던 것으로 보이나 이튿날 창신동출장소로 돌아왔다.

안내부스의 봉공회원

망해암을 어떤 인연으로가 무슨 사정으로 다음날 돌아 왔는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망해암은 1922년 화재로 전소되어 겨우 법당과 요사를 신출한 상태여서

일반인이 몇 일을 머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소태산 대종사는 망해암에서 돌아온 다음날 익산 본관으로 귀관하였다.

망해암은 경기도 안양 관악산에 있는 암자로 665년 원효대사가 창건하여 망해암이라 했다.

1922년 화재로 전소되어 소태산 대종사가 망해암을 찾은 원기15년(1930)에는

법당과 요사채만이 신축되어 암자가 어수선한 상태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올해도 원불교 평화행동기를 걸어 놨어요

암자는 한국전쟁으로 암자가 소실되어 소태산 대종사께서 망해암을 찾았을 때의 모습을 현재로서는 상상할 수밖에 없다.

당시에 있었던 것으로는 용화전 안에 모셔진 미륵존불만이 있다.

망해암 중심건물인 용화전에 모신 석조 미륵불은 원효대사가 망해암을 창건하고 석조 미륵불을 조성하여 모셨다고 한다.

그러나 옷자락선, 균형감각, 의복의 차림등으로 볼때 고려 초 미륵불로 추정된다.

경인교구 교무님들

망해암에는 조선 세종 때의 설화가 전해진다.

 

조선 세종 때 삼남지방에서 한양까지 조세를 운반하는 여러 척의 배들이 곡물을 가득 싣고

인천 월미도 부근을 지나가다가 심한 풍랑으로 뒤집힐 지경에 이르렀다.

사공들이 당황한 채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뱃머리에 한 승려가 나타나서

사공들을 진정시키고 인도하여 무사히 위기를 넘겼다.

 

풍랑이 잠잠해진 뒤 한 사공이 승려가 살고 있는 절이 어디인지를 묻자

'관악산 망해암에 있다'고 함란 뒤 홀연히 사라졌다.

사공들이 한양에 도착하여 은혜를 갚기 위해 망해암을 찾았으나

그와 같은 승려는 살지 앟고 용모가 아주 닮은 부처님이 법당 안에 봉안되어 있었다.

그들은 부처님의 자비신력으로 구원받았음을 깨닫고 나라에 상소를 올려 이 사실을 알렸다.

이를 가상히 여긴 세종은 매년 한 섬씩 공양미를 이 절의 불전에 올리도록 하였다.

이일이 있은 후 400년 동안 계속되었다.

올해는 도보행진은 안하기로 했었는데 망해암 정상에 주차공간이 협소하여 

차량 분산 차원에서 시행을 했으며 제가 인솔책임을 맡아 

원평화 깃발을 따라 안양역에서 26명이 출발하였으나 중간에 많은 분들이 합류하여 50여명이 함께 했습니다. 

예년에는 날이 추워서 땀이 날 정도는 아니고 몸이 달궈지는 정도였으나

올해는 기온이 높아 이마에서도 땀이 흘렀고 바람도 적당히 불어서 정말 좋은 날이었어요. 

 

처음 도보행진을 하며 인천지구의 교도모임이었던 도원도반기를 들었으나 

성주성지의 사드배치로 원불교 평화행동이 조직된 이후에는  

원평화 깃발을 들고 도보순례를 하고 기도터에 세워 놓아 원평화를 알리고 있습니다.

 

원평화를 불온세력으로 인식하는 재가 출가들이 많이 있으나

원평화는 교법을 사회에 구현하고 정산종사님의 평화사상을 계승하고 알리는 역할을 합니다.

또한 원불교에서 사회활동을 하는 단체로 구성된 원불교시민사회네트워크에 가입되어

원불교를 세상에 알리기 위해 적극적인 현장활동을 하는 단체입니다.  

인천교당 박영도교도

올해 인천교당에서는 19명이 함께 했는데

오전 8시30분에 안양역에서 윤창헌, 조길제, 최정수, 강은비, 오정심교도가 망해암으로 도보행진을 했으며

교당에서 무타원님을 비롯하여 종화교무님 박순정, 박인광, 김성오, 고정선, 안수연교도님이

논현지역에서 박영도, 강도민, 김덕훈, 이정화, 노진원교도님이

연수지역에서는 현산회장님과 정순명교도님이 함께 해주셨습니다.

오타원님

이번 행사에 봉산 김대봉, 진산 박인광, 중타원 이경희교도님께서 후원해 주시어

안양천변의 시골밥상에서 동태찌개를 점심공양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코로나로 몇년간 안 온 사이에 식당주변이 아파트단지로 변해서 주차공간이 애먹었는데 

내년에는 주차장이 확보된 음식점을 예약해야겠어요. 

내빈석 뒷편에 자리한 인천교당 교도들

 

경인교구 교의회의장 축사
부천교당 교도와 현산 김성권회장님
실타원 경인교구장님
안양시내 조망
산상기도에 함께 한 인천교당 무타원교감님과 교도
안양역에서 도보행진하는 교도들
부천교당 교무님과 교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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