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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인천·섬

강화도 나들길 9개코스

by 구석구석 2011. 8.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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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나들길

 

강화나들길은 테마에 따라 총 9개 코스로 나뉘어 있다. 제1코스인 심도역사문화길은 강화버스터미널~갑곶돈대 18km 코스로 6시간 정도 걸린다. 대중교통을 이용할 경우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시작한다. 답사 방향은 강화우체국 사거리→동문→ 성공회 강화성당→용흥궁→고려궁지→북관제묘→강화향교→성곽길→북문→북장대→오읍약수→대월초교→숲길→연미정→월곶돈대→옥계방죽→갑곶돈대로 이어진다.

단 7, 8월 한여름에는 고려궁지에서 북문으로 곧장 이어지는 숲길을 따르고, 숲이 거의 없는 연미정~갑곶돈대 구간은 생략하는 게 바람직하다. 약 4시간.

이밖에 제2코스 호국돈대길은 갑곶돈대~초지진 17km 5시간50분, 제3코스 능묘가는길은 온수공영주차장~가릉 16.2km 5시간30분, 제4코스 해가 지는 마을길은 가릉~망양돈대 11.5km 3시간30분, 제5코스 고비고개길은 강화버스터미널~ 외포여객터미널 20.2km 6시간40분, 제6코스 화남생가 가는길은 18.8km 6시간, 제7코스 갯벌보러 가는길은 화도공용주차장~갯벌센터~화도공영주차장 20.8km 6시간40분, 제7-1코스 동막해변 가는길은 화도공영주차장~분오리돈대 23.5km 7시간30분, 제8코스 철새보러 가는 은 초지진~분오리돈대 17.2km 5시간40분 걸린다.

강화대교 부근, 시외버스터미널 등지에 위치한 관광안내소에서 여권과 비슷하게 생긴 ‘도보여권’을 무료로 나눠주며, 구간이 끝나는 지점에 있는 관광안내소나 식당·매점에서 완주도장을 찍어준다. 도보여권에는 강화 전도, 코스별 개념도, 여행포인트, 강화버스노선 등이 적혀 있다. 터미널관광안내소 032-930-3515, 강화나들길 홈페이지(www.trekking.go.kr) 참조.

 

 

강화도는 노천박물관이자 우리 역사의 축소판이다. 덮개바위 무게만 해도 80톤에 이르는 강화지석묘(사적 제137호)를 비롯해 섬 곳곳에 있는 지석묘는 선사시대의 유물이다.

섬 내 최고봉 마니산(摩尼山·469.4m)은 단군 왕검이 하늘에 제를 지내기 위해 참성단을 세운 곳이고, 전등사(傳燈寺)는 단군이 세 아들(三郞)들을 시켜 쌓았다는 전설 같은 얘기가 전하는 토성 위에 고구려 소수림왕 11년(381) 세워진 고찰이다.

또한 읍내 송악 기슭에 자리잡은 고려궁지는 몽골의 침입으로 천도한 고려 고종과 원종이 도합 39년간이나 숨죽인 채 지냈던 곳이다. 해안에 구축되어 있는 5진(鎭) 7보(堡) 53돈대(墩臺)는 조선 때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만든 요새이자 망대였다. 그러나 월곶돈대 위의 연미정은 인조 5년(1627) 정묘호란 때 강화조약이 체결되면서 씁쓸한 역사의 현장이 되고 말았다.

강화나들길은 이러한 우리의 오랜 역사를 간직한 유적지와 산과 벌판, 산골마을과 갯마을, 그리고 갯벌과 철새 서식지를 잇는 역사문화자연 도보여행길이다. ‘나들’이란 서해 바닷물이 ‘나고 드는 것’처럼 많은 이들이 이 길 따라 나들이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강화나들길 첫 걸음은 읍내 강화우체국 사거리 북쪽 길을 따라 고개를 넘어서면 모습을 드러내는 망한루(望漢樓)에서 시작한다. 망한루는 고려가 몽골의 제2차 침입에 대비해 1232년(고종 19년) 고려궁지를 중심으로 둘러싼 강화산성의 동문이다.

 

동문을 빠져나와 강화나들길을 가리키는 작은 팻말과 전봇대에 매달린 꼬리표를 따라 고샅길을 따르노라면 타임머신 타고 1970년대 이전으로 돌아간 듯하다. 간판이 허옇게 바래고 낡은 수건이 창문에 걸린 이발소에서 허리 구부정한 노인이 포마드 기운에 반짝거리는 머리카락을 손으로 쓰다듬으면서 나오는가 하면 후미진 골목 안에는 자칭 ‘정통만두’라는 간판을 내건 음식점도 모습을 드러낸다.

허름한 중화요리집 건너편 한옥이 예사롭지 않아 안으로 들어섰다. ‘강화도령’이라 불렸던 조선 철종(1849-1863)이 왕위에 오르기 전 거처했던 잠저(潛邸) 자리에 세워진 용흥궁(龍興宮·인천 유형문화재 제20호)이다. 철종이 왕위에 즉위하자 강화 유수가 초가집을 허물고 기와집을 세운 뒤 ‘용이 승천한 궁’이라는 의미에서 ‘용흥궁’이라 이름지었다 한다. 매주 목요일 아침이면 다도 교육이 열리는 등, 전통다도예절관(문의 한국명선차인회 010-3317-4177)으로 이용되고 있는 용흥궁은 연잎 떠 있는 수반, 장독, 우물 등 마당 곳곳에 널려 있는 것들이 어릴 적 집 마당을 떠올리게 해 정겹기 그지없다.

뒤란으로 이어지는 계단길 따라 담 밖으로 나서자 또 다른 한옥이 반긴다. 고요한(Charles John Corfe) 성공회 초대 주교가 1900년 세웠다는 강화성당이다. 이름은 성당이지만 ‘聖公會江華聖堂’이란 현판이 걸린 문을 들어서자마자 나타나는 범종각이며 본당인 천주성전(天主聖殿)의 겉모습은 영락없는 우리 전통양식이다. 유리창을 통해 고대 로마의 바실리카 건축양식으로 지어졌다는 본당 안을 들여다본다. 초 칠이라도 한듯 반들반들한 마룻바닥과 그 위에 놓인 작은 의자들은 초등학교 교실을 연상케 한다.

▲ (위 부터) 망한루라 불리는 강화산성 동문. / 우리 전통양식으로 지어진 성공회강화성당 천주성전. / 고려궁지 안에 지어진 외규장각. 병인양요 때 불타버린 것을 복원한 건물이다.

 

용흥궁공원을 가로질러 고려궁지로 올라선다. 읍내뿐 아니라 주변 산봉들이 한눈에 드는 언덕배기에 올라앉은 고려궁지는 번듯한 한옥 건물이 잘 배치돼 있지만 우리의 서글픈 역사가 남아 있는 곳이다.

고려궁지는 1270년(원종 11년) 환도될 때까지 39년간이나 사용되다가 강화조약 조건으로 허물어졌다. 이후 조선 인조 9년(1631) 행궁과 더불어 장녕전(長寧殿)을 지어 태조와 세조의 영정을 모시고, 외규장각을 지어 나라의 장서와 문서를 보관했으나 그로부터 235년이 지난 1866년(고종 3) 대원군의 천주교도 학살·탄압을 빌미삼은 프랑스함대가 강화도에 침범한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많은 책과 서류를 약탈해가고 건물을 불살라 버린 비운의 현장이다. 최근 어렵게, 그것도 ‘5년 단위 임대’로 반환된 외규장각의궤 역시 그 때 약탈됐던 것이다.

현재 남아 있는 조선시대 건물인 승평문과 강화유수부동헌, 이방청, 종각 등을 둘러본 뒤 고려궁지를 벗어나자 발길이 절로 숲길로 향한다. 북문으로 이어지는 길은 아스팔트가 깔려 있지만 분위기는 호젓한 벚나무 숲길이다. 길 아래로 향교 건물도 보이고 북문으로 이어지는 숲 우거진 능선도 바라보인다. 제1코스 구간이다. 하지만 벚나무 숲을 파고드는 바람이 워낙 시원해 발길 돌릴 생각은 전혀 나지 않는다.

‘鎭松樓(진송루)’ 현판이 걸린 아치형 북문을 들어서면 울창하고 호젓한 산길. 이곳에서 오읍약수까지는 강화에서 손꼽힐 만큼 뛰어난 숲길이다. 오읍약수로 내려서기 전 오른쪽 길을 따라 북장대터에 올라본다. 무더위를 느낄 겨를조차 주지 않는 소나숲길 따라 성곽 위로 올라서자 북장대터가 바로 옆이다.

포크레인이 올라와 공사하는 모습이 생뚱맞다 싶지만 조망은 대단하다. 숲 사이로 한강 하구와 임진강 하구가 바라보이고 강 건너로 북한 땅 개풍군도 바로 앞이다. 북쪽 둔덕에 올라 강화읍내도 내려다보고 강화와 김포를 가르는 해협인 염하와 건너편의 김포도 바라본 뒤 오읍약수터로 내려선다.

▲ 아낙네들의 두런거리는 소리와 빨래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한 송학골 빨래터.

양봉원 옆에 반듯하게 자리잡은 오읍약수는 가뭄에 시달린 주민들이 산신령께 기도드리자 하늘에서 내리친 번개에 맞아 깨진 바위틈에서 시원한 물이 퀄퀄 솟구쳤다는 샘이다. 오읍약수는 몽골군을 피해 강화로 건너온 이들의 향수를 달래는 곳이다. 당시 그들의 마음이 얼마나 애절했던지 하늘이 울고, 땅이 울고, 신(神)이 울고, 임금이 울고, 그리고 강화 백성 모두가 울었다 하여 ‘다섯 오(五)’에 ‘울 읍(泣)’ 자를 써서 오읍약수라 불렀다 한다.

 


오읍약수 시원한 물이 불볕더위에 달아오른 속을 가라앉혀 준다면 그 아래 숲길은 땡볕에 뜨거워진 몸을 식혀준다. 맹꽁이가 뒤뚱거리며 여기저기로 뛰어다니고 놀란 꿩이 푸드득대는 숲길을 빠져나갈 즈음 모습을 드러낸 송학골 빨래터는 방망이로 빨래 두드리며 두런거리는 아낙들을 연상케 해 입가에 미소짓게 한다. ‘우리 순이는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빨래터를 내려서면 잠시 콘크리트 동넷길(오읍약수터 0.88km·대월초교 0.4km)에 이어 아스팔트도로를 따른다. 길가의 촌로는 감자 캐느라 길손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는 게 서운하지만 대월초등학교가 눈에 들어오자 어린 시절 운동장에서 뛰놀던 친구들 얼굴이 떠오르며 입가에 미소가 돈다.

 

▲ 숲 그늘 드리워진 월곶돈대를 걷는 나들이객들. 해안에 구축된 돈대들은 조선 때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만든 요새이자 망대였다. 이제 월곶돈대는 북녘땅을 조망하는 명소로 탈바꿈했다.

 

“운동장 식수대 물이 300m 땅속에서 끌어올리는 좋은 물”이라는 도우미 할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물 한 모금 마신 뒤 운동장 뒤편 숲길로 들어선다. 심도역사문화길은 잠시 숲길로 이어지다가 산골 마을로 내려서고 도로 아래 터널을 빠져나간 뒤 콘크리트길 따라 100m 가면 또다시 왼쪽 산등성이로 올라붙는다. 이후 울창한 숲길이 30분쯤 이어지다 다시 월곶리 마을로 내려선다.

마을 끝에 왕릉처럼 솟아오른 곳이 월곶돈대(月串墩臺)요, 그 위에 올라앉은 정자가 연미정(燕尾亭)이다. 농가 텃밭에 고추가 주렁주렁 매달리고 담장 옆 나무마다 복숭아가 여물어 가는 마을을 가로질러 연미정에 올라선다. 월곶돈대는 조선 숙종 5년(1679) 강화에 53개 돈대가 지어질 때 축조되었고, 연미정은 고려 고종(1213-1259) 때 사립교육기관인 구재(九齋)의 학생들이 공부했다는 기록이 전하는 것을 보면 연미정의 연조가 훨씬 앞선다.

연미정이란 정자 아래로 한강과 임진강 물이 합쳐졌다가 한 줄기가 서해로 흘러들고 또 한 줄기가 김포와 강화를 가르는 해협인 염하(鹽河)로 흘러드는 모습이 마치 제비꼬리와 같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인조 5년(1627) 정묘호란 때에는 강화조약을 체결했던 비운의 역사 현장이기도 하지만, 정자 아래서 옛날 서해에서 한양으로 가려는 배들이 만조가 되기를 기다렸다가 한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하니 뱃사람들에게는 사랑방 같은 곳이었을 게다.

 

 

▲ 500년 역사를 지켜보며 살아온 느티나무가 연미정을 향해 멋들어지게 나뭇가지를 늘어뜨리고 있다.

500년생 느티나무 두 그루가 지붕 위로 멋들어지게 가지를 늘어뜨린 연미정에 올라서자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불현듯 고려 때 구재의 학생들도 연상되고 조선 때 돈대를 지키던 병사들도 떠올랐다. 돈대 가까이 다가가 김포 쪽을 바라보자 강을 건너려 하는 몽골군과 후금군의 오만 방자한 모습도 떠오르면서 한강 하구 건너로 개풍땅이 바라보였다. 먹장구름이 바다에 닿을 듯 더욱 내려앉고 바람 또한 더욱 강하게 불어댔다. 그 바람 타고 백로 한 마리가 북에서 날아왔다. 갑자기 가슴이 울컥해졌다.

월간산 2011.8 한필석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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