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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경상북도

경주 부지리 중심마을 경덕왕릉

by 구석구석 2008. 3.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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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지리 중심마을로 들어가면서 왼쪽으로 초등학교가 보이고 오른쪽으로 경덕왕릉 안내 표지판이 있다. 여기서부터 경덕왕릉 입구까지는 농로이다.

 

경덕왕릉은 멀리서 봐도 왕릉임을 알 수 있다. 소나무가 울창하고 가는 길이 비교적 잘 정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주차장에서 왕릉으로 올라가는 길도 양 옆으로 소나무가 도열하고 있어 행사장에 들어가는 느낌이다. 왕릉 앞에서 도착해 보니 봉분과 둘레석 그리고 난간석이 제대로 갖춰져 있다. 그러나 흥덕왕릉에서 본 것처럼 문인석과 무인석, 촛대석, 비석 등의 석물은 볼 수가 없다.

 

 

경덕왕릉

이들 12지신상은 왕릉을 보호한다는 상징적인 의미도 있고, 동서남북의 방위를 나타내기도 한다. 다른 능들과 마찬가지로 남쪽 앞에 말(午)이 있고 북쪽 뒤에 쥐(子)가 있다. 이곳 역시 해가 잘 드는 동서남의 동물 조각은 잘 보이는데 비해, 북쪽의 조각은 그림자가 지고 이끼가 끼어서인지 덜 보인다. 그럼에도 이곳 경덕왕릉은 12지신상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중요한 왕릉이다.

 

그리고 둘레석 밖으로는 난간석을 설치해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방지했다. 난간석의 경우 세로 석주는 잘 보존되어 있는데 비해 가로 석주는 훼손되어 새로운 것으로 갖다 맞췄다. 그래서인지 색깔이 조금 다르다. 이곳에서도 역시 이처럼 새로 해놓아야 하는지 아니면 그대로 두어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해본다.

왕릉 앞에는 상석이 있는데 완벽한 형태로 1200여 년의 세월을 견뎌왔다. 상석에 새겨진 꽃모양의 조각 역시 단순하면서도 아름답다. 

 

 

경덕왕은 신라의 역사에 가장 많이 언급되는 왕이다. 그것은 우리가 지금 사용하는 지명의 대부분이 경덕왕 대에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742년에 왕위에 오른 경덕왕은 국가의 제도를 중국식으로 개편하고 지방제도를 정비한다. 즉위 16년인 757년 전국을 9주5소경으로 정비하여 새로운 이름을 부여했고, 그 밑에 군과 현을 두었다. 이때 만들어진 9주가 상주(현 상주: 사벌주), 양주(현 양산: 삽량주), 강주(현 진주: 청주), 한주(현 광주: 한산주), 삭주(현 춘천: 수약주), 웅주(현 공주: 웅천주), 명주(현 강릉: 하서주), 전주(현 전주: 완산주), 무주(현 광주: 무진주)이다.

 

경덕왕은 대외관계도 중시하여 당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는 또한 불교도 장려하였는데 굴불사와 불국사 등이 이때 만들어졌고, 황룡사 종과 성덕대왕 신종도 이때 만들어졌다. 그래서인지 경덕왕 대에는 불교와 관련된 일화가 많다. 경덕왕 24년 ‘찬기파랑가’를 지은 승려 충담이 왕을 위해 안민가를 지어 바쳤다고 한다.

 

경덕왕(742~764)은 23년간 나라를 통치하면서 통일 신라의 왕업을 튼튼히 하였다. 그래서인지 그의 능은 현재도 비교적 잘 관리되고 있었다. ⓒ 2008 OhmyNews 이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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