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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광주광역시

광주광역시 무등산 의재미술관 증심사

by 구석구석 2022. 8.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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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림동 647번지 우제길미술관

호남고속도로 서광주IC 출발 - 서광주IC(0.5km) → 용봉IC(3.3km) → 동광주IC(1.2km) → 각화사거리(4.8km) → 학운동(0.8km) → 학운사거리(0.4km) → 우제길미술관

 

전통적 예향도시이자 광주비엔날레를 비롯한 활발한 문화행사 등이 끊이지 않는 뜻깊은 이 지역사회에 다양한 현대미술의 이해와 그 활성화에 기여하며 직접적인 작가의 삶과 작업과정, 다양하고 풍부한 자료 등을 체험할 수 있는 열린장으로 활용하며, 거기에 작가 우제길의 작품세계를 다양하고 진진하게 체험할 수 있으며, 이 지역을 비롯한 국내, 해외와의 교류와 전시 행사 등을 통해 작가 우제길의 작품세계를 알리는 데에 그 목적을 둔다.

*우제길 작품 위주(1955년 ~ 현재 作)의 소장 및 전시 /  아트상품의 개발 및 판매
*우제길의 예술가적 삶과 과정, 그리고 그 작업과정과 다양한 자료등의 공개로 미술학도 및 미술애호가들의 열린 체험 공간.
*전통적 문화도시인 이 지역의 특성을 살려 위치상의 전통적고전과 현대미술을 연계하여 감상할 수 있는 동선의 위치.

10:00 ~ 17:00 (16시:30분 입장 완료) / 매주 일요일 및 국정 공휴일

 

부처의 心地 위에 솟은 깨달음의 산 '무등산'

무등산 정상을 목표로 산행기점으로 대표적인 곳이 증심사다. 원점회귀까지 소요 시간은 3시간 정도. 새인봉 맞은편 약사암까지 찻길을 따라가다가 나무계단 길을 따라 오르면 된다. 산행만을 목적으로 할 경우 증심사에서 출발하여 중머리재를 거쳐 장불재, 규봉, 꼬막재를 넘어 원효사로 산 전체를 한 바퀴 돌거나 그 반대로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소요시간은 6시간 정도.

증심사를 기점으로 삼든, 종점으로 삼든 그냥 지나치기 아까운 곳이 증심계곡 입구에 자리한 의제미술관이다. 1979년에 떠난 남종화의 대가 의제 허백련은 추사 김정희로부터 소치라는 호를 얻었던 허유의 후손이다. 본디 진도 사람이었으나 해방 후 증심사 아래에 정착하여 자신의 집을 춘설헌이라 하고 평생 그림을 그렸다.

하늘과 땅과 사람을 지극히 사랑한 그는, 삼애학원을 세워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농업 기술을 가르쳤고, 삼애다원을 세워 손수 차밭을 가꾸며 ‘춘설차’를 만들기도 했다. 이런 그의 삶과 예술 세계를 만날 수 있는 곳이 의제미술관이다.

 

무등산 계곡 따라 자연의 순리 따라 "의재미술관 & 춘설원"

광주 무등산증심사 계곡 등산로를 따라 가다 보면 마치 산의 각도에 살포시 얹혀 있는 듯한 의재미술관을 만나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무등산을 오르는 등산로 각도에 맞춰 설계 된것. 게다가 의재미술관은 “다음에 어디로 가지?”라고 묻지 않아도 발길이 자연스럽게 전시실에서 또 휴게실로 이어지는‘자연스럽고 순리에 따른’ 공간이다. 

의재 허백련 화백(1891-1977)의 삼애(三愛)사상과 화업(畵業)을 기리는 요람으로 자리잡은 의재미술관은 건립증축공사가 1999년 12월에 착공되었으며 2001년 11월 17일에 정식개관을 했다. 의재 미술관 062-222-3277

의재미술관에서는 남화의 개척자 의재 허백련 미술관 관람 뿐아니라 허백련 생가의 작업장(춘설헌) 관람, 차(茶) 시음이 있어 낯선 여행에 달뜬 마음을 한결 차분하게 한다. 우리나라 남종 문인화의 대가 인 의재 허백련 선생은 무등산 자락 춘설헌에서 많은 명작을 완성하며 농업학교 건립, 단군사상고취등 활발한 사회활동을 벌였다. 산수를 벗하며 산수를 담은 의재 선생의 예술적 정기를 "찌릿~" 받았다면‘가족 사생대회’를 통해 우 리 가족만의 화폭에 담아 보자. 그림과 자연과 다향이 머무는 작은집 의재미술관에서 말이다.

/ 한국관광공사 국내온라인마케팅팀 취재기자 김수진

약사암 가는 길

 

운림동 11번지 약사암 062-222-9844

약사암은 증심사 입구에서 새인봉쪽을 향하여 오르다 보면 새인봉 아래쪽에 자리잡고 있다. 원래 인왕사라 불렀다하며, 철감선사가 증심사를 세우기에 앞서 세웠다고 한다. 약사암에 보존되어 있는 유물로 석조여래좌상(보물 600호)과 3층석탑이 9세기 전반의 작품으로 추정되어 이 절의 역사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현재 약사암에는 대웅전, 운림당, 운림서원, 강원, 일주문 등이 있으나, 모두 1970년 대 후반부터 1980년대 중반의 건물이다.

증심사

불교에서는 수행의 과정을 신(信)·해(解)·행(行)·증(證)으로 표현한다. 믿음에서 출발하여 이해로, 실천으로, 체득으로 나아가니, 곧 증(證)이요 깨달음이다.

무등의 마음이 곧 증심인 까닭이니다. 무등산과 증심사는 손바닥과 손등의 관계다.

증심사는 신라 헌안왕 4년(860)에 철감 도윤(798-868) 선사가 창건한 절로 선사는 9산 선문의 하나인 사자산문의 개산조이기도 한데, 제자인 징효 절중 스님이 사자산 흥녕사(지금의 영월 법흥사)에서 스승의 선풍을 크게 떨쳤기 때문이다. 절터를 닦을 때부터 선찰(禪刹)이었다는 얘기다.

일제강점기 때 내선일치(內鮮一致)를 구호로 한국과 일본 불교의 뿌리가 같다고 주장할 때, 만해 한용운 스님 같은 분들은 전혀 다르다는 논지를 폈다. 일본은 염불종, 조동종 등이 주류를 이루면서 신도(神道)와 융합한 반면, 한국은 임제선을 중심으로 하는 선종이 주류였다는 것이다. 그때 임제종 운동을 펼친 본거지가 바로 증심사였다 한다. 

이 땅의 대부분 사찰이 그러했듯, 증심사 또한 역사의 격랑을 따라 부침을 거듭했다. 고려 선종 11년(1094)에 혜조국사가 중창했고, 조선 세종 25(1443)에 전라도관찰사 김방(金倣)이 삼창하였는데, 이때 오백나한을 조성했다한다. 이후 정유재란 때 불타 버렸고, 광해군 1년(1609)에 대규모로 중수했다. 그러나 한국전쟁 때 대부분 건물들이 다시 재로 바뀌었고 오백전만 불길을 피했다. 현존 건물 중 조선조의 건물로는 오백당이 유일하다.

비로전에서 바라본 증심사

지금의 절 모습은 1970년 이후 꾸준히 복원해온 결과다. 무등산 서쪽 기슭에 석축을 쌓아 터를 얻은 사역은 전형적인 산속 절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일주문을 지나면서부터 진입로는 성큼 키를 높이는데, 석축 위로 증심사의 얼굴격인 취백루(종무소)가 상승감을 한층 부추긴다. 취백루 모퉁이를 돌아 진입하면 곧장 네모꼴의 가운데 마당이 펼쳐진다. 취백루와 마주한 대웅전을 중심으로 지장전과 행원당, 적묵당과 범종각이 마당을 둘러싸고 있다. 위엄 넘치지만 위압적이지 않은 선승의 얼굴 같은 마당이다. 어디서 봐도 모나지 않은 무등산의 얼굴을 그려보기에 딱 좋은 마당이다.

대웅전 뒤로 살포시 단을 높인 곳에는 오백전과 비로전이 좁고 긴 네모꼴의 마당을 이루며 오체투지의 기도 공간을 만들고 있다. 오백전의 나한상은 저마다 다른 표정이다. 비로전 뒤 산신각은 누각 형식을 빌리고 있는데, 엉덩이를 살짝 산허리에 걸치고 있다. 산을 허물지 않고 알뜰히 공간을 활용한 모습은, 인간이 어떤 마음으로 자연과 한 몸을 이루어야하는지를 알게 한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증심사의 단정함을 대변하는 듯한 전각의 기왓골이 곱다 / 일주문 옆의 부도밭. 증심사의 역사가 꼿꼿이 서 있다.

백두대간의 영취산에서 솔가한 호남정맥이 섬진강을 살찌우면서 내장산까지 서남쪽으로 내달리다가 곧장 남하하여 호남의 가장 깊숙한 곳에 솟구친 산, 그 산이 바로 무등산(1,187m)이다. 호남정맥에서 장수 장안산(1237m)과 광양 백운산(1218m)에 이어 세 번째로 높은 산이지만, 도무지 그런 높이가 느껴지지 않는 산으로 워낙 두루뭉술한 흙산인데다 주름도 많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산의 면모는, 광활한 억새 벌판을 이루고 있는 장불재 위에서 정상을 바라보면 더욱 실감이 난다.

한때 무등산은 무당산, 무진악, 무악으로 불렸다 한다. 고려 때부터 서석산(瑞石山)이라는 이름과 함께 무등산이라 불렸다 하는데, 훗날 있을 5월의 비극을 예견한 증심사의 부처님이 ‘상서롭게 빛나는 돌산’이라는 뜻의 ‘서석’이라는 이름은 감추어 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 윤제학 현대불교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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