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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거 저런거/군대이야기

해외파병 서부사하라 국군의료지원단

by 구석구석 2024. 5.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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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사하라 국군의료지원단의 파병


무장세력·모로코·모리타니, 장기간 갈등 국가분쟁지역
1994년 첫 파견…12년간 의료지원·환자후송·공중보건 등 활동

서부사하라 국군의료지원단은 1994년 8월 처음 1진이 파견된 이후 2006년 5월 23진이 철수·귀국하기까지 12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활동했다. 파견을 통해 서부사하라에서 임무 수행하는 다국적 유엔 군·요원을 뒷받침했으며, 우리나라의 유엔 외교활동과 국제공조체제 활성화에 힘을 보탰다. 또 해외군사작전 경험을 가진 전문인력을 양성하고 군의 국제화를 도모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1994년 2월 28일 유엔은 우리 정부에 서부사하라 평화유지활동(PKO) 참여를 요청했다. 현장에서 임무 수행 중인 스위스 의료부대를 대체하는 제안이었다. 당시 우리 정부는 소말리아 상록수부대의 철수를 앞둔 시점에서 유엔 PKO 참여가 국제사회에서의 외교력 강화와 국격 향상의 배경이 될 것으로 판단했다. 또 정부 정책으로 추진 중이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 비상임이사국 진출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으로 예상했다. 서부사하라 지역의 정세가 비교적 안정적이어서 부대의 안전과 군수지원에 제한이 없을 것이라는 점도 종합적으로 고려했다.

서부사하라 유엔 평화유지활동(PKO) 국군의료지원단 선발대원들이 1994년 8월 9일 김포공항을 통해 출국하며 경례하고 있다. 국방일보 DB

앞서 서부사하라는 유럽 열강의 아프리카 분할 계획에 따라 1884년 스페인의 식민지가 됐다. 주민들은 스페인에 지속적으로 저항했고, 1950년대부터는 무력투쟁으로 저항을 이어갔다. 1970년대 들어서는 그 혼란이 더욱 커졌다. 주민들은 무장세력 폴리사리오를 창설해 조직적으로 맞섰고, 그 와중에 인접국인 모로코와 모리타니는 서부사하라를 자국 영토라고 주장하기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이에 유엔이 1975년 서부사하라를 국제분쟁지역으로 결정하자 모로코는 자국민 약 35만 명을 서부사하라로 이주시키며 반발했다.

결국, 스페인은 1976년 2월 서부사하라에서 완전한 철수를 선택했다. 하지만 독립을 원하는 폴리사리오와 서부사하라가 자국 영토임을 주장하는 모로코·모리타니의 갈등·분쟁은 오히려 격화됐다. 이후 모리타니는 폴리사리오의 끊임없는 무장공격에 서부사하라에서의 영토 주장을 철회했고, 모로코는 주민투표로 독립 여부를 결정한다는 유엔 평화안을 수용하며 폴리사리오와 휴전협정을 체결했다. 유엔은 1991년 4월 안보리 결의를 통해 서부사하라 선거지원단(MINURSO)을 창설했으며 같은 해 5월 미국, 프랑스, 러시아 등 각국 군 요원을 최초 파견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국군의료지원단은 사전 준비를 거쳐 1994년 6월 창설됐고 8월 선발대에 이어 9월 1진 본대가 현지에 도착했다. 10월에는 유엔 선거지원단사령부가 있는 라윤을 중심으로 남부지역 오사드와 북부지역 스마라 등에 3곳의 진료소를 개원해 본격적으로 운영했다. 당시 부대는 군의관·간호장교 14명을 포함해 장교 27명, 부사관 6명, 병사 9명 등 총 42명으로 구성됐다.

이후 서부사하라에서의 주민투표 연기와 분쟁 상황 장기화로 인해 유엔이 전체 요원 수를 700여 명에서 200여 명으로 축소하자, 국군의료지원단 역시 1996년 9월 파견된 5진부터는 파견 인원을 기존의 절반 수준인 20명으로 감소·편성해 철수 시까지 유지했다. 연인원 540여 명의 장병이 23진에 걸쳐 현지에 파견됐으며, 내과·외과·피부과·안과·이비인후과·치과·비뇨기과 등 12개 이상의 진료과에서 5만8000여 명을 진료했다.

임무는 크게 다섯 가지였다. 유엔 선거지원단 요원에 대해 의료지원을 펼치고, 능력 초과 환자는 전문병원 시설로 후송했다. 응급실을 운영해 24시간 응급환자를 조치하며 후송체계를 유지했다. 또 작전지역에 대한 방역·검역 등 위생 활동을 지원·감독하고, 요원들에 대한 공중보건 및 예방접종 활동을 펼쳤다.

이후 서부사하라 사태가 조기에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동일 지역에서의 임무를 과도하게 장기간 수행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판단에 따라 2006년 국군의료지원단의 철수가 결정됐다. 우리 정부는 파병을 연장하지 않겠다는 내용을 유엔에 통보하고, 임무를 후임 부대인 말레이시아 의료지원단에 인계한 뒤 같은 해 5월 철수했다. 처음 1진 장병들이 파견된 지 약 12년 만이었다.

국군의료지원단은 적극적이고 전문적인 활동으로 유엔 선거지원단 소속 유엔군과 행정 요원을 완벽히 뒷받침했다. 또 높은 의료수준을 선보이며 선진국 이미지 형성에 크게 기여했다. 열대지방 질병에 대한 응급처치, 질병 관리, 예방활동 경험을 통해 우리 군 의료인력의 전문성을 더욱 키웠으며, 국제평화를 지향하는 국가의 위상을 높이는 결과를 만들었다. / 국방일보 2021.3 서현우 기자

 

 

운명처럼 찾아온 해외파병 -양은숙 예비역 중령

 
전역 고민하던 중 해외파견 모집 공지 / 서부사하라 국군의료지원단 10진 선발 / 1999년 4월부터 민·군 요원 의료지원
항공정찰 동승해 사막 응급상황 대비 / 식수난에 모래바람…예상보다 현장 열악

서부사하라 국군의료지원단은 1994년 9월 1진 본대 장병들이 처음 현지에 도착해 임무를 시작했다. 유엔 서부사하라 선거지원단(MINURSO) 소속으로 2006년 5월까지 23진에 걸쳐 연인원 540여 명의 장병이 파견됐다. 그들은 사막의 거친 모래바람 속에서 꿋꿋이 의료지원을 펼치며 유엔의 평화유지활동(PKO)에 힘을 보탰다. 양은숙 예비역 중령은 10진 간호장교로 1999년 4월부터 10월까지 6개월간 활동했다.

틴두프 지역 난민캠프에서 양은숙 예비역 중령(당시 대위·가운데)과 유엔 소속 타국군 연락 장교들.

1998년 늦가을 양은숙 예비역 중령(당시 대위)은 8년 차 간호장교로 강원도 전방지역 이동외과병원(MASH)에서 근무 중이었다. 전방부대를 순회하며 장병들이 건강하게 생활하도록 돕는 임무였다. 임무는 항상 소중하고 즐거웠으며, 마음속에는 사명감과 자부심이 있었다. 하지만 두 아이의 양육에 대한 어려움으로 전역을 고민하곤 했다. 의지와 다르게 엄마와 군인은 하나의 길이 아닌 갈림길로 다가왔다. 그때 해외파견 장병 모집 공지는 운명처럼 다가왔다. 오래전부터 꼭 참여해보고 싶은 활동이었다.

유엔 서부사하라 선거지원단(MINURSO) 국군의료지원단 중앙진료소 전경.

그때가 1999년 4월이었다. 앞서 선발 직후 2개월여의 파병 전 교육·훈련 기간을 거친 터였다. 파병 전 교육·훈련의 목적은 현지에서의 완벽한 의료지원 활동을 위한 기초 준비였다. PKO 수행 업무·지침을 숙지하고, 현지에서의 임무 수행을 위한 주특기·언어 교육에 중점을 뒀다. 기본 교육, 직책별 교육, 어학 교육, 지휘관 시간 등으로 구성됐으며 파견 지역 특성·임무에 맞춘 전문 위탁교육도 함께 진행됐다.

우리 군의 주요 임무는 유엔 선거지원단에서 근무하는 민·군 요원에 대한 의료지원을 비롯해 각종 질병 예방을 위한 방역 활동, 응급환자에 대한 신속 조치, 상급 의료시설로의 후송 등이었다. 사령부가 있는 서부사하라의 거점 도시 라윤의 국군의료지원단 중앙진료소를 중심으로 남부와 북부에 각각 전방 진료소를 24시간 운영했다.

또 우리의 일반전초(GOP)와 유사하게 15명 내외의 옵서버들이 상주하는 관측초소(팀사이트)를 순회 진료하는 일도 펼쳤다. 진료소에서는 기초 응급처치 교육, 약 처방, 차트 정리, 예방접종, 물품 정리 등 진료·처치에 필요한 모든 일을 했다. / 국방일보 서현우 기자

응급환자 발생, 긴급구호 바람 - 양은숙 예비역 중령

환자 상급의료기관 후송 후에야 안도 / 부대 복귀하며 대한민국 군인 자부심

진료소 24시간 운영 지역 순회 진료 / 수준 높은 의료 활동 ‘대체불가 부대’ / 아이들 태극기 보고 ‘꼬레’ 외치며 환영

유엔 서부사하라 선거감시단(MINURSO)에서 우리 국군의료지원단(KMU)은 없어서는 안 될 대체불가 부대였다. 주어진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지침·절차를 철저히 준수했고 사건·사고가 한 건도 없었으며, 무엇보다 수준 높은 의료 활동으로 유엔의 평화유지활동(PKO)에 큰 힘이 됐다. 유엔 선거감시단 사령부와 남·북부 등 세 곳에 진료소를 열어 24시간 운영했으며, 팀사이트(관측초소)를 직접 순회하며 유엔 요원들을 진료했다.

서부사하라 국군의료지원단 10진. 세 곳의 진료소에 나뉘어 순회 진료하기 때문에 한자리에 모일 일이 거의 없었다. 둘째줄 맨 오른쪽이 양은숙 대위.

1999년 4월 당시 서부사하라 국군의료지원단 10진 간호장교 양은숙 대위(예비역 중령)는 북부 지역 팀사이트를 순회 진료하는 임무 중이었다. 팀사이트는 사막 한가운데 있는 유엔의 관측초소인데 15명 안팎의 옵서버 요원들이 상주하고 있었다. 해당 지역에서 분쟁·갈등을 겪는 폴리사리오와 모로코 간에 유엔의 평화적인 문제 해결 결정안이 제대로 지켜지는지 감시하는 전방 기지였다.

사막 한가운데 있는 팀사이트 전경.

당시 양 대위는 이 같은 팀사이트를 매주 순회했다. 사막 한가운데서 혹시 발생할 수 있는 응급 상황에 대비하는 일은 매우 중요했기 때문이다. 또 항공정찰 같은 공중작전이 있을 때면 군의관과 간호장교는 헬기에 반드시 동승하는 것이 지침이었다. 헬기 조종은 우크라이나군, 정찰 작전은 프랑스군, 의료지원은 우리 군이 맡는 식으로 다국적 유엔군이 한 팀이 돼 움직였다.

항공기를 이용해 팀사이트에 물품을 공급하는 모습.

“Lima 7 Alpha, Lima 7 Alpha... KMU, KMU...”

응급환자가 발생해 우리 군 의료진을 찾는 호출부호였다. 양 대위 일행이 응답했고 즉시 응급환자가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헬기로 40분이 걸려 도착한 지점은 서부사하라 북부 지역 도로 위였다. 뜨거운 도로 위를 달리던 차량이 타이어 파열로 몇 바퀴 구른 뒤 전복돼 부상자가 발생한 것이었다. 차량에는 세 명이 타고 있었는데, 유엔 선거감시단 소속 민간 요원 한 명과 유엔에서 고용한 현지인 스태프 두 명이었다.

비행기로 2시간 거리였다. 그렇게 애타는 시간이 흐른 뒤 아가디르 공항에 도착했고 구급차의 요란한 불빛 신호에 겨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신속히 병원으로 이동하며 현지 의료진에게 환자의 상태와 경과를 설명했다. 미리 연락을 취한 상태라 병원에는 흉부외과와 신경외과 전문의가 대기하고 있었다. 현지 의료진들은 차분하면서도 빠른 손놀림으로 필요한 조치들을 수행했다. 그제야 양 대위를 비롯한 우리 군 의료진의 긴장이 풀렸다. 

서부사하라의 빛나는 밤 -양은숙 예비역 중령

 
1999년 4월, 19명 전우와 함께 파견 / 유엔 민·군 요원 의료·진료 담당
사막 한가운데 있는 유엔 관측초소 / 힘든 여정, 각국 장병들과 이겨내
“평화 위해 뭉친 소중한 시간 / 군인이었기에 가능한 기회라 생각”

서부사하라 국군의료지원단(KMU)은 초기 1진부터 4진까지는 장교·부사관·병 등 40여 명으로 편성했고, 이후 유엔의 임무 축소에 따라 5진부터는 장교·부사관 20명으로 구성해 파견했다. 이들은 현지에서 유엔 서부사하라 선거감시단(MINURSO) 소속으로 중앙·남부·북부 세 곳 진료소에 나뉘어 배치됐으며, 진료소를 순환·교대하는 방식으로 임무를 펼쳤다. 또 각 지역 주요 위치에 설치된 유엔 팀사이트(관측초소)를 순회 진료하며 유엔 민·군 요원들의 든든한 버팀목이 됐다.

1999년 서부사하라 국군의료지원단 임무 수행 당시 순회 진료를 위한 이동에 앞서 기념 촬영하는 양은숙 예비역 중령(당시 대위).

국군의료지원단 10진 간호장교 양은숙 예비역 중령(당시 대위)은 1999년 4월 열아홉 명의 전우와 함께 현지에 파견돼 유엔 민·군 요원들의 의료·진료 업무를 담당했다. 하지만 세 곳의 지역에 나뉘어 순환 근무했기 때문에 20명 모두가 한자리에 모일 기회는 거의 없었다. 같은 이유로 국군의료지원단 파병 장병 중에는 서부사하라에 함께 도착했지만, 임무 수행 기간 내내 보지 못하다가 진 교대 이후 귀국길에서야 만났던 경우도 있었다.

24시간 운영하는 중앙진료소는 한시도 자리를 비울 수 없었고, 각각의 팀사이트에서 단기간 체류하며 진료를 이어가는 순회 업무는 체력적 한계를 이겨내야 했다. 다행히 진료소 업무는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장병들을 면담하고 진료하며 필요에 따라 처치·처방하는 것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장병들의 다양한 국적이었다. / 국방일보 글=서현우 기자/사진 제공=양은숙 예비역 중령

 

사막에는 이정표가 없다 -이희경 예비역 중령

옵서버 순찰 동행하며 임무 현장 파악 / 운전·내비게이터·정찰 임무 나눠 맡아 / 차량 타이어 찢어지는 일도 다반사

2004년 당시 서부사하라 국군의료지원단 이희경(맨 오른쪽) 간호반장이 현지 유엔임무단 사령부를 방문한 유엔 고위 관계자와 악수하고 있다. 사진 제공=이희경 예비역 중령

1994년 8월부터 2006년 5월까지 아프리카 서부사하라에서 활동한 국군의료지원단(KMU)은 단본부·중앙진료소·전방진료소의 3개 단위로 편성됐다. 서부사하라 라윤에 위치한 중앙진료소에는 진료실·응급실·병리실·방사선실·약제실·입원실 등이 있었고, 전방진료소는 남부 오사드와 북부 스마라에 각 한 곳씩 설치·운영됐다. 또 단장을 중심으로 진료반장·간호반장·지원반장이 있었고, 군의관·간호장교·지원부서 장병 등으로 구성됐다.

이희경 예비역 중령(당시 소령)은 20진 간호반장으로 2004년 4월부터 10월까지 6개월간 국군의료지원단에서 근무했다. 현장에서는 간호장교로 유엔 서부사하라 선거지원단(MINURSO) 요원들의 의료지원 임무를 수행하는 동시에 간호반장으로서 간호장교들을 보살피며 그들의 업무를 챙겼다.

서부사하라는 영토가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어서 유엔임무단 사령부는 남·북부 각 거점에 예하 지역사령부를 뒀고, 전방진료소를 각 지역사령부에 한 곳씩 설치했었다. 아울러 지역사령부에서는 팀사이트를 곳곳에 운영했는데 우리의 일반전초(GOP)와 유사한 개념이었다. 우리 군 의료진은 진료소 상근과 팀사이트 순회 진료 업무를 나눠 동시 진행해야 했기 때문에 때로 일손이 부족해 힘겨운 시간을 보내야 했다. / 국방일보 서현우 기자

간호반장의 순회 진료 -이희경 예비역 중령


사막 한가운데 덩그러니 놓인 팀사이트 / 처음 마주했을 땐 막막함부터 느껴
실력·체력·의지 갖춘 각 국 장교들 / 열악한 상황에도 평화유지활동 자부심
사막 한가운데의 팀사이트를 순회하는 진료는 가는 여정부터 쉽지 않았다. 사진 제공=양은숙 예비역 중령

우리 군이 서부사하라에 국군의료지원단을 파견하기 시작한 1994년 이후, 해당 지역은 분쟁 당사국인 모로코와 폴리사리오 간 정전협정이 이행 중이었다. 주민 총선거로 분쟁을 해결한다는 유엔의 제안에 서로 합의해 관련 절차가 이어지고 있었다. 각국에서 온 유엔 민·군 요원들은 선거 행정 업무를 처리하고 정전협정 이행 여부를 감시·정찰하며 지역의 평화를 이뤄갔다.

이희경 예비역 중령(당시 소령)이 순회 진료하며 현장에서 마주한 팀사이트 풍경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열악한 모습이었다. 해안을 제외하고는 사막성 기후에 속하는 탓에 한낮에는 기온이 최대 섭씨 60도에 육박했고, 야간에는 기온이 뚝 떨어져 일교차가 30~40도에 이르렀다. 또 한 번씩 사막 모래 폭풍이 불어오면 사무실이며 숙소가 온통 모래로 가득해졌다. 화장실과 샤워장이 있었지만 남녀 구분이 따로 없었고 물이 제대로 나오지도 않았다. 시설·장비는 물론 식수·식자재도 부족했으며, 도마뱀과 전갈 같은 파충류들이 곳곳에서 출몰했다.

서부사하라 오사드에 있는 유엔 서부사하라 선거감시단(MINURSO) 남부사령부 전방진료소. 사진 제공=양은숙 예비역 중령

분쟁당사자 간 휴전으로 인해 무력 충돌과 위협 행위가 거의 없었다는 점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전투가 아닌 감시·정찰이 유엔 요원들의 주 임무였고, 이 때문에 긴급 상황과 인명 피해가 자주 발생하지 않았던 점 역시 감사한 일이었다.

기후가 열악하고 식수·식자재가 부족하다 보니 장병들에게 영양소 부족이 먼저 일어났다. 타국 군은 물론 이 소령을 포함한 우리 군 요원들도 힘든 상황에 놓일 수밖에 없었고, 일부는 체중이 10㎏ 이상 감소하기도 했다. 또 끊임없이 불어대는 모래바람에 피부가 상하는 일도 예사였다. 물이 부족해 제대로 씻지 못하는 데다 그 물조차 상태가 좋지 않아 피부가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상한 외국군 장병도 있었다. / 국방일보 서현우 기자

 

전염병 발생 - 도은민 예비역 대위

 
피·땀 얼룩진 시트 갈아주며 간호 / 원인 찾아 치료·처방 사망자 없어
유엔임무단 사령부·각국 요원 찬사 / 우리 의료진 신뢰하는 계기 돼

1995년 유엔 서부사하라 국군의료지원단 3진 간호장교로 임무 수행한 당시 도은민 중위(예비역 대위·왼쪽)와 유엔임무단 튀니지군 장교. 사진 제공=도은민 예비역 대위

국군의료지원단을 비롯해 당시 서부사하라에서 활동했던 유엔 소속 민·군 소속 요원들에게 물은 없어서는 안 될 필수 존재인 동시에 가장 주의해야 할 위험 존재였다. 식수는커녕 물 자체가 부족했고 그마저도 청결하지 못한 환경 탓에 물로 인한 질병 발병의 불안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1995년 국군의료지원단 3진 간호장교로 현지에 파견된 도은민 예비역 대위(당시 중위) 역시 물이 가진 소중함과 위험성의 양면을 잘 알고 있었다. 뜨거운 열기를 내뿜는 사막에서 정찰 임무를 수행하는 옵서버 요원들에게 한 모금의 물은 금과 같았지만, 반대로 오염된 물은 질병을 일으키는 독이 되기 때문이었다.

국군의료지원단의 헌신은 사령부 전체에 감동으로 전해졌다. 또 빠르게 질병의 원인을 찾아 적절한 치료·처방을 하면서 우리 군 의료기술에 대한 감탄을 자아냈다. 국군의료지원단 파병 초기에 있었던 이 일화는 두고두고 회자되며 이후 우리 의료진이 신뢰받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도 예비역 대위는 6개월의 임무를 마치고 귀국해 국군간호사관학교와 국군춘천병원 등에서 근무한 뒤 2001년 전역했다. 후배 간호장교들에게는 경험을 아낌없이 소개하며 용기를 북돋웠다. 개인의 경험이기 전에 공유해야 할 정보였고, 함께 나눠야 할 자료라는 생각에서다. / 국방일보 서현우기자

 

부대 교대를 준비하라 -이호진 중령 (국군서울지구병원 간호부장)


5만 명 이상 진료 성과 내며 철수 결정 / 행정·서류 작업 마치고 브리핑 연습 / 언어 다르다 보니 준비만 한 달 걸려
인수인계에 주어진 시간은 일주일 / 짧은 기간 말레이군과 급속 친해져
2006년 5월 서부사하라 국군의료원지원단 23진 정해원(왼쪽, 대령·진) 단장이 반납한 부대기를 유엔군사령관이 임무를 맡게 될 말레이시아군 대표에게 이양하고 있다. 국방일보 DB
서부사하라 유엔 평화유지활동 당시 국군의료지원단 23진 요원들. 맨 왼쪽이 이호진 중령. 사진 제공=이호진 중령

서부사하라 국군의료지원단은 2006년 5월 23진 장병들이 철수·귀국하며 임무를 종료했다. 1994년 8월 1진 부대를 파견한 이후 12년여 만이었다. 우리 군은 이 기간 내과, 외과, 피부과, 치과, 이비인후과, 안과 등에 걸쳐 5만 명 이상을 진료하는 성과를 올렸다. 진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약 6개월 근무 후 교대했으며, 처음과 마지막이었던 1진과 23진은 7개월간 활동했다. 마지막 파견 부대였던 23진은 2005년 10월 10일 현지에서 본격적인 임무를 시작했다.

국군서울지구병원 간호부장 이호진 중령(당시 대위·진)은 2005년 국군수도병원에서 간호장교로 근무 중이었다. 당시 이호진 대위(진)는 선배 간호장교들의 앞선 활동을 보며 해외파병은 군인으로서 국가와 국민에 기여하는 의미 있는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이 대위(진)도 주어진 임무에 최선을 다하면서 기회가 주어진다면 반드시 도전하리라 다짐했다.

기회는 우연히 찾아왔다. 부대 개편으로 이 대위(진)의 일상에 변동이 예정된 상황에서 평소 해외파병에 대한 이 대위(진)의 뜻을 알고 있던 주변 선배 간호장교들이 마침 서부사하라 국군의료지원단에 지원해 볼 것을 제안했다. 운명처럼 다가온 기회에 간절한 마음으로 지원했고, 운이 좋게 파견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 국방일보 서현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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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사하라를 떠나며 -이호진 중령 (국군서울지구병원 간호부장)


심폐소생술·온열 손상 예방법 등 
임무 중 발생 가능한 상황 맞춰 진행 / 실습 등 적극 참여…신뢰 쌓는 시간 / 12년 이어온 임무 마치고 23진 귀국
 

2006년 5월 17일 육군회관에서 열린 서부사하라 국군의료지원단 23진 귀국 행사에서 파병 용사들이 경례하고 있다. 국방일보 DB
국군의료지원단 부대 임무 교대 후 당시 덴마크군 출신 유엔군 사령관은 우리 요원들을 한 명 한 명 안아주며 그간의 노고를 위로했다. 임무 완수의 뿌듯함과 감격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사진 제공=이호진 중령

국군의료지원단은 유엔 서부사하라 선거지원단(MINURSO) 사령부 직할부대로, 1994년 8월부터 2006년 5월까지 현지에서 중앙진료소와 남·북부 전방진료소를 운영했다. 또 지역 팀사이트를 순회하며 다국적 유엔 임무 요원들을 진료하거나 이들의 항공·지상 정찰에 동행하며 의무지원·활동을 펼쳤다. 이를 통해 사하라에서의 유엔 평화유지활동(PKO)이 성공적으로 이어지는 데 힘을 보탰다.

국군의료지원단 23진 간호장교로 PKO에 참여했던 이호진 중령(당시 대위·진) 역시 팀사이트 순회 진료 때 유엔 임무 요원들의 지상 정찰에 함께 나서기도 했다. 정찰에 동행하는 일은 요원들의 의무지원뿐만 아니라 현지 위생·질병 관련 동향을 파악하는 데도 매우 중요했다. 각 지역에서 발견되는 풍토병과 주민들의 상태를 지속 파악함으로써 요원들은 물론 서부사하라 일대에 영향을 줄 수 있는 환경적 위협요소를 예방·제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상 정찰은 진료 업무 못지않게 신경 썼던 부분이었습니다. 아울러 정찰 경로상에서 지뢰·불발탄 제거 표식을 심심치 않게 마주하며 역사적 현장의 현실을 기억하고 경각심을 갖기도 했습니다.”

한번은 현지 지상 정찰 임무 수행 중 만난 한 여성 주민에게서 뭔가 심상치 않은 증상을 발견했다. 인도적 차원에서라도 그 여성을 모른 척 지나칠 수 없었다. 가족들의 요청에 조심스레 여성에게 다가갔다. 갓 출산한 젊은 여성이었는데 음식과 대화를 거부하는 모습이었다.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군의관과 함께 그 여성을 살펴보고 주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눴어요. 진료 결과 다행히 외상 등은 없었고, 산후 우울증으로 판단했습니다. 가족들에게 이를 알리며 어떻게 해야 할지 구체적으로 설명했습니다. 가족들은 크게 안도하며 저희에게 거듭 고마움을 표했습니다.”

팀사이트에서는 각국에서 온 다양한 장병들을 만났다. 국적과 인종에 따라 문화적 차이와 관점이 다름을 느꼈지만, 유엔 임무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모두 같은 마음이었다. 다만 장병 대부분은 체격·체력이 양호했음에도 일부는 당뇨와 고혈압 등 기저질환이 있어 지속적인 관리가 필요했다. 또 고온 건조한 기후에 먼지가 많고 물의 정수 상태가 좋지 않아 피부 질환을 앓는 장병이 많았는데, 이들에 대한 진료·치료와 함께 예방 교육 활동은 매우 중요한 업무 중 하나였다.

“팀사이트에서는 하루의 일과를 마치면 모든 장병이 한자리에 모여 회의를 진행했습니다. 일일 결산처럼 그날그날의 각자 업무에 대해 공유하며 의견을 나누는 자리였어요. 주 1~2회 정도는 회의가 끝나면 의료교육(Medical Lecture)을 진행했는데, 장병들의 반응이 엄청났습니다.”

기본적인 개인위생부터 심폐소생술, 온열 손상 예방법, 골절 시 조치법 등 임무 수행 중 실제 발생할 수 있는 상황에 맞춘 의무교육이었다. 또 군의관 전공 분야에 따라 피부병 예방·처치, 외상 발생 시 긴급처치, 인대·염좌 손상 시 대처 등 심화 교육을 진행하기도 했다. 장병들의 참여는 적극적이었다. 실습이 바탕이 돼 더욱 관심을 끌었다.

“그 시간을 손꼽아 기다리는 장병도 있었습니다. 사막지형에서 활동하다 보니 예상치 못한 부분에서 크고 작은 부상이 늘 존재했습니다. 실질적 도움이 되는 교육이었고, 각국 군이 서로 신뢰와 공감을 쌓는 의미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이 같은 활동은 각국 군 장병들에게 한국에 대한 이미지를 높이고 이를 오래도록 기억하게 도움을 줬다. 불과 수십 년 전 6·25전쟁으로 폐허가 된 국가가 고도의 발전을 이루며 이제는 국제평화에 이바지하고 있다는 인식이었다.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설명하면서 우리나라를 제대로 알리는 데에도 노력했습니다. 그들은 우리나라가 도움을 받던 나라에서 도움을 주는 나라로 발전한 것에 크게 놀라워했고, 이후에는 ‘작지만 강한나라’라며 존경을 보냈습니다.”

의료 활동에 고마움을 갖게 된 장병들은 그 마음을 적극적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사진 촬영이 취미인 한 장교는 우리 군 의료진의 모습을 종종 카메라에 담아 인화한 사진을 건넸고, 다른 장교는 자국의 기념품을 선뜻 선물했다. 또 고향 음식을 만들어 대접하거나 전통 차·커피를 내놓는 장교도 있었다.

각국 장병들과의 친교를 통해 파병 생활의 고충을 함께 나누며 위로받은 동시에 각 나라를 대표해 분쟁 현장에 왔다는 자부심을 공감했다. 서로를 격려하며 용기를 북돋울 때는 국적을 떠나 모두 같은 ‘군인’일 뿐이었다. 선배 군인으로서 또 후배 군인으로서 깊은 공감을 나눴다.

“국제사회와 유엔 임무에 대한 깊은 의견을 주고받기도 했어요. 평화의 중요성과 국제협력의 가치부터 군인의 자세와 개인의 역량 향상까지, 국적과 계급을 떠나 서로가 서로에게 더욱 열심히 임무를 수행하는 데 자극이 됐습니다.”

국군의료지원단 23진은 업무를 이어받은 말레이시아 의무부대와의 인수인계 및 합동 근무를 모두 마친 후 비행기에 올라 2006년 5월 17일 오전 귀국했다. 또 당일 오후 육군회관에서 육군참모총장 주관으로 부대 해단식을 갖고 1994년 8월 1진부터 이어온 약 12년의 임무를 마무리했다. / 국방일보 서현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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