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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거 저런거/군대이야기

해외파병 앙골라 공병부대 유엔평화유지활동 PKO

by 구석구석 2024. 5.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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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골라 공병부대 파병


오랜 내전 끝에 평화협정 체결…유엔 재건 돕기 위해 회원국 파병 요청
임무 방향 조정 결정…국회 동의 얻어 ‘앙골라 PKO 파견부대’ 창설
1년 3개월간 3진에 걸쳐 임무 완수…1997년 1월 25일 부대 해단식

유엔 평화유지활동(PKO) 앙골라 공병부대 장병들이 1995년 10월 4일 출국 전 환송 행사를 하고 있다. 국방일보 DB

1995년 2월 유엔은 평화협정이 진행 중인 앙골라에서 지뢰 제거 임무를 수행할 전투공병 파병을 우리 정부에 요청했다. 당시 앙골라는 유엔의 주도로 약 20년에 가까운 내전을 끝내는 기틀을 마련할 때였다. 각국은 유엔 평화유지활동(PKO) 동참을 선언하며 지역의 평화 정착을 희망했다. 우리 정부는 소말리아 상록수부대와 서부사하라 국군의료지원단의 유엔 PKO를 통해 국제평화협력에 기여하는 과정에서 앙골라 파병을 마주했으며, 적극적으로 이를 추진했다.


앙골라 내전과 유엔 개입

아프리카 서남부 대서양에 인접한 앙골라가 국제사회로부터 본격적인 주목을 받은 것은 1970년대 중반이었다. 당시 앙골라는 포르투갈의 식민지배를 받고 있었고, MPLA(인민해방운동당), FLNA(앙골라인민해방전선), UNITA(앙골라완전독립연합) 등 무장투쟁단체가 식민지배를 벗어나기 위해 협력과 경쟁을 펼쳤다. 1975년 1월 이들 세 단체는 포르투갈과 협정을 맺고 과도정부를 구성하기로 했다. 단계적 절차를 거쳐 독립국가를 세우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단체들은 군사적 우위와 권력 독점을 추구하면서 충돌을 빚었고, 이는 같은 해 7월 과도정부 해산과 내전으로 이어졌다.

내전은 미국·소련의 냉전체제 이념 대결 양상으로 확대됐다. 쿠바가 전투병력을 보내 MPLA를 지원하는 가운데 미국과 주변국은 이에 맞서 UNITA를 지원했다. 내전은 더욱 격화되다가 미국의 지원이 중지되면서 1979년 9월 MPLA가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했다. 1988년 12월에는 유엔과 국제사회가 쿠바군의 철수를 종용해 결국 철수에 합의했고, 이에 유엔은 1차 진상조사단을 파견해 쿠바군의 철수 상황을 확인했다.

이후 1991년 4월 MPLA 지도자 산토스가 국제사회의 탈냉전 흐름에 따라 공산주의를 포기하고 다당제 도입 등의 변화를 추진했다. 당시 국토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던 UNITA도 평화협상에 응해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기로 하고, 유엔은 2차 진상조사단을 현지에 보냈다.

그러나 1992년 평화협정에 따라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MPLA 지도자 산토스가 당선되자 UNITA는 결과에 불복하고 무장투쟁을 재개했다. 유엔은 UNITA에 대한 제재를 결의한 후 중재에 나섰다. 1994년 11월 양측은 정부 주요 직위를 나눈다는 조건으로 평화협정을 체결해 내전 종결의 계기를 만들었다. 유엔은 평화협정을 감시하는 동시에 앙골라의 재건을 돕고자 1995년 2월 3차 진상조사단을 보냈다. 또 한국과 주요 회원국에 병력의 파병을 요청했다.


유엔의 파병 요청과 준비

1995년 당시 앙골라는 긴 내전으로 인해 수십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상태였다. 도로와 건물은 파괴됐고 교전 지역에는 1500만여 개의 매설 지뢰가 여전히 방치돼 주민들의 피해가 계속됐다. 유엔은 그해 2월 앙골라 내전의 당사자인 MPLA와 UNITA 사이 평화협정 체결과 함께 각국에 파병을 요청했다. 우리나라에도 지뢰 제거 임무를 수행할 전투공병의 파병 요청 공한을 보냈다.

우리나라는 소말리아 상록수부대와 서부사하라 국군의료지원단을 통해 유엔 PKO 활동을 이어가는 중이었다. 또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비상임이사국 진출을 앞두고 국제사회에서의 역할 증대가 필요한 때였다. 파병에는 긍정적이었으나 지뢰제거 임무 수행에는 여러 제한 요소가 존재했다. 이에 파괴된 교량을 보수·건설하는 것으로 임무 방향을 조정·결정했고 1995년 7월 국회 동의를 얻었다. 이어 8월 1113야전공병단을 모체로 198명을 편성해 ‘앙골라 PKO 파견부대’ 창설식을 가졌다. 부대 고유명칭은 101야전공병대대였으며, 통상명칭은 육군6767부대였다.

부대는 대대급으로 대대본부, 본부중대, 공병중대로 구분됐다. 대대본부에는 운영과와 지원과를 두고 정보·작전·인사·공보·보급·연락 등의 업무를 수행했다. 본부중대는 통신반, 의무반, 정비반, 경비소대로 나눴고, 공병중대는 3개의 공병소대와 차량·정비소대가 편성됐다. 또 공병 장비는 진동롤러, M2장간조립교, 페이로더, 5톤 덤프, 도저, 굴삭기, 5톤 구난차, 60톤 크레인, 그레이더, 지게차, 심정굴삭기 등을 준비했다.

8월 7일 부대가 창설되자 부대원들에 대한 교육·훈련이 이어졌다. 교육·훈련은 주(부)특기훈련, 자위력보강훈련, PKO 관련 업무 교육에 중점을 뒀다. 총 8주 280시간에 걸쳐 진행했으며, 9월 23일 마무리했다. 그사이 8월 말께에는 부대원들의 현지 도착 일정에 맞춰 컨테이너 40개분량의 장비·물자를 수송선에 선적해 현지로 먼저 떠나보냈다. 부대원들은 9월 26일 선발대에 이어 10월 4일 본대가 출국해 10월 5일 앙골라 수도 루안다에 도착했다.


우리 공병부대의 활약

부대는 앙골라 동남부 고지대에 있는 우암보 지역에 주둔지를 구성했다. 10월 말까지 약 한 달간 주둔지를 건설하고 11월부터는 재건사업을 본격적으로 펼쳤다. 주임무는 앙골라 수도 루안다에서 제2의 도시 우암보를 거쳐 남부 루빙고로 연결되는 도로 상에 파괴된 교량을 복구·신설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교량 다수가 산악지대에 있거나 지뢰가 매설된 지역에 위치해 작업에 어려움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대는 1996년 12월까지 약 1년 3개월간 총 3진에 걸쳐 주어진 임무를 모두 완수해냈다. 1진과 2진은 각 4개씩 총 8개의 교량을 건설해 개통시켰으며, 3진은 부가임무를 주로 맡아 비행장 복구, 도로보수·건설, 시설 부지 정리, 장비·기술 지원 임무 등을 수행했다.

아울러 부대는 대민 지원 업무도 병행했다. 의료·방역 지원, 심정개발, 마을회관 보수, 사랑의 학교 운영, 영농교육, 장비 지원 등은 현지 주민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며 자립에 힘을 보탰다. 현지 TV·라디오 매체에서도 우리 군의 활약을 계속 소개하며 부대원들의 헌신에 감사를 표했다. 부대는 또 한국의 날 행사를 열어 우암보 일대에서 함께 임무를 수행하는 우루과이 보병대대, 포르투갈 보급대대, 브라질 의무부대 등 유엔 파병부대 장병들과 교류를 이어가기도 했다.

부대 철수는 1996년 12월이었다. 앞서 같은 해 10월 유엔은 앙골라에서의 유엔 임무 규모를 축소하기로 하고, 우리나라를 포함해 우크라이나, 브라질, 루마니아 등의 파병 병력 감축을 결정했다. 유엔의 감축 결의에 따라 우리 군도 부대 철수를 신속히 진행했다. 연내 철수를 목표로 계획과 실행이 이어졌고, 컨테이너 8동과 6개 품목 4500만 원 상당의 물자 등은 우암보 주 정부에 기증했다. 철수 준비를 끝낸 3진 장병들은 12월 22일 앙골라를 떠나 이튿날 귀국했다. 이후 신체검사, 물자 정리, 위로 휴가 등 귀국 후 정리 기간을 거친 뒤 1997년 1월 25일 부대 해단식과 함께 임무를 종료했다. / 국방일보 서현우 기자

현지 주둔지 구축 완료 -이장호 앙골라 공병부대 1진 공보장교


주둔지 구축 임무 설영대 1제대 맡아 / 해발 1600m 우암보 약 6만㎡ 부지 / 평탄화·벌목작업 및 전기공사 등 진행
숙영시설·식당·심정 시설도 완성 / 먹고 자는 시간 외엔 작업에 쏟아

우리 공병부대가 1995년 10월 앙골라에 파병됐을 당시 유엔은 루사카평화협정에 따라 3단계 유엔 앙골라검증임무단(UNAVEM-Ⅲ)을 창설해 운영 중이었다. 루사카평화협정은 앙골라의 평화회복과 국가통합 활동을 지원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또 앙골라검증임무단은 이 같은 평화협정 이행을 감시하고 문제점을 조정하며 평화정착을 보장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앙골라를 여섯 지역으로 나눠 지역사령부를 뒀으며, 우리 공병부대는 지원부대로서 중부지역 우암보에 배치됐다.

앙골라 공병부대 1진 공보장교였던 이장호 예비역 중령(당시 대위)에게 아프리카는 이전까지 미지의 세계였다. 아프리카에 대해 알지 못했고 알아야 할 이유도 없었다. 현재 주어진 임무에 충실할 뿐이었다. 아프리카를 가는 일은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에는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아프리카에 관한 관심은 소말리아 상록수부대에 선배 장교가 파병을 떠나면서 시작됐다. 우리나라의 첫 유엔평화유지활동(PKO)을 수행한 소말리아 상록수부대를 통해 PKO를 알게 된 것. 이를 계기로 해외파병과 국제평화 활동에 뜻을 뒀고, 1995년 여름 앙골라 공병부대 1진에 지원해 공보장교로 선발됐다. 영어 특기 자원이었다.

1995년 10월 5일 앙골라 중부지역 카툼벨라 공항에 도착한 공병부대 1진 본대.

“파견을 준비하면서 가장 신경 쓴 부분은 앙골라에 대한 이해였습니다. 전투복에 태극기와 유엔 마크를 붙이고 평화유지활동을 위해 떠나는 것이었으니까요. 그 나라와 국민을 정확히 알고 이해해야 효과적이고 효율적인 평화재건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파병 전 주특기교육과 종합전술훈련을 비롯해 PKO 업무 관련 교육을 이수했다. 나아가 역사, 문화, 내전, 환경 등 여러 분야에 걸쳐 앙골라를 공부했다. 무엇보다 국가를 대표해 유엔 임무에 참여한다는 자부심과 그 의미를 귀국하는 날까지 매일같이 되새기고자 했다. 한국을 출발해 앙골라 수도 루안다에 도착하기까지는 꼬박 하루가 걸렸다. 루안다에서 다시 비행기를 갈아타고 중부지역 로비토로 향했다. 로비토는 유엔 각국 요원들이 일시적으로 체류할 수 있는 임시숙영시설이 마련된 도시였다. 이곳에서 이 대위는 곧장 설영대(設營隊) 1제대를 이끌었다. 설영대는 주둔지를 구축하는 부대. 선발대가 현지 협조 업무를 수행하면 본격적으로 주둔지를 건설하는 임무였다. 설영대는 3개 제대로 나눠 주둔지가 예정된 우암보로 떠났고, 이후 주둔지 필수시설이 완공되자 본대 역시 3개 제대로 구분해 전개했다.

“로비토에서 우암보까지 2박3일이 걸렸어요. 1제대는 불도저, 포크레인, 그레이더 등 중장비 10여 대를 수송했는데 도로 사정이 워낙 좋지 못해서 시속 30㎞도 내지 못했습니다. 현지 사정이 참 많이 열악했습니다.”

설영대는 주둔지에 도착한 지 한 달여 만에 병력·장비 주둔에 필수적인 시설을 지어냈다. 약 6만㎡(1만 8150평)의 부지는 계획에 따라 평탄화작업, 벌목작업, 방벽구축, 배수로공사, 전기공사 등이 진행됐고, 이어 숙영시설·식당·심정 등 시설도 완성됐다. 이후에는 본대 인원이 모두 전개했고, 부가적인 시설 구축을 모두 마친 뒤 1995년 12월 2일 준공식을 가졌다.

“신속하게 주둔지를 구축하기 위해 종일 뙤약볕에서 공사에 매진했습니다. 먹고 자는 시간 외에는 전부 작업에 쏟았지요. 나중에 본대 장병들이 와서는 깜짝 놀라더군요. 저를 비롯한 인원들의 피부가 새까맣게 변했거든요.”

우암보 주둔지 건설 초기 장병들을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물과 날씨였다. 관정을 개발하면서 물 부족 문제는 해결했지만, 날씨는 달랐다. 예측하지 못한 상황이 펼쳐졌다.

앙골라 공병부대 주둔지 전경.

“우암보는 해발 1600m 가까이 되는 고지대였어요. 한낮에는 기온이 섭씨 40도까지 올랐는데 밤에는 1도로 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낮과 밤의 기온 차가 너무 커서 적응에 시간이 꽤 걸렸습니다. 어느 정도 일교차는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까지 추울 것으로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어요.”

현지에서 처음 만난 주민들이 두꺼운 점퍼를 입고 털모자를 쓰고 있는 모습을 볼 때만 해도 그들의 복장이 도무지 이해되질 않았다. 하지만 그 이유를 알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난로와 온수 보일러처럼 방한 장비·용품을 챙기지 못한 점이 제일 아쉬웠다. 그 같은 아쉬움들은 모두 기록으로 남겨 다음 진이 출국하기 전에 전달하기도 했다.

“일교차가 크다 보니 감기에 걸리는 부대원이 종종 발생했습니다. 저 역시도 감기에 걸렸어요. 가족들에게 감기에 걸린 이야기를 편지에 적어 보냈는데 역시나 놀라더군요. 아프리카에서 무슨 감기냐면서. 놀랍기는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대는 부족한 부분을 채워가며 본격적인 임무를 시작했다. 직전의 우리나라 PKO 지역이었던 소말리아, 서부사하라와 또 다른 아프리카였지만, 아프리카 경험이 적다는 걱정은 기우일 정도로 완벽히 임무를 수행해갔다. 시행착오가 있었던 점도 사실이지만 이를 통해 2진과 3진, 그리고 또 다른 우리 파병부대가 더욱 완벽히 임무를 완수하는 밑거름이 됐다. / 국방일보 서현우 기자. 사진=군사편찬연구소 제공

 

초기 유엔 PKO 부대의 역할 -이장호 앙골라 공병부대 1진 공보장교


부대 운영부터 장비·물자 활용에 부대원 생활 모습까지 보고 듣고 기록
다양한 군사활동으로 국제협력 이어온 모습에서 장단점 배워 교훈삼아
말라리아 대비책 2진과 공유…위기·위협 이겨내며 강한 부대로 거듭나

우리나라는 1993년 소말리아 상록수부대를 시작으로 1994년 서부사하라 국군의료지원단과 1995년 앙골라 공병부대를 각각 해당 지역에 파견해 유엔 평화유지활동(PKO)에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유엔 PKO 활동 초기였던 당시 각 부대·부대원들은 열악하거나 위험한 상황을 극복하며 임무를 완수했다. 그중 앙골라 공병부대는 우리 군의 뛰어난 공병 능력을 선보이며 앙골라 국민에게는 실질적인 도움을 제공하고, 유엔 회원국에는 모범적인 사례를 남겼다.

앙골라 공병부대 1진 공보장교였던 이장호 예비역 중령(당시 대위)은 현지 타국 군과의 교류를 중요한 업무 중 하나로 생각했다. 우리나라가 유엔 PKO에 대한 경험이 많지 않은 시기였기에 경험이 풍부한 타국 군을 보고 장단점을 배워 교훈으로 삼고자 했다. 초기 유엔 PKO 참여 부대의 역할이라는 생각이었고, 우리 군의 우수성을 바탕으로 빠르게 역량을 키우고자 하는 마음이었다.

“잘하는 것은 배워 부대 운영에 적용하고, 못하는 것은 답습하지 않도록 주의하고자 했습니다. 또 1진 운영의 잘된 점은 물론 아쉬운 점과 시행착오를 기록하고 남겨 2진, 3진은 물론 우리 군의 유엔 PKO 활동이 더욱 발전적으로 이어지기를 바랐습니다.”

앙골라 공병부대 1진은 임무 기간 4개의 교량을 건설했다. 사진은 완공된 콴도교의 모습으로, 현지에서 획득한 자재와 파괴되지 않은 부분을 활용해 비용과 시간을 절약했다. 군사편찬연구소 제공

앙골라 공병부대는 유엔 앙골라검증임무단(UNAVEM-Ⅲ) 중부지역사령부 예하 부대로서 중부 도시 우암보에 주둔지를 꾸리고 인근 지역의 평화재건 활동을 펼쳤다. 같은 지역에는 우루과이 보병부대, 포르투갈 보급부대, 브라질 의무부대 등이 있었다. 각각의 보병, 공병, 보급, 의무의 네 개 부대가 하나의 다국적 사령부를 이뤘는데, 이들은 상호 협력하며 유기적인 관계를 이어가는 중이었다.

“특히 포르투갈 보급부대와 긴밀한 교류를 진행했어요. 그들의 유엔 PKO 경험에 대한 의견을 듣고 자료를 수집하면서 학습하기도 했습니다. 부대 운영뿐만 아니라 어떤 장비·물자를 어떻게 활용하는지, 부대원들의 생활은 무엇이 얼마나 다른지 등등 모든 면을 보려고 했지요. 배울 점은 배우고 또 노하우를 흡수해 유엔 PKO 선진국을 따라잡아야겠다는 노력이었습니다.”

당시 이 대위가 바라봤던 각국 부대는 모두 다른 모습이었다. 앙골라 현지에는 유엔 PKO를 위해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등 각 대륙에서 모인 수십여 국가 군대가 있었다. 부대를 운영하는 방식과 사용하는 장비·물자에는 크고 작은 차이가 존재했다. 각국 부대원들의 능력 수준과 임무를 대하는 자세도 모두 달랐다.

“그중에는 비효율적으로 업무를 처리하는 부대도 있었고, 심지어는 군인이 맞는지 싶을 만큼 군기 빠져 보이는 부대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래전부터 유엔 PKO에 참여해 온 나라의 군대는 달랐다. 그들은 더욱 효율적이었다. 빠르고 단순했으며 단결되고 조직적이었다. 스페인과 프랑스가 특히 그랬다.

“우루과이 보병부대를 보면서도 비슷한 점을 느꼈습니다. 간부와 병사 구분 없이 일체감이 강했어요. 두발과 복장부터 단정하고 단순했습니다. 장비도 경량화해 차량을 예로 들면 가속·감속 페달 빼고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이동도 간편하고 빨랐어요. 세계 각지에서 유엔 PKO 활동을 포함한 다양한 군사 활동으로 국제협력을 이어온 모습이 고스란히 나타났다고 생각합니다.”

실전 경험을 지속해서 익히며 작전 환경에 최적화한 군대로 발전한 것이었다. 언제 어떤 환경에서도 실전적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준비된 군대의 모습이었다. 1990년대 당시 우리나라 유엔 PKO 부대들의 성과는 단지 현지에서의 완벽한 임무 수행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타국 군과 협력하는 동시에 스스로 역량 향상에 힘을 쏟았고, 우리 군 유엔 PKO 발전의 소중한 주춧돌이 됐다.

앙골라 현지에서 공병부대원들의 임무 수행을 방해한 어려움 중 하나는 말라리아였다. 황열, 이질, 장티푸스 등 각종 풍토병을 대비했지만 아프리카 중남부 지역의 특성상 말라리아가 가장 큰 문제였다. 심하면 사망에 이를 수도 있었다. 출국 전 예방접종을 진행했지만 현지 사정은 또 달랐다.

“그래서 주둔지 방역 활동에 각별하게 힘썼고 취침 시에는 모기장을 활용했습니다. 하지만 일과 시간 교량 건설 작업에 집중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모기에 물리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어요. 예방약과 주사를 맞았음에도 말라리아에 걸리는 인원이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부대원들은 유엔임무단 사령부에서 제공하는 말라리아 예방약을 매주 한 차례 복용했다. 증상이 의심되는 환자는 신속하게 파악·검사하고, 심상치 않을 경우 지역사령부에서 의료 임무를 담당하는 브라질군 진료소에 외진을 의뢰했다.

“저 역시 현지에서 말라리아에 걸린 적이 있습니다. 앙골라 수도 루안다에 출장을 간 적 있는데 아마도 임무 수행 중 모기에 물렸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사흘 동안 고열로 고생했어요. 열흘 만에 완치됐는데 체중이 크게 줄었더군요. 정말 힘들었습니다.”

당시 1진 부대원 중에는 7명의 말라리아 환자가 발생했다. 임무 완수 후 귀국 전 전수검사를 통해서는 무증상 보균환자가 일부 나타나기도 했다. 이들은 치료약을 복용한 뒤 귀국했고, 귀국 이후에는 전 인원을 대상으로 대기 및 추가 검사를 진행했다.

“겪어보니 무서운 병이라는 것을 알게 됐어요. 말라리아 예방에 더욱 노력했고, 대비책과 노하우를 2진 부대원들에게 공유하면서 이후 말라리아에 걸리는 인원은 거의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 공병부대는 그렇게 위기와 위협을 하나씩 하나씩 이겨내고 극복해 나갔다. 그리고 더욱 강한 부대로 거듭났다. 지역의 안정과 국제평화에도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갔다. 서현우 기자

아프리카에 심은 한국의 문화 -이장호 앙골라 공병부대 1진 공보장교


재건업무 외에 평화구축 활동 전개 / 아동·청소년 대상 사랑의 학교 인기 / 지식·기술 전하고 점심식사도 제공 /
한국의 날 열린 단축 마라톤 대회엔 / 아이부터 어른까지 수백 명 참가

앙골라 공병부대는 교량복구, 도로보수, 심정개발 등 재건업무 외에도 현지 평화구축을 위한 활동을 전개했다. 사랑의 학교를 개설해 운영하거나 한국의 날 행사를 개최해 주민들의 큰 호응을 받으며 한국의 이미지와 인지도를 높였다.

아동·청소년을 대상으로 학습의 기회를 제공한 ‘사랑의 학교’에서는 사회생활에 필요한 문자 해독, 기초 산수·영어, 태권도 교육, 용접·배관 기술교육을 진행했는데 주민들의 반응이 호의적이었다. 1995년 10월 앙골라 우암보 현지에 전개해 기본 임무 수행이 안정 궤도에 이르자 이듬해 초 시작한 대민사업이었다. 체계적·효과적인 운영을 위해 정원을 60명으로 제한하고 입학시험을 치렀는데, 약 400여 명이 지원했다.

앙골라 공병부대가 운영한 사랑의 학교 수업 장면. 사랑의 학교에서는 지역 청소년을 대상으로 산수와 영어 등을 가르쳤다.

학교 운영을 위해 부대 위병소 인근에 임시 건물을 지었고, 과목별 전공·전문 지식을 갖춘 부대원들이 나서 수업을 진행했다. 일과 시간에는 본래 임무를 수행하는 가운데 그 외 자신의 시간을 할애해 교재를 준비하고 수업을 펼친 부대원들의 헌신이 사랑의 학교 운영의 든든한 배경이었다. 이에 대해 공병부대 1진 공병부대 공보장교였던 이장호 예비역 중령(당시 대위)은 사랑의 학교 운영이 한국군의 위상을 높이는 활동이었다고 설명한다.

“지식과 기술을 가르쳤고, 점심 식사도 제공했습니다. 또 학사운영위원회를 개최하고, 수료식·방학식과 우수학생 포상 등을 하면서 체계적인 운영이 되도록 했어요. 학생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전하고 싶었고, 학생들 역시 배움의 의지가 강했습니다. 당시 학생들이 배웠던 것들은 그들의 인생에 큰 도움이 됐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사랑의 학교 운영은 앙골라 평화구축 활동의 상징으로 지역 주민과 유엔 요원들의 찬사를 받았다. 대민지원도 마찬가지. 주둔지 인근 마을 지도자들과의 간담회에서 제기된 요청 사항을 적극적으로 반영해 주민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했다. 우암보 시내 정화 활동을 하고 주기적인 방역 지원에 나서며, 인도적 차원의 유엔 보급 재고물자 제공과 불우이웃돕기를 했다. 당시 앙골라에 파병된 국가 중 이 같은 활동을 펼친 나라는 우리뿐이었다. 앙골라 유엔 평화유지활동(PKO) 모범부대·사례가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한국의 날 행사도 우리나라를 알리는 의미 있는 행사였습니다.”

공병부대 1진은 1996년 2월 한국의 날 행사를 열었다. 우리 고유 명절인 설날을 맞아 지역 주민과 인접 파병부대를 초청해 화합의 장을 펼치며 우리 문화를 알리는 데 의미를 뒀다. 이를 위해 약 한 달여 동안 행사 계획, 전파, 의견수렴 등을 하며 꼼꼼히 준비했다.

이틀에 걸친 행사는 첫날 마라톤 대회로 시작해 이튿날 문화행사로 이어졌다. 우암보 시청 광장에서 널뛰기, 윷놀이, 제기차기 등 민속놀이를 소개했고, 태권도 시범과 특공무술 시범을 선보였다. 또 장병들의 보컬·댄스 공연 무대에는 우암보 수많은 주민이 운집했다. 특히 주둔지 연병장에서 우리 공병부대에 대한 유엔 메달 수여식이 열려 앙골라검증임무단(UNAVEM-Ⅲ) 군사령부와 지역사령부, 인접 부대 지휘관·참모 등이 대거 참석했다.

“그중 마라톤 대회는 행사의 핵심 프로그램 중 하나였습니다. 한국의 날을 기념해 지역 주민들과 친해질 계기를 만들기 위한 교류였어요. 우암보 시의 협조를 받아 시내 5㎞ 구간을 설정한 후 다 같이 달리자는 것이었는데, 아이부터 어른까지 수백 명 이상이 참가해 깜짝 놀랐습니다.”

소소한 기념품과 선물을 나눠주며 앙골라 주민들과 조금 더 가까워지고자 했다. 또 함께 어울릴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진정 평화를 사랑하고, 지역의 안정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음을 보여주고자 했다. 우리나라를 알리고 좋은 이미지를 심는 일도 놓치지 않으려는 의지였다.

“출국 전 한국관광공사 등 관계 기관의 도움으로 대한민국 홍보용 포스터 100여 장을 지원받아 들고 갔습니다. 우암보 곳곳에 부착해 한국을 알렸어요. 주민들이 포스터 속 우리나라 풍경·인물 사진을 보며 놀라워했던 모습이 생생합니다. 한국을 떠올렸을 때 발전된 나라, 아름다운 나라, 도움을 주는 친구 같은 나라 등의 이미지가 그려졌으면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이와 함께 당시 이 대위는 매주 두 차례 현지 라디오 방송에 고정 출연해 부대 활동상을 소개하기도 했다. 부대가 펼치고 있는 교량·도로 보수·건설의 진행 상황을 알리고, 대민지원 사업의 의미와 내용을 전달했다. 앙골라 국영 TV·라디오에서도 이 같은 공병부대의 활약을 보도하며 앙골라 평화재건에 힘쓰는 한국군의 헌신을 소개했다.

“이전까지 한국을 아는 앙골라 국민은 거의 없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공병부대의 진정성 있는 임무 수행과 대민지원을 보며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바뀌었습니다. 유엔 PKO로서 유엔 임무를 펼치는 역할 외에도 여러 부분에서 그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어 다행이었습니다.”

한국의 위상을 높이는 대민 행사와 지원은 2진과 3진에서도 고스란히 이어졌다. 공병부대 2진은 기존 사랑의 학교를 인계해 더욱 발전시켰고, 태권도학교를 새로 설치해 주민들의 심신단련과 우리 문화 홍보를 도모했다. 또 3진은 앞선 2진이 시작한 영농장 운영을 확장해, 주민을 대상으로 영농법 교육을 하기도 했다. / 국방일보 서현우 기자. 사진 제공·도움말=군사편찬연구소

임무를 대하는 공병중대장의 자세 - 강한승 예비역 대령 (앙골라 공병부대 1진 공병중대장)

 수인성 질병 위험에 주둔지 내 설치 / 인근 주민 누구나 이용할 수 있게 해 / 공사해야 할 교량 주변에 지뢰 많아 / 
복구작업 시 부대원 안전 특히 신경 써 / 출국 전 청와대 파병 신고 ‘자부심’
 

유엔 평화유지활동(PKO) 앙골라 공병부대의 주 임무는 교량 복구였다. 유엔이 우리나라에 파병을 요청한 이유였으며, 유엔의 앙골라 현지 재건 사업 중에서도 상당히 중요한 과업이었다. 이에 공병부대는 1995년 10월부터 1996년 12월까지 파병 기간 우암보 주변에 산재한 파손 교량 8개를 복구·건설했다.

앙골라 공병부대 1진 장병들이 1995년 11월 부대 위병소 인근에서 현지 정부 관계자 및 지역주민들과 함께 ‘희망의 샘’ 준공식을 하고 있다.

강한승 예비역 대령(당시 소령·진)은 앙골라 공병대대 1진 공병중대장으로 현지에 파견됐다. 파견 직전 공병대대 중대장으로 육군2군단에서 복무 중이던 그는 영어에 능통한 데다 건축을 전공하고 야전공병 폭파교관으로 활동한 이력이 있었다.

“어느 날 유격훈련을 마치고 부대에 복귀했는데 앙골라 PKO 파병 지시가 내려졌습니다. 아마도 1진이었기 때문에 자원이 아닌 차출이었던 것으로 생각하는데요. 사실 앙골라에 대해 아프리카 국가라는 것 빼고는 잘 몰랐습니다. 국가의 부름에 자랑스럽게 응했지만 처음에는 걱정이 됐던 것도 사실입니다.”

공병 임무에 대해서는 자신 있었지만, 유엔 PKO 임무는 처음이었다. 이 때문에 출국 전까지 교육훈련과 파병준비에 매진하며 유엔 PKO와 앙골라에 대해 알고자 했다. 주특기와 부특기는 물론 현지 생활에서 부대원들 서로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생활특기를 배우고 익혔다. 당시 강 소령(진)은 준비를 하면서 이 임무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됐다. 또 국가를 대표해 유엔 임무를 수행한다는 자부심도 들었다.

“청와대에서 대통령을 만나 파병 신고를 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이 임무가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한 번 알 수 있었고, 더욱 큰 자부심과 자신감을 가지게 됐습니다.”

◁ 심정호작업

강 소령(진)은 1995년 9월 1진 부대원들과 함께 출국 전 청와대 신고를 했다. 당시 김영삼 대통령은 부대원들에게 “지휘관을 중심으로 일치단결해 부여된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고 한국과 한국군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려 달라”고 당부했다.

그해 10월 강 소령(진)과 1진 부대원들은 앙골라 수도 루안다에 도착했다. 이후 몇 번의 이동과 대기를 거쳐 중부도시 우암보에 부대를 전개해 주둔지를 구축했다. 사무실·숙소와 경계방벽·고가초소 같은 필수시설 공사에 한 달여가 걸렸고, 편의·복지시설과 추가 경계시설 등 부가시설 공사에 다시 한 달여가 걸렸다. 그중 심정 개발은 부대 운영은 물론 지역 주민들에게도 큰 도움이 됐다.

“아무래도 물 확보가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물이 부족하기도 했지만, 상태가 좋지 않아 콜레라 같은 수인성 질병을 겪는 주민들이 많았어요. 주둔지 내에 심정을 개발한 뒤 위병소 인근으로 배관을 연결해 주민 누구나 이용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부대는 파병 전 현지 물 공급 사정이 열악하며 수인성 질병의 위험이 있다는 것을 알고 심정 개발을 위한 준비에 특히 신경 썼다. 현장에서는 시추기, 해머, 컴프레서 등 장비를 동원해 굴착·배관·세척 등의 공사를 펼쳤다. 약 열흘 만에 공사를 완료해 심정을 확보했다. 이로써 부대원들의 식수 문제를 해결하며 이후의 안정적인 임무 수행을 뒷받침했다. 아울러 위병소 인근에 식수 공급 장치를 설치하고, 이를 배관으로 심정에 연결해 주민들에게도 식수를 제공했다. 공병부대 활동 초기 지역 주민들이 부대의 노력을 알게 되는 결정적 계기였다.

본격적인 작업을 시작한 후로는 부대원들의 안전에 특히 신경 썼다. 주 임무는 교량 보수·건설. 내전으로 파괴되거나 무너진 다리를 복구하는 일이었다. 안전에 주의해야 했던 이유는 지뢰에 있었다. 전투가 벌어졌던 곳곳에 여전히 지뢰가 있었는데, 교량 주변에는 더욱 집중적으로 매설돼 있었다. 교량은 인원·장비·물자의 이동 경로 상 중요시설이기 때문이다.

“평화협정에 따라 정전 상태가 이어졌기에 무장세력의 위협은 없었습니다. 다만 공사해야 하는 다리 주변에 지뢰가 촘촘하게 매설·방치돼 있어서 위험했습니다. 지뢰 하나를 제거하고 나면 바로 옆에서 또 하나가 발견되는 식이었어요. 안전에 각별하게 신경 써야 했습니다.”

물자·장비 분실 위험도 부대를 괴롭히는 위협이었다. 간혹 일부 현지 주민들이 공병부대의 물건을 훔쳐 가려고 하는 바람에 이를 방어해야 했기 때문이다.

“부대 내에서는 분실 위험이 없었지만, 외부에서 공병작전에 집중하고 있을 때 몰래 다가와서 크고 작은 장비에 손을 댔습니다. 경제적으로 궁핍한 상황인 것은 이해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작은 장비 하나가 없어서 전체 작전이 차질을 빚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주변에 지뢰가 많아 자칫 그들의 생명을 앗아갈 수도 있었어요.”

이 같은 상황을 막기 위해 부대는 작업 공간 주변에 울타리를 설치하기도 했다. 불량한 생각을 품은 일부 주민의 접근을 차단해 부대의 물자·장비를 지키는 동시에 그들을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물론 지역 주민 대부분은 공병부대 작전이 삶의 터전을 재건하는 헌신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고, 부대원들을 고마움으로 대했다. 낯선 땅에서의 작전은 예상치 못한 일들의 연속이었지만 차츰 안정을 찾아가며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공사는 순조로웠으며 다리는 조금씩 완성돼 갔다. 

/ 국방일보 서현우기자 / 사진·도움말=군사편찬연구소

 

평화가 오는 것이 보인다 -강한승 예비역 대령 (앙골라 공병부대 1진 공병중대장)


강 많은 주둔지 우암보 인근 주민들 / 다리 파괴돼 5분 거리 2시간 돌아가 / 가장 규모 큰 쿠이마교 공사 등 / 1·2진 각각 4개 교량 하자 없이 복구 / 지역 신문서 한국군 활동 특집 다뤄 / 부대 활약 소식 앙골라 전 지역 퍼져

앙골라 공병부대는 유엔 앙골라검증임무단(UNAVEM-Ⅲ)이 추진하는 평화유지활동(PKO) 재건사업의 주력부대였다. 우수한 공병 능력을 바탕으로 신속·정확하게 교량을 복구, 도로·공항 건설, 심정 개발 등을 진행했다. 유엔임무단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이끌어 내며 타국 군에 모범사례가 됐고, 임무완수 후 귀국 시에는 앙골라 주민에게서 큰 환송을 받았다.

공병부대가 주둔했던 우암보 인근에는 강이 많았다. 고지대였지만 산악지형은 아니었으며 크고 작은 강이 곳곳에 있었다. 열악한 수준의 교량이 놓여 있었으나, 그마저도 내전으로 부서지고 파괴됐다. 유엔 임무를 수행하는 각국 부대는 작전의 어려움을 겪어야 했고, 주민들의 일상에도 불편함이 존재했다. 강한승 예비역 대령(당시 소령·진)은 당시 공병중대장으로서 교량 보수·건설에 대한 막중한 책임감을 느꼈다.

1996년 2월 앙골라 공병부대가 복구 완료한 쿠이마교 전경. 당시 현지 유엔임무단이 수행한 교량 복구 공사 중 가장 큰 규모였다.

“다리가 있다면 5분 이내 갈 수 있는 거리인데, 다리가 파괴돼 주민들은 두 시간을 돌아서 강 건너 지역으로 가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주변 도로 상태도 좋지 못했어요. 이 때문에 도로·교량 건설은 유엔군에게도 또 지역주민들에게도 매우 중요하면서 크게 도움을 줬던 성과였습니다.”

공병부대는 1진과 2진이 각각 4개의 교량을 복구했다. 상대적으로 파견 기간이 짧았던 3진은 부대 전개와 함께 철수준비 명령을 받으며 교량 복구 임무를 부여받지 못했다. 대신 도로와 비행장 등 주요 시설에 대한 보수·건설 작전을 수행했다. 우리 공병부대의 활약 소식은 작전지역인 우암보에서 앙골라 전 지역으로 퍼져나갔다. 목표 기한 내 공사 완성은 물론 작업 소요기간을 크게 줄였다. 그러면서도 불량 하나 없이 단단하고 튼튼한 교량을 지어냈다.

“유엔임무단으로부터 타국 군 공병부대가 처리하지 못하는 임무를 받기도 했습니다. 기술력의 차이가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공병부대의 우수함을 인정받은 것이었지요.”

1995년 11월 말께부터 약 40일간 진행한 쿠이마교 복구가 대표적이다. 쿠이마교는 우암보 남방 약 97㎞ 지점에서 주요 도로를 잇는 중요한 다리였다. 기존 교량은 내전으로 완전히 파괴됐고 임시 목교가 대신하고 있었는데, 임시 목교로는 작전 수행에 어려움이 있어 기존 교량의 복구가 시급했다. 하지만 주변 다른 교량들보다 길이가 훨씬 길고, 교절 대부분이 파괴된 상태라 작업에 난관이 있었다. 복구작업은 애초 인도 공병부대가 맡기로 돼 있었다. 그러나 유엔임무단은 전략적 요충지라는 점과 전문기술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우리 공병부대에 이 작전을 부여하고 인도 군에는 소규모 과업을 하달했다.

“우리 공병부대를 보면서 다들 놀라워했습니다. 우리가 한 달여 만에 끝낸 공사를 타국 군은 두 달이 지나도록 완성하지 못했으니까요. 그런데 하자 없이 튼튼하기까지 하니 상당한 비교가 됐어요. 부대의 교량 복구 성과들은 주민들에게 도움이 됐을 뿐만 아니라 한국군의 우수성을 알리는 역할도 했습니다.”

쿠이마교 공사는 계획보다 일찍 마무리됐다. 장간조립교 형태로 총 길이 118m, 통과 하중 40톤이었다. 특히 당시 앙골라에서 각국 공병부대가 복구한 교량 중 가장 큰 규모의 공사로 기록됐다. 준공식에는 유엔임무단 사령관을 비롯해 현지 주재 국제기구 관계자들, 지역주민 수백 명이 참석했고, 앙골라 국영 TV·라디오에서 취재·보도했다.

쿠이마교 교각을 보강 중인 우리 공병부대 장병들.

“세 번째 교량의 복구를 완료했을 때에는 지역신문에 ‘평화가 오는 것이 보인다’는 제목으로 기사가 크게 실렸습니다. 우리 군의 재건 활동을 특집으로 다룬 것이었어요. 정말 뿌듯했습니다. 재건을 통한 평화와 안정이 바로 우리가 아프리카 땅에서 땀 흘리는 이유였으니까요.”

단지 기술력만의 차이는 아니었다. 작전에 임하는 태도와 자세도 달랐다. 위험하고 열악한 현지 사정에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를 일이었다. 필요한 자재·물자도 제대로 확보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수차례에 걸쳐 공사를 사전 계산·계획하고 전체적인 그림을 그리며 예측한다지만, 작은 상황이 바뀌면 모든 게 틀어지기도 합니다. 자재 확보가 쉽지 않은데 작업지 주변 곳곳에 지뢰가 매설돼 있어 이에 대한 대비도 해야 했습니다. 다양한 상황에 대처하고 위기를 극복하는 능력도 필요했습니다.”

공병부대는 교량 복구 외에도 다양한 공병 작전을 수행했다. 1진은 우암보 공항 보수에 나서 활주로, 배수로, 유도로, 진입로, 주기장 등 시설의 원활한 사용을 가능케 했다. 또 우암보 시내 도로 보수도 진행하며 주민 편의를 높였다. 특히 우암보 시민과 합동 공사를 추진해 양국의 우호 증진에도 힘썼다. 2·3진 부대 역시 도로포장을 비롯해 보건소, 통신소, 학교 등의 시설 공사를 완수하는 성과를 올렸다. / 국방일보 서현우 기자. 사진 제공·도움말=군사편찬연구소

D-60, 파병을 준비하라-천영택 예비역 대령 (앙골라 공병부대 1진 대대장)

 
유엔이 요청한 지뢰 제거 부대 대신 재건 작전 펼칠 공병부대 파견 합의
물자·장비 컨테이너 40개 분량 준비... 촉박한 일정에도 교육·훈련·예방접종
시행착오 기록 일지 책자로 묶어 발간
1995년 8월 부산항으로 수송을 마치고 선적 중인 앙골라 공병부대 차량·장비들.

유엔 평화유지활동(PKO) 앙골라 공병부대의 파병은 신속하게 추진됐다. 시작은 1995년 2월 유엔 PKO 사무국이 우리 정부에 한국군 파병 참여 의사를 타진한 것이었다. 이후 같은 해 7월까지 국방부를 중심으로 초기검토, 현지 조사, 관계부처 협의 등을 거쳤고, 대통령 재가와 국회 동의를 얻어 최종적으로 이뤄졌다. 부대창설은 8월 7일이었고, 본대 출국일은 10월 4일이었으니 부대가 실제 파병 준비에 쏟은 기간은 두 달이 채 되질 않았다.

“시간이 많지 않았습니다. 7월 중순께 대대장에 선발되고 8월 7일 부대가 창설됐어요. 출국까지는 두 달 남짓 남았는데 준비 업무는 산더미 같았지요. 그렇다고 대충 할 수 없었고, 더욱 강한 집중력과 굳건한 의지로 완벽하게 마쳤습니다.”

당시 앙골라 공병부대 1진 대대장이었던 천영택 예비역 대령(당시 중령)은 파병 준비에서의 아쉬움이 남아 있다. 시간이 조금 더 주어졌더라면 더욱 완벽한 파병이 이뤄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군은 이전까지 소말리아와 서부사하라 등 두 번의 유엔 PKO를 통해 북부 아프리카 경험을 쌓았지만, 중부지역은 처음이었다. 기후, 환경, 지형이 모두 달라 그에 맞는 전략적 준비와 작전이 필요했다.

“같은 아프리카라고 해도 지역마다 차이가 존재합니다. 사막 지형이 있고 밀림·정글 같은 지형도 있으며, 산악 지형이나 해안 지형도 있으니까요. 파병지에 따라 공병 작전 방식이 달라질 수 있어 물자·장비·자재부터 신경 써야 했습니다. 풍토병에 대비한 예방접종도 마찬가지였고요.”

당시 천 중령은 본대 파병 전 두 번에 걸쳐 앙골라 현지를 다녀왔다. 첫 번째는 한미연합사 공병 축성과장이었던 1995년 4월 합동 현지조사단으로서 국방부·외무부(당시) 관계자들과 떠난 것이었고, 두 번째는 같은 해 8월 1진 대대장 선발자로서 현지협조단 임무를 위해서였다.

현지조사단은 PKO 부대 파병 여부를 검토하기 위해 실사하는 데 주목적이 있었고, 현지협조단은 파병 결정 이후 부대 주둔 지역과 임무 등을 구체적으로 검토하는 일을 주로 했다.

현지에서의 조사 결과는 예상보다 심각했다. 유엔이 요구한 우리 군 전개 희망지역인 앙골라 중부는 내전이 치열하게 진행된 곳으로 격전지마다 수많은 지뢰가 매설돼 있었다. 또 유엔은 처음 지뢰 제거 부대 파병을 요청하면서 우리 정부와 이견을 보이기도 했다. 이후 우리 정부는 공병부대를 파견해 교량복구 중심의 재건 작전을 펼칠 것 등을 유엔과 협의·결정했다.

“신문·방송 보도 등을 통해 위험지역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가족들의 반대도 있었습니다. 아내와 딸이 울면서 말리더라고요. 하지만 군인으로서 사명감을 먼저 생각했습니다. 가족을 설득했지요. 6·25전쟁 때 각국 유엔군이 우리나라를 도왔기에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었듯, 고통과 아픔을 겪는 아프리카에 이제는 우리가 도움을 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8월 7일 부대 창설식과 함께 198명의 파병 인원이 온전하게 집결해 본격적인 파병 준비에 돌입했다. 본대 출국일은 10월 4일이었지만, 부대가 현지에서 사용할 물자·장비는 그보다 앞서 8월 말께 부산항에서 먼저 출발해야 했다. 천 중령을 포함한 부대원들의 마음은 다급했다.

“사전 현지 조사와 협조 임무를 수행했지만, 부대 창설 이후 주어진 시간이 많이 부족했어요. 각 부대에서 각종 공병 물자·장비를 받아 기술검사를 진행했고, 결과에 따라 정비와 부품 교체를 해야 했습니다. 또 도색을 통해 유엔 표식을 넣어야 했어요. 아울러 임무 기간과 범위를 고려해 필요 수량을 측정한 뒤 소모품과 자재를 구매했고요. 2~3주 내 이 작업을 우선 마무리해야만 했습니다.”

선박에 선적된 물자·장비는 컨테이너 40개 분량이었다. 20종이 넘는 특수 장비와 자재, 차량, 통신·화학·일반물자, 유류·탄약, 비품·소모품, 의약품 등이 포함됐다. 준비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각 부대에서 모인 부대원들에게 앙골라 현지 상황과 임무에 맞는 교육·훈련을 해야 했고, 이들의 단결과 협동을 강화해야 했다. 풍토병 예방접종도 마찬가지였다.

“예방접종에는 간섭 기간이 있어서 한 번 접종하면 일정 시간이 지나야 새로운 접종을 할 수 있고 또 접종마다 정해진 시기가 있는데요. 진행해야 할 접종이 말라리아, 황열, 장티푸스 등 10가지는 족히 됐습니다. 이를 겨우 맞출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 중령 이하 부대원들은 금세 단결했다. 낯선 이국땅에서 임무를 함께 수행한다는 동질감과 평화를 위한 유엔 임무를 수행한다는 자부심이 그들을 하나로 만들었다. 그리하여 하나 된 마음은 부족한 시간을 메우는 힘이 됐다. 순탄치 않았던 준비와 시행착오를 거쳐 부대는 10월 5일 앙골라에 도착했다. 이어 중부지역 우암보로 전개해 주둔지를 구축했고 빠르게 현지 적응했다. 그들의 준비는 완벽했다.

“완벽했다고 이야기 듣지만, 지휘관으로서 아쉬움이 큽니다. 참고할 만한 자료나 기록이 없었기에 더욱 그랬던 것 같습니다. 앙골라에 오는 그다음 부대, 또 훗날 각지로 떠날 또 다른 파병부대들은 저희 같은 시행착오를 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어요.”

1진 부대원들이 합심해 책자를 만든 것도 같은 이유다. 부대 파병을 준비하면서 잘된 점은 물론 부족했던 부분과 시행착오를 기록한 일지는 많은 시간이 지나 800쪽 분량의 책자로 남겨졌다. 그 중 절반은 파병을 준비하면서 경험한 일들이었다.

“성과도 중요하지만, 교훈을 함께 주고 싶었습니다. 시행착오를 숨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각해 발전하는 모습으로 이어지기를 희망했습니다. 그것이 초기 PKO 부대의 역할이기도 하니까요.” / 국방일보 서현우 기자. 사진 제공·도움말=군사편찬연구소

 

그들의 마음을 열다 - 천영택 예비역 대령 (앙골라 공병부대 1진 대대장)


내전 멈췄지만 지역사회 도움 필요 / 부족장 만나 유엔 임무·역할 설명 / 재건 적극 돕겠다고 하자 눈시울 붉혀
내전 당시 우암보는 반군 세력 거점 / 반군 지도자와 긴 시간 대화 마음 열어
‘사랑의 학교’ 태권도 가르치고 직업교육 / 체계적 학사운영…우호적 관계 유지
앙골라 공병부대가 운영한 ‘사랑의 학교’의 수료식 모습.

1995~1996년 아프리카 앙골라에서 유엔 평화유지활동(PKO)을 펼친 우리 공병부대는 단 한 건의 사건·사고 없이 주어진 임무를 완수했다. 내전을 치른 양측 세력의 평화 협정에 따라 전투는 멈췄지만, 그렇다고 갈등까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자칫 평화 재건을 수행하는 우리 공병부대에 우려스러운 일이 벌어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공병부대 지휘관·참모 이하 부대원 모두는 이를 잘 알고 끝까지 긴장을 놓지 않았다.

공병부대 1진 대대장 천영택 예비역 대령(당시 중령)이 당시 주둔지를 구축하고 제일 먼저 한 일은 지역 주민 대표와의 만남이었다. 지역사회와 관계 구축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앞으로의 부대 운영과 작전 수행이 달라질 것이었다. 귀국하는 날까지 긴장과 집중을 늦추지 않겠지만, 더욱 효율적·효과적으로 임무를 수행하려면 지역사회의 도움 역시 필요했다.

“가장 영향력 있는 지도자가 누구인지 파악했고, 마을 부족장이라는 사실에 바로 찾아 만났습니다.”

당시 천 중령은 부족장에게 유엔의 임무와 한국군의 역할을 설명했다. 또 지역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도움을 주면 좋을지 상의했다. 주 임무였던 교량 복구를 이어가면서 부대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도움을 주려는 의지였다. 아울러 우호적인 관계를 생성하려는 방안이었다. 부족장은 대한민국이 자신들처럼 전쟁을 겪었다는 이야기에 공감했고, 전후 복구 경험을 살려 적극적으로 돕겠다는 뜻에 감동했다.

“부족장은 방역 활동과 심정 개발부터 지역에 필요한 사안을 하나하나 이야기했습니다. 이에 요청사항 중 가능한 것을 추린 뒤 이를 다시 단기·중기·장기의 기간 기준으로 구분해 분류했습니다. 그러고는 부족장에게 의견을 전했고 도움을 약속했습니다.”

부족장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부족장은 포르투갈의 식민 통치와 이후 유엔군의 주둔을 겪으면서 이런 따뜻한 대우를 받아본 적이 없었다고 했다. 지역 주민에게 먼저 다가가 그들에게 진정 어린 도움을 주려는 공병부대의 마음이 전해지는 순간이었다.

‘희망의 샘’ 설치도 이 같은 흐름에서 이어졌다. 천 중령은 주둔지 구축 초기 부대원들이 영내 심정을 개발하자 이를 위병소 인근으로 배관 연결토록 했다. 지역 주민 누구나 깨끗한 물을 마실 수 있도록 한 조치였다. 군의관이 가져간 장비를 통해 음용 가능하다는 결과도 얻었다.

물론 심정 개발은 우리 장병들에게도 필요했다. 현지 유엔임무단에서 보급하는 생수는 그 수량에 한계가 있었고, 현지의 물은 뿌연 회백색으로 음용이 어려운 상태였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가 사용할 심정을 주민들도 함께 쓸 수 있도록 했던 것인데 위병소 인근으로 연결한 심정은 주민들의 큰 사랑을 받았다.

“공병부대가 앙골라에 온 목적은 평화와 재건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자 했습니다. 앙골라 주민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그곳에 간 것이었습니다. 심정을 그들과 함께 나누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 같은 초기 지역사회와의 우호적인 관계 설정으로 이후 원활한 활동이 가능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반군 세력의 협조를 구하는 일도 중요한 과제였다. 공병부대의 임무는 내전으로 파괴된 교량을 복구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교량이 도로와 도로, 지역과 지역을 잇는 중요한 요충지라는 점에서 양측 무장세력은 내전 당시 교량 일대에 많은 지뢰를 매설했다. 또 평화 협정 이후에도 그대로 방치해 공병 작전에 어려움을 주기도 했다.

안전한 작전 환경을 위해 무장세력과의 우호적인 관계 유지는 중요했다. 공병부대의 활동 범위인 우암보는 반군 세력의 거점이었다. 반군 세력의 동의를 구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지뢰를 제거하고 교량을 복구해도 무의미한 일이 될 수도 있었다. 유엔 평화 협정을 무시하고 지뢰를 다시 매설하거나 공병부대에 악의적인 위협을 가할지, 누구도 모를 일이었다. 더불어 그들을 평화의 땅으로 이끄는 일 역시 유엔 임무 부대의 중요한 과제이기도 했다.

“그래서 반군 세력 지도자를 직접 만났습니다. 처음에는 극도로 경계하며 거부감을 보였지만, 우리의 뜻을 듣고 또 오랜 시간 서로 대화하면서 서서히 마음을 열기 시작했습니다. 유엔 PKO 평화재건 활동에 공감하고 동의했으며, 우리 공병부대에 대한 협조를 약속받았습니다.”

진정한 자세로 지역 주민과 반군 세력의 마음을 사로잡은 계기였다.

“이전까지는 우리 부대원들이 지역을 이동하다가 마주치기라도 하면 총부터 꺼내 들었는데, 이후에는 그런 일이 점차 사라졌습니다. 그와 같은 우호적인 관계가 유지되도록 꾸준히 노력했습니다.”

사랑의 학교 운영이 대표적이었다. 지역 주민을 대상으로 언어, 산수, 태권도 등을 가르쳤다. 또 직업교육의 하나로 용접, 배관, 전기 분야에 대해 교육했다. 체계적인 지원이 될 수 있도록 학사 운영을 철저히 했고, 티셔츠 형태의 교복을 제공했으며 수료식에서는 성적 우수자에게 상을 주며 동기를 부여했다. 사랑의 학교는 공병부대 2진과 3진으로 이어져 더욱 체계화했다. 3진 철수 시기에는 사랑의 학교를 영내에서 외부 마을회관으로 이전하고 ‘소망의 학교’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재탄생시켜 지역 학생들이 계속해서 학업에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 국방일보 서현우 기자. 사진 제공·도움말=군사편찬연구소

평화와 우호의 상징 ‘한승 브릿지’ - 천영택 예비역 대령 (앙골라 공병부대 1진 대대장)


미확인 지뢰 많아 안전 특히 주의 / 기존 교각 보수 활용·임시 목교 철거 / 유속 빨라 정지작업에 어려움 겪어
보름 만에 완성…뛰어난 기술력 확인 

지역 책임자 만나 우리 군 뜻 전하고 / 부대 대표해 중대장 이름 넣자고 제안 / 흔쾌히 허락…첫 복구 교량 의미 더해

1995년 11월 앙골라 공병부대 장병들이 내전으로 파괴된 치피파교를 복구하고 있다.

1995년 10월부터 이듬해 12월까지 총 3진에 걸친 앙골라 공병부대의 유엔 평화유지활동(PKO)으로 현지에는 8개의 교량이 복구됐다. 또 공항, 학교, 도로 등 주요 시설에 대한 공병 작전을 통해 내전으로 파괴된 도시가 빠르게 안정을 되찾았다. 아울러 다양하고 지속적인 대민 지원 활동은 감동과 신뢰를 만들었다. 공병부대는 현지 주민들에게 친구 같은 존재였다.

앙골라 공병부대 1진이 첫 번째로 복구한 교량은 1995년 12월 2일 준공식을 가진 치피파(Chipipa)교였다. 주둔지였던 우암보에서 북쪽으로 약 40㎞에 위치해 중·서부지역 도로를 연결하고, 아래로는 카론쿠에(Caronque) 강이 흐르고 있다. 다리는 우암보 일대를 점령한 반군이 동부지역으로 철수할 때 파괴돼 방치되고 있었다.

천영택 예비역 대령(당시 중령)은 당시 공병부대장으로서 치피파교 복구를 주도했다. 앙골라 전개 후 첫 번째 교량 복구였던 만큼 안전사항이나 진행 상황을 꼼꼼하게 챙겼다. 사전 현지 정찰을 통해 교량의 제원을 측량하고 협조 회의를 이어가며 안전대책, 공사계획, 복구계획을 세웠다.

“생각보다 훨씬 상황이 좋지 않았어요. 안전이 가장 큰 걱정이었어요. 주변 미확인 지뢰 지대에 철조망을 설치하고 출입금지 표지를 부착했습니다. 교량 폭파와 철거도 필요했기에 각별히 신경 썼고요. 처음부터 어려운 상대를 만난 것이었지요.”

공법도 문제였다. 공사는 교량 초입의 취약성을 고려해 이 부분을 연장하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기존 교각을 보수해 활용하되 잔해는 파괴하고 임시 목교는 철거했다. 아울러 교량 복구와 동시에 도로보수 작업을 하기로 했다. 공사는 약 보름간 진행됐다. 약 100명의 장병이 참여했으며 장갑차, 굴착기, 지게차, 유압크레인, 발전기, 유조차, 급수차, 트럭 약 20대 등이 투입됐다.

“교량이 길어지면 통과 하중이 낮아지기에 교각을 설치해야 하는데, 콘크리트 교각을 세우려니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는 게 문제였어요. 우기라 강물도 꽤 불어나 있었고요. 그래서 조립교 형태의 교각을 만드는데 이번에는 강물의 빠른 유속이 걸림돌이었습니다. 정지 작업에 어려움이 제일 컸습니다.”

힘든 작업이었다. 첫 과제였기에 부담도 컸다. 하지만 부대는 차근차근 공사를 이어갔다. 하나하나 어려움을 헤쳐나갔다. 교량은 공정 일정에 따라 복구를 마쳤다. 최대 하중 55톤, 길이 54m의 조립교로 완성된 다리는 약 13㎞의 우회도로 이동 시간을 크게 단축하며 앙골라 서해안 도시를 빠르게 연결했다.

“현지 유엔임무단 관계자들이 깜짝 놀랐던 게 기억납니다. 위험한 여건에서 그렇게 빨리 그것도 아주 깔끔하게 교량을 복구한 것을 보며 혀를 내둘렀어요. 첫 과업인 만큼 우리 군 공병기술의 우수성을 보여주려고 노력했는데 결과가 좋아서 뿌듯했습니다. 그 교량을 절대 잊지 못해요.”

당시 천 중령은 부대원들의 고생이 안쓰러웠다. 열악한 조건을 극복하며 최선을 다해줬던 부대원들이 고마웠다. 그중 공사를 주도했던 공병중대장의 노고를 다른 이들과 함께 기억하고 싶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교량 명칭이었다. 다리 이름에 공병중대장의 이름을 넣고자 했던 것. 지역 책임자를 만나 이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그간의 우리 군의 노력을 설명하고 양국의 우호 증진을 위한 좋은 기회라는 점을 강조했다.

“우리나라도 리빙스턴교처럼 6·25전쟁 당시 파괴된 다리를 복구한 미군 공병의 이름을 따서 명칭을 부여했잖습니까? 앙골라 주민들이 우리 부대를 또 우리나라를 오래도록 기억해 주길 바라는 마음이었습니다.”

리빙스턴교는 미 10군단 소속 리빙스턴 소위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1951년 6월 인제지구전투에 참가한 리빙스턴 소위와 부대원들은 작전상 후퇴하던 중 인제군 북부를 동서로 가르는 인북천을 만났다.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면서 강물이 범람했고, 부대원 대부분이 도하 중 거센 물살과 총탄 세례에 전사했다. 리빙스턴 소위 역시 이때 전사했는데, 임종 직전 “이곳에 다리가 있었다면 많은 희생이 없었을 것”이라며 고국의 가족에게 “사재를 내어서라도 교량을 지어달라”고 유언했다. 휴전 후 1957년 12월 그의 가족은 이곳에 다리를 준공했고, 리빙스턴교로 불리게 됐다.

“작업을 진행하면서 공병중대장이 고생을 참 많이 했습니다. 부대를 대표해 중대장 이름을 따서 교량을 명명하자는 의견을 전했는데 현지 책임자가 흔쾌히 허락했어요. 너무나도 적극적으로 동의했습니다. 우리의 뜻을 이해하고 나아가 첫 복구 교량이라는 의미를 더한 것이었지요.”

그래서 붙여진 교량명은 ‘한승 브릿지(Bridge)’. 한승은 당시 부대 공병중대장이었던 강한승 대위(현재 예비역 대령) 이름이다. 알루미늄으로 표지석도 만들어 복구 배경과 공사 기간·방법 등 교량 복구에 관한 설명도 달았다. 또 이 다리가 앞으로 앙골라의 평화와 번영이 싹트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며 양국 우호 증진을 기원했다.

“앙골라 공병부대원들은 열악한 상황에 맞서 일치단결해 어려움을 극복해 나갔습니다. 놀라운 성과를 이뤄내며 아프리카 땅에 한국의 우수함을 심었습니다. 그리고 그 씨앗은 그곳에서 싹을 틔우고 끈기 있게 자라 묵묵히 우리나라의 위상을 높이고 있다고 여전히 믿고 있습니다.” / 국방일보 서현우 기자/사진 제공·도움말=군사편찬연구소

 

앙골라 공병부대의 철수와 귀국


파병 때처럼 철수도 신속하게 이뤄져 / 19일간 15차례 걸쳐 장비·물자 이동
우암보 주 정부 군 주둔지 활용 희망 / 교육센터로 쓸 수 있게 그대로 기증
수송선 있는 로비토로 이동 선적 / 수도 루안다서 전세기편으로 귀국

1996년 12월 23일, 아프리카 앙골라에서 유엔 평화유지활동(PKO) 임무를 완수하고 철수한 앙골라 공병부대 3진 장병들이 서울공항을 통해 귀국하고 있다. 국방일보 DB

유엔 평화유지활동(PKO)을 완벽히 수행한 앙골라 공병부대는 3진 부대원들이 1996년 12월 23일 귀국해 이듬해 1월 25일 해단하며 임무가 종료됐다. 약 1년 3개월의 파병 기간 공병부대는 앙골라 재건과 평화 구축에 기여하고 타국 유엔군의 모범 사례가 됐으며, 대한민국의 위상을 높이는 데 앞장섰다.

앙골라 공병부대 철수는 처음 파병 때와 마찬가지로 신속하게 이뤄졌다. 배경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현지 임무단 규모 감축 결정이었다. 1996년 3월 기준 앙골라 유엔임무단은 7000명이 넘는 각국 병력을 운영하며 연간 3억4000만 달러의 예산을 사용하는 대형 프로젝트였다. 그때의 환율을 적용하면 우리 돈 약 2700억 원에 이른다. 당시 재정적 어려움을 겪고 있던 유엔은 앙골라 평화협정 단계별 이행안을 앞당겨 실행하는 동시에 각국 파견 병력을 감축하기로 했다. 1996년 10월 채택된 유엔 안보리 결의안에는 이 같은 내용이 담겼으며, 우리 공병부대는 우크라이나, 브라질, 루마니아군과 함께 우선 감축 대상 부대로 결정됐다. 공병부대 철수가 본격화하는 시점이었다.

공병부대 3진은 11월 28일부터 물자·장비의 철수를 위한 이동을 개시했다. 경로는 우암보 주둔지를 출발해 앙골라 서해안 추진기지가 있는 로비토를 도착지로 했다. 중간 지점에는 휴게 기지를 운영했다. 각 기지에는 통신망을 개통하고, 통신·통역·정비 인력을 배치했다. 장비·물자 이동은 12월 16일까지 15차례에 걸쳐 이뤄졌으며, 68개의 컨테이너를 수송했다. 일부 물자·장비는 우암보 주 정부에 기증했다. 특히 공병부대 주둔지는 교육 센터로 활용하기를 희망하는 우암보 주 정부 요청에 따라 훼손 없이 그대로 기증했다.

부대원들은 12월 16일 먼저 우암보에서 로비토로 일제히 이동했다. 로비토에는 물자·장비를 수송하는 수송선이, 수도 루안다에는 병력을 태울 항공기가 있었다. 로비토에 도착한 부대원들은 앞서 이동을 마친 부대 물자·장비를 수송선에 선적하며 본국으로의 철수를 준비했다. 22일에는 로비토에서 루안다로 다시 이동했고 전세기편으로 귀국 길에 올랐다. 서울공항에 도착한 때는 23일 오후. 부대원들은 이튿날부터 귀국 후 정리를 했고, 26일 귀국 신고식을 진행했다. 모든 정리를 마친 부대원들은 1997년 1월 25일 해단식을 갖고 모든 임무를 종료했다.

공병부대는 파병을 통해 무엇보다 내전으로 파괴된 앙골라의 재건을 도왔다. 총 8개의 교량을 복구했으며, 비행장 보수공사를 진행해 앙골라 내 항공 이동을 정상화했다. 교량들은 모두 최소 40톤 이상의 통과 하중으로 건설해 차량 통행에 지장이 없도록 했다. 복구건설에서는 조립교 자재를 효율적으로 활용했다. 또 공사지 주변에 산재한 지뢰를 제거하며 안전한 공사가 되도록 했다. 아울러 주둔지 우암보 시내·외 주요 도로를 보수하고 시청, 방송국, 보건소, 통신소 등의 복구를 지원하며 인프라 구축에 힘썼다.

당시 앙골라 현지 유엔임무단을 이끌었던 알리운 블롱댕 베예(Alioune Blondin Beye) 유엔사무총장특별대표(유엔특사)는 1996년 12월 공병부대 3진 철수 직전 열린 한국의 날 행사에 참석해 감사 인사를 남기기도 했다.

“한국 부대는 이번 PKO 활동 중 전쟁으로 폐허가 된 8개의 다리를 보수하는 한편 공항을 보수하고 우암보시에서 여러 대민지원 활동을 펼쳐 왔습니다. 대민 활동을 통해 우암보 주민들에게 많은 편의를 제공했으며, 믿을 수 있는 임무 수행으로 앙골라 시민에게 희망을 심어주는 데에도 크게 이바지하였습니다.”

공병부대는 앙골라의 재건뿐만 아니라 주민들의 가슴에 희망을 심는 데에도 적극적으로 노력했다. 사랑의 학교가 대표적이었다. 지역 어린이·청소년을 대상으로 운영한 사랑의 학교는 포르투갈어, 영어, 산수 등을 가르치며 아이들이 나은 삶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부분을 채웠다. 사랑의 학교는 2진, 3진으로 이어지며 체계화했고, 공병부대 철수 이후에도 자체적으로 운영되도록 했다.

이와 함께 한국의 날 행사와 태권도 교육은 우리나라의 문화를 앙골라에 소개하고 알리는 역할을 했다. 태권도는 사랑의 학교 수업 과목으로 정해 교육했다. 내전으로 상처를 입은 아이들은 태권도 교육을 통해 조금씩 신체적·정신적으로 건강함을 키워나갔다. 우리 전통문화 공연과 체육 행사 등으로 구성한 한국의 날 행사는 특별함을 더했다. 1진은 설날, 2진은 개천절에 맞춰 진행했고, 3진은 주둔지 우암보와 함께 앙골라 수도 루안다에서도 개최했다. 앙골라 국영 방송과 신문이 행사 소개는 물론 우리나라에 대해 상세히 보도했다.

이 같은 노력은 과거 6·25전쟁을 겪으며 유엔군의 도움을 받던 아픈 역사를 되새기며 도움이 필요한 앙골라 주민들을 진심으로 도와주려는 열정의 표현이었다. 당시 앙골라 공병부대 1진 부대장으로 현장을 지휘한 천영택 예비역 대령(당시 중령)은 “약 25년 전 공병부대의 성공적인 임무 완수는 1, 2, 3진 모든 부대원의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했고, 오늘날 우리 장병들이 더욱 체계적이고 우수한 역량으로 세계 곳곳에서 활약하는 바탕이 됐다”고 그때를 회상했다. / 국방일보 서현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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