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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경상북도

영덕 도곡리 신돌석장군 무안박씨종택

by 구석구석 2022. 1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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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산호랑이 '신돌석장군'

신돌석. 얼핏 들으면 평생 농사만 지은 백성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맞다. 이름처럼 신돌석 장군은 순수한 평민 출신이다. 그래서 그의 이름에서는 콤콤한 된장국 냄새가 풍기는 토속적인 이미지가 먼저 떠오른다. 토담집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가난한 농촌 마을의 순박한 청년이었던 신돌석. 민비시해사건을 계기로 의병에 뛰어든 그는 복사꽃이 새파란 하늘 아래 피어나던 향리의 순진한 청년이었다.

이런 신돌석에게서 영남 일대 최고의 게릴라 사령관이라는 이미지를 떠올리기란 쉽지 않다. 그는 동생 신경우와 함께 농민군 300명을 모아 영릉의진(寧陵義陳)을 창건한 의병 지도자였다. 영덕군과 울진군, 청송군, 봉화면을 주 무대로 하여 일본군을 상대로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게릴라전의 명수였던 것이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은 그를 '태백산 호랑이'라고 불렀다. 태백산 호랑이. 얼마나 기개가 넘치고, 일본군의 배후를 괴롭혔으면 그런 별호를 가지게 되었을까?

▲ 신돌석 장군 영정

신돌석 장군은 고종 15년인 1878년에 영덕군 축산면 도곡리에서 태어났다. 부모님은 평범한 농사꾼이었다. 때는 안팎으로 개화 열풍이 한창 불던 시절이었다. 신돌석은 그런 개화 열풍 속에 서당에 다니면서 조금씩 세상 물정을 알아갔다.

1905년 11월의 어느 날이었다. 착검한 일본 헌병대의 호위를 받은 이토 히로부미가 조정 관료를 일일이 협박하여 을사보호조약이라는 것을 체결했다. 말이 보호조약이지 이는 조선의 외교권과 군사권을 일본이 갖는 명백한 침략행위였다. 미·영·러의 묵인과 승인 아래 일본의 대 조선 식민지화는 이렇게 간단하게 이루어지고 말았다. 울분이 조선 반도에 들불처럼 일어났다. 유생들과 선비, 의인과 백성들은 머리를 땅바닥에 짓찧으며 울부짖었다. 어떻게 세운 나라인데, 어떻게 지탱시켜온 나라인데 총 한 방 쏘아보지 못하고 왜놈에게 나라를 통째로 빼앗기다니.

▲ 우편 집중국 습격 사건

신돌석 장군은 을사늑약이 체결된 후 평해의 월송정에 올라가 울분에 찬 목소리로 자작시를 낭송하곤 곧 바로 의병을 일으키고 만다.

누에 오른 나그네 갈 길을 잃고
낙목에 가로 놓인 단군의 터전을 한탄하노라.
남아 27세에 이룬 일이 무엇인가
문득 가을바람이 부니 감개만 이는구나.

어릴 때부터 행동이 날래고 담용이 뛰어나 항상 대장으로 추앙받던 신돌석이었다. 키는 오척 육촌이었으며, 체격은 비대했고 얼굴은 크고도 넓었다. 피부는 검은 색이었고, 얼굴에는 마마 자국이 엷게 배어 있었다. 그가 의병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들은 아버지는 전답을 모두 팔아 아들의 거사를 도와주었다. 또한 향리 사람들은 그의 높은 기개를 칭찬했으며, 괴시마을과 원구마을, 주실마을 등 인근 양반 마을들도 그에게 적극적인 지원을 해주었다.

사학자 박은식은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 신돌석 장군을 이렇게 평가했다. '영해에서 봉기한 평민 출신 의병장 신돌석의 부대는 일월산과 백암산을 근거지로 신출귀몰한 유격전을 전개하여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박은식의 평가가 아니라도 신돌석의 유격전은 하나의 신화였다. 압도적인 일본군의 화력에 조금도 기죽지 않고 가열찬 전투를 전개한 신돌석 부대는 늘 일본군의 후방을 찌르는 작전을 구사했다. 그래서 신돌석은 일본군의 최대 골칫거리이자 나라 잃은 영덕군과 영해면 백성들의 희망이었다.

그가 창건한 영릉의진의 전투 목표는 일단 울진과 삼척에 있는 일본군 교두보와 일본인 이주 단지를 파괴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일본군 주재소와 우편 집중국 등 관공서를 자주 습격하였고, 이 과정에서 식량과 무기를 조달하기도 했다. 해방 후 만들어진 창의장명록에 의하면 영릉의진의 병사는 약 300명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간부급 61명에 대한 기록이 자세히 적혀 있는데, 재미있는 것은 그의 휘하에 선비와 유생들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지배계급 출신들이 평민 의병장의 지휘를 받는 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신돌석 장군의 능력과 의지가 그만큼 출중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 신돌석 장군 기념관 내의 충의사

1906년 4월에서 1908년 12월 그가 사망할 때까지 영릉의진은 태백산맥을 중심으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신돌석 장군은 한국독립운동사에서 가장 끈질기고 치열한 전투를 보인 의병장으로 평가받을 정도로 지독한 투쟁을 전개했다. 백암산과 검마산 사이의 깊게 패인 골짜기에 독곡 요새을 만들어 일본군의 추격을 따돌렸다. 또한 묘곡 대리 요새와 수리 희암곡 요새 등도 만들어 일본군의 배후를 치고 빠지는 게릴라전의 근거리로 활용했다. 오죽 했으면 일본군 토벌대 장교가 신돌석 부대가 수십 차례 토벌을 당했지만 지금도 체포되지 않고 영양지방에 출몰한다고 자탄을 했을까. 신돌석 장군은 영덕군 일대의 지형지물을 교묘히 활용하여 일본군을 엄청나게 괴롭혔던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고 또 안타깝게도 신돌석 장군은 너무나 허무한 최후를 맞고 만다. 장군은 집요한 일본군의 추격을 피해 만주로 근거지를 옮길 계획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부대를 재편성하면서 때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의 부장이었던 김도윤이라는 자가 일본군에게 귀순하면서 신돌석 장군과 내분을 일으키게 된다. 결국 김도윤과 그의 형 김도령은 신돌석 장군과 격투를 벌이게 되었고, 마침내 김도윤이 신돌석장군을 살해하고 만다. 당시 신장군이 최후를 맞이한 장소가 지품면 눌곡 마을 근처의 골짜기에 있는 청석바위라고 전해진다. 이 바위는 철분이 흘러들어 붉게 물든 색감을 보여주는데, 신장군이 흘린 피가 바위에 스며 든 것도 한 이유이지 않을까 싶다.

▲ 장군을 기념하는 비석

신돌석장군은 죽어서도 결코 편안하게 귀천하지 못했을 것이다. 차라리 일본군과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라도 하면 편하게 가련만, 내 나라 내 동포의 손에 죽고 말았으니 그 얼마나 원통하겠는가. 일설에 의하면 현상금을 탐낸 것이 가장 큰 이유라고 하니 그저 억장이 무너질 밖에.

현재 그의 유해는 서울 국립묘지 애국자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그에게는 지난 1963년에야 비로소 대한민국 건국 공로훈장 복장이 추서되었고, 그의 생가는 1995년에 복원되었다. 그리고 1999년에 와서야 그를 기념하는 신돌석 장군 기념관이 영덕군 축산면 도곡리에 세워지게 되었다. 참 때늦은 감이 없지 않다. 그가 불귀의 객이 된지 거의 100년이 지나서야 겨우 그를 추념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나마 이루어진 것도 감사해야 할 일이다. 일본군을 대신한 미군이 진주하면서 이 땅에 남아 있는 친일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우리민족의 잘못이니 누구를 원망하랴.

▲ 신돌석 장군 생가

회색빛 초가지붕이 낮게 드리운 구름을 벗 삼아 자그마한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신돌석 장군의 생가. 연한 황색의 흙 담에서 토속의 향이 콧속을 자극하는 평화로운 곳. 눈 들어 앞마당을 쳐다보니 댕기머리에 하얀 옷을 입은 소년이 미소를 지으며 다가온다. 소년의 눈동자에 비친 하늘이 무척 새파랗다. 소년은 질문을 던진다. 

/ 자료 - 글 사진 오마이뉴스 김대갑

 

축산면 도곡리 127 무안박씨종택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74호 (1991년 05월 14일 지정) 

관리자 박영옥 054-732-4526  

중요민속문화재 제286호 '영덕 무안박씨 무의공파 종택'은 경북 영덕군 도곡마을 가마골 뒤편 야산을 뒤로하고 앞뜰을 내려다보며 남향으로 자리 잡고 있다.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운 박의장(1555~1615년)의 아들 박선(1596~1669년)이 형인 박유(1576~1618년)를 위해 1644년 건립했다.

영덕 무안박씨 무의공파 종택_본채 외부 전경  / 문화재청

건물은 대문채, 본채, 내삼문, 사당으로 구성된다. 안마당의 확장과 사랑채의 돌출, 사당 공간의 높은 독립성 등 17세기 이후부터 나타나는 배치 유형을 띤다. 지역의 토착성을 잘 반영한 안채와 사랑채의 공간구성 등에서 17세기 사대부 주거건축의 특징을 확인할 수 있다.

대문채 / 문화재청

이 종택에는 집안과 관계된 문헌자료가 잘 보존되어 있고 민속적 제례행위가 지속적으로 행해지고 있다. 또한 문중의 대소사를 논의하고 친족 간 결속을 다지는 등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 자료 - 글 아시아경제 2016. 4. 26

 

축산면 도곡리 20-3 대소산 봉수대 경상북도기념물 제37호 (1982년 08월 04일 지정) 

봉수대는 횃불과 연기를 이용하여 급한 소식을 전하던 옛날의 통신수단을 말하며, 높은 산에 올라가서 불을 피워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빛으로 신호를 보냈다. 영덕 대소산 봉수대는 영덕 축산포 방면의 상황을 서울 남산까지 전하던 곳의 하나였다. 남쪽으로 별반 봉수대, 북으로 평해의 후리산 봉수대, 서로는 광산 봉수대를 거쳐 진보의 남각산봉수대로 연락을 취하도록 되어있다. 산의 꼭대기에는 방어벽을 쌓고, 성 안에는 직경 11m, 높이 3.5m로 봉돈(烽燉)을 쌓았다. 봉수대의 형태가 비교적 뚜렷하게 남아있어, 조선시대의 통신수단을 알아볼 수 있는 좋은 자료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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