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방방곡곡/경상북도

포항 읍내리 장기읍성

by 구석구석 2022. 10. 27.
728x90

 

포항에서 포항제철 쪽으로 가다가 오천방향으로 내려가면 갑자기 널따란 평야가 하나 나타난다. 풍성한 들녘에는 황금빛 벼이삭들이 곰실곰실 익어가고 드문드문 떨어진 촌가의 굴뚝에서는 새하얀 연기가 정겹게 흐르고 있다. 그 구순한 풍경에 잠시 눈을 들어 풍요로운 들판을 쳐다본다. 동해안과 가까이 있지만 여느 동해안 마을과는 초입부터 분위기가 무척 다른 마을, 바로 장기면이란 곳이다.

장기면에서 조금만 더 내려가면 대왕암으로 유명한 감포가 있고 북으로 조금 올라가면 과메기로 유명한 구룡포항이 있다. 이런 유명 관광지에 비해 장기면은 덜 알려진 곳이라서 이곳의 존재를 아는 이는 드물다. 또한 이곳에 송시열과 정약용이 유배를 왔으며, 작은 성 하나가 외로이 동해를 지킨다는 것을 아는 이 역시 드물 것이다.

장기읍성은 장기면사무소에서 우회전하여 산등성이쪽으로 올라가면 나타나는 읍내리에 위치하고 있다. 1.5m의 높이에 총 길이 2000m인 장기읍성은 약 3만7000평의 면적을 갖고 있다. 읍성은 해발 252m인 동악산 동쪽 자락에 자리 잡고 있는데, 고려시대에 토성으로 존재하던 것을 조선시대에 석성으로 개축하였다고 전해온다.

3개의 성문이 있었으며 성 내에는 4개의 우물과 2개의 연못이 있었다고 한다. 현재 연못은 매립된 상태이고 우물은 마을 주민들이 식수로 이용하고 있다. 성내에는 약 40여 호의 농가가 아직도 살고 있다.

장기읍성은 여러 가지 면에서 눈여겨 보아야 할 문화유산이다. 무엇보다도 이 성은 산정에 있으면서도 관아가 밀집되어 있는 특이한 체계를 갖고 있었다. 또 교육기관인 향교가 산정에 있다는 이유도 흥미로움을 안겨준다.

보통 향교라고 하면 지방의 양반 자제를 위한 교육기관이고 통상 마을의 중심에 있는 것이 상식이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평야지대가 아닌 산정에 교육기관이 설치되었는지 자못 신기할 따름이다. 아마도 외부의 적들로부터 행정기관과 교육기관을 방어하기 위해서 그렇게 했을 것이다.

성루에 올라 동쪽을 응시하면 왜 이곳에 성을 쌓았는지가 명백해진다. 눈앞에 펼쳐진 평야지대 너머로 동해가 한 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이런 특성 때문에 장기읍성은 해안선 방어를 위한 군사적 거점으로서의 역할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곳은 한적하고 외진 곳이라는 이유로 인해 정치인들의 유배지 역할을 톡톡히 했던 곳이기도 하다.

사색당파의 정국 속에서 많은 정객들이 동해안으로 귀양을 왔는데 장기읍성에도 많은 양반들이 유배를 왔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우암 송시열과 다산 정약용이었다. 우암과 다산의 입장에서는 장기읍성이 처량한 유배지였겠지만 이 마을 사람들에게 그들의 유배는 마을 전체의 수준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대학자인 이들이 오지에 와서 첫 번째로 한 것이 무엇이었을까? 당연히 고을 인근의 청년들에게 자신의 학문을 전수하는 것이었다. 궁벽한 시골 마을에 갑자기 나타난 대학자가 마을의 청년들에게 내리는 철학과 유학의 단비는 그 얼마나 달콤했을까?

마을 사람들은 우암을 흠모하여 그의 학문을 암송하였고, 그가 떠나간 뒤에는 죽림서원을 세워 그의 공덕을 기렸다. 현재 장기초등학교 내에는 우암과 다산의 사적비가 장려하게 세워져 있다. 사적비에는 우암과 다산으로 인해 장기마을이 최고 수준의 학문을 전수 받은 것은 행운이었다고 적혀 있다.

그러나 장기읍성은 일제 시대에 불행한 일을 당하고 만다. 간악한 일본인들이 성 내의 모든 관아를 철저히 파괴해버린 것이었다. 당시 향교도 많은 피해를 입었는데, 마을 주민들이 합심해서 복원하여 오늘날까지 원형이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그때 장기읍성도 파괴되어 잡초만 무성한 성이 되고 말았는데, 관의 복원 노력에 의해 지금은 석성으로서의 모습을 훌륭히 갖추었다. 그러나 원래의 석성과는 달리 시멘트가 조잡하게 덧칠되어 있어 다소 씁쓸한 느낌을 주고 있다.

예전에 장기읍성 안에 있던 동헌과 대원군 척화비는 현재 장기면사무소 한쪽에 보관되어 있다. 동헌은 조선 시대 맞배지붕의 양식으로 되어 있다. 면사무소 앞에는 성내에 있었던 비석들이 고풍스러운 모습으로 세워져 있다. 척화비는 원래 성내에 있었다가 분실되었는데 1951년 장기지서 앞에서 우연히 발견되었다고 한다.

장기읍성의 옛 성문 누각에는 특이한 각자가 하나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배일대’라는 각자가 그것인데, 해를 맞이하는 곳이라는 뜻이다. 예전 장기현감이 이곳에서 매년 정월 초하루에 해를 맞이하면서 국왕과 백성의 안녕을 빌었던 것이다. 그만큼 장기읍성은 해돋이 장소로 유명한 곳이었다.

장기 현감은 이곳에서 제를 올린 후 왜적의 침입을 걱정하며 단 한시도 마음 편하게 잠들지도 못했을 것이다. 행여 달이라도 휘영청 떠올라 고적한 성벽이 은빛 폭포로 물들 때는 두고 온 처자를 생각하며 깊은 소회에 젖었을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이곳이야말로 고적한 성과 은백색 달, 그리고 옻빛 바다가 앙상블을 이루는 최적의 장소이지 않은가? 보름달이 떠오르는 날, 향기 좋은 술을 마시면서 바다를 향해 시라도 읊으면 선경이 따로 없겠구나. 그 선경에 취해 성벽 위에서 구름을 이불삼아 잠이라도 자면 어떨는지.

/ 자료 - 글 오마이뉴스 (김대갑)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