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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충청남도

논산 노성면-명재고택 배롱나무

by 구석구석 2008. 9.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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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배롱나무꽃은 열꽃이다. 피가 펄펄 끓어 돋은 ‘화엄 자국’이다. 여름은 배롱나무꽃과 함께 시작된다. 석 달 열흘 피고 지고, 지고 피는 나무 백일홍() 꽃. 조선 선비들은 앞마당에 배롱나무와 향나무를 심어놓고, 꼿꼿한 지조와 강직한 삶을 꿈꿨다. 

 

 조선 숙종 때 선비 명재 윤증( ·1629∼1714)은 재야의 백의정승이었다. 대사헌 이조판서 우의정 등 수많은 벼슬이 내려왔지만, 단 한 번도 곁눈을 주지 않았다. 그 대신 그는 당시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노론의 거두 송시열(1607∼1689)에 맞서 끊임없이 비판의 상소를 올렸다. 송시열은 그의 한때 스승이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노성면 교촌리 명재고택(041-735-1215) 앞마당엔 늙은 배롱나무꽃이 피를 토하듯이 피었다. 다발로 핀 붉은 꽃마다 꿀벌들의 잉잉거리는 소리가 따갑다. 바닥엔 벌써 붉은 꽃잎들이 질펀하게 누워있다. 하지만 앞마당 연못가의 늙은 배롱나무는 꽃이 듬성듬성 피었다. 지난해 폭죽 터뜨리듯 피워대더니 올해는 아무래도 해갈이를 하는가 보다. 달 밝은 밤, 연못에 잠긴 황홀한 붉은 꽃들을 볼 수 없다니. 못내 안타깝다.

명재고택은 고졸하고 단아하다. 울타리도 없다. 나무와 숲이 자연스럽게 그 역할을 한다. 왼쪽 장독대 항아리 뒤쪽으로 늙은 느티나무들이 병풍처럼 서있다. 앞쪽 저 멀리 마을 건너편엔 계룡산이 마른 기침소리를 내며 앉아 있다. 명재고택은 그의 제자들이 지어준 집. 하지만 명재는 생전에 “과분하다”며 그가 살던 초가집을 떠나지 않았다.

 

배롱나무 줄기는 알몸이다. 발가벗은 몸에 간지럼 태우면 까르르 꽃들이 웃는다. 그래서 ‘간지럼나무’다. 하지만 절집에서는 무욕을 뜻한다. 속세의 때를 훨훨 벗어 버려, 한 점 욕심이나 집착이 없는 깨달음의 경지를 말한다. 절집의 배롱나무는 뼈와 가죽만 남은 채로 뒤틀려 있다. 그 마른 명태 같은 몸에서 ‘붉은 사리 꽃’을 끝없이 토해낸다. 맨발 탁발의 깡마른 부처가 설법을 뿜어내는 것 같다.


 

가 볼 만한 배롱나무꽃

전북 남원군 교룡산성 선국사(500년)
전남 강진군 백련사(200년)
전남 담양군 명옥헌(350년)

부산 부산진구 양정동 동래 정씨 시조 묘(800년)

경북 안동시 병산서원(054-853-2172 / 390년)

서울 세종로 교보문고 앞 비각 뜰

 

명재고택에서 선비정신을 배운다.

‘울도 담도 없는 집’ . 명재고택과 첫 대면이 그렇다. 그도 그럴 것이 명재고택은 노성산을 병풍삼긴 했으나 대문이나 울타리 없이 전면으로 탁 트인 사랑채가 먼저 길손을 맞고 있다. 안채 앞에 사랑채가 놓인 격이다. 기단을 쌓고 그 위에 집을 지어 누구든 ‘환영’하는 듯, 누구든 ‘쉬다 가라는 듯’ 발길을 이끈다. 게다가 주변으로 울창한 소나무 숲이 감싸고 있어 사랑채를 마주 하고 서니 마음에 솔바람이 불어온다.

 

 윤증 선생 고택의 사랑채는 앞면 4칸, 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八(팔)」 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높이 쌓아올린 축대 위에 지었으며, 가운데에 2칸 사랑방을 배치했다. 월간조선

 

그렇다면 300년이나 됐다는 명재고택은 누구의 뜻을 받자와 시원스레 사랑채를 지어 올렸을까. 명재고택은 조선 숙종 때 학자인 윤증(1629~1711) 선생의 고택으로 최근에는 ‘전통 한옥 답사지’ ‘고택체험’ ‘한옥숙박’으로 명성을 얻고 있다. 논산시에서는 지역민들이 ‘딸기 빼곤 논산서 제일 유명하다’ 할 정도로 찾는 이들이 많은 곳이다.

 

 

명색이 ‘고택’인데 고택의 주인어른의 일생을 모르고 갈 수는 없는 노릇. 윤증선생은 파평 윤씨라면 첫손에 꼽는 조선시대 성리학자로 이조참판, 이조판서 등에 임명을 받았으나 모두 고사하고 관직에 오른 일이 없다. 끝끝내 초야에 묻혀 후학들을 길러낸 ‘백의정승’이면서도 정치적으로 중요한 문제가 생길 때마다 상소를 올렸는데 그 숫자만 열 네 번에 이른다. <명재유고>를 남겼다. 요즘 같은 난마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본격적으로 고택을 한바퀴 둘러보자. 명재고택의 사랑채 앞에는 너른 바깥마당이 있고 그 앞에 인공 연못이 있어 여유로움을 더한다. 안채는 ‘ㄷ’자 모양으로 자연석으로 기단을 만들었고 그 위로 건물을 얹은 형태다. 안채 가운데 세칸은 대청으로 이루어져 있어 한옥에서 느낄 수 있는 고풍스러움이 흐른다. 왼쪽과 안방 오른쪽으로 건너방이 있고 줄지은 방 사이사이는 쪽마루가 깔려 이동이 편하다. 안채 뒤쪽 완만한 경사지에는 독특한 뒤뜰을 가꾼 모습도 싱그럽다.

 

한옥이 그저 한옥인줄로만 아는 터라, 신영훈 작(作) <한옥의 향기>에서 명재고택에 관한 감상을 빌리자면 이렇다. “이런 집에서 한번 살아봤으면 하는 생각이 솟는다. 전생에 웬만한 적덕을 하지 않고서는 금생에 그런 호강을 할 수 없다고 생각되지 체념은 하지만 마음은 몹시 부럽다.(중략) 정서와 생활이 공존하고 있는 실존의 세계다.”. 그는 또 “선비의 집이니 조촐할 수 밖에 없지만, 외려 평탄함과 후덕스러움이 집안 곳곳에 베어난다”고 감상을 적고 있다.

 

명재고택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고택 말고도 또 있다. 마당에 정갈하게 놓인 수백개(?)에 이르는 장독이다. 그런데 명재고택의 장독에는 ‘뭔가 다른’ 것이 들었다. 바로 ‘시간’이다. 그것도 300년의 시간.

 

무슨말인고 하니, 명재고택의 장은 교동 전독(항아리) 간장이라고 해서 300년간 항아리채 전해져 오고 있다. 노서(윤서거: 명재의 부) 종가만의 전통법으로 전수되는 장이다. 명재고택의 설명에 따르면 “간장을 달이는 날에는 온 동네에 장 냄새가 진동을 해 몸져 앓아 누워있는 환자도 교동댁의 간장을 좀 먹었으면 죽어도 원이 없겠다”고 할 정도로 명성이 자자했다고. 고택 방문 길에 교동 전독 간장과 된장으로 요리한 정갈한 식사를 맛보거나, 장을 구매 할 수도 있다.  

 

 

 

고택의 진미를 느끼려면 무어니무어니 해도 하룻밤 묵어가는 게 제격이다. 1박에 큰 사랑방, 안사랑방, 작은 사랑방은 각각 8만원, 6만원, 6만원이며, 건넌방은 11만원이다. 누마루가 인상적인 사랑채(독채)의 하룻밤 주인이 되는데는 30만원이 든다. 사랑채에는 큰사랑방, 작은 사랑방, 안사랑방이 있다. 취사는 모두 불가능하다. 새로 지은 별채는 취사가 가능하며 샤워실, 화장실을 갖추고 있으며 숙박비는 90,000원. 식사는 1인1식에 5,000원이며. 조식, 석식만 가능하다.

 

 윤증 선생의 실학 정신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고택은 이곳을 찾아온 사람에게 편안하고 단정한 느낌을 준다. 사진은 안채로 들어가는 입구의 모습이다. 월간조선

 

고택 방문과 답사를 하려면 최소 10일전에 홈페이지를 통해 예약 해야 한다. 체험과 숙박을 하는 동안 고택에 관한 유래와 해설을 함께 들을 수 있다. 고택에서 직접 재배한 구절초차를 시엄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도 놓치지 말자. 한국관광공사 국내온라인팀 취재기자 김수진

 

고택을 방문하여 명재선생의 학문이나 고택의 유래에 관한 해설을 들을 경우, 도원스님이 직접 만든 백련차와 고택에서 재배한 구절초차를 시음해 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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