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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전라북도

익산 금마 미륵사지 미륵산 석왕동쌍릉

by 구석구석 2008. 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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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남고속도로 익산 나들목~722번 지방도~1번 국도~쑥고개~722번 지방도~금마~미륵사지

- 서해안고속도로 동군산 나들목~27번 국도 오산면 선룡교 사거리~23번 국도 익산~718번 지방도 황등~722번 지방도 삼기~미륵사지~금마(1번 국도)~쑥고개

 

 

 

백제 중엽이래 익산 땅은 공주, 부여와 함께 백제문화의 또 하나의 중심지였다. 오늘날 이 지역에는 '미륵사터', 익산 '쌍릉' 등 백제문화의 전성기였던 무왕 때와 관련된 유적들이 많이 남아 있고, 그밖에도 왕궁리 '오층석탑', 연동리 '석불좌상', 태봉사 '삼존석불' 등이 있다. 


미륵사지는 그 중심에 고도의 기호처럼 자리한다. 전설은 이러하다. 왕위에 오른 무왕 서동이 왕비(선화공주)와 함께 사자사를 향해 가던 중 용화산 아래 연못에서 미륵삼존을 만났다. 이에 왕비가 그 자리에 절을 세울 것을 소원하였고, 무왕은 지명법사의 신력을 빌려 못을 메우고 사찰을 건립했다.

미륵삼존을 모신 자리라 법당과 탑, 회랑이 각각 세 곳에 세워졌다. 그 이면에는 미륵의 출현을 빌려 백제의 재건을 꿈꿨던 무왕의 숨은 의지가 담겨 있다.

미륵사지는 그만큼 태생부터가 큰 사찰이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현재의 미륵사지는 황량하다.

서편의 미륵사지유물전시관과 동원(東園)에 복원된 석탑, 당간지주 정도가 영화로웠던 과거를 대변한다. 미륵사지석탑마저 해체·복원에 들어가니 대지는 지나치게 무료하다.

복원을 위해 번호를 매긴 돌조각들만이 온전히 자리할 날을 기다리고, 바람처럼 떠도는 정적은 옛 자취를 더듬듯 무왕을 안위한다.

지난 1998년 복원을 위한 해체 작업에 들어간 미륵사지석탑은  60% 정도 해체가 완료된 상태다. 정성스레 붙여진 비표는 탑돌이 위치했던 지점과 다시 자리할 지점을 동시에 가리킨다. 그 풍광을 찬찬히 가슴에 새기며 걷다 보면 지난 시간이 조심스레 말을 걸어온다.

이러한 보수·복원 과정은 관광객들에게 개방하고 있다. 천막을 씌우듯 현장을 감싼 가건물 측면에는 작은 출입구가 있다. 별도의 신청이나 허가가 없어도 현장의 일부를 지켜볼 수 있다. 허물어진 돌무덤처럼 초라한 모양새지만, 문화의 탄생과 소멸 그리고 재건이라는 역사의 수레바퀴는 배움의 장으로 손색이 없다. 그 위용을 드러낼 미륵사지석탑의 미래도 은근한 기대감을 갖게 한다.

 

일단 미륵사지에 도착하면 넓게 닦아 놓은 주차장과 '미륵사지유물전시관'이 눈에 들어온다. 그 너머로는 1993년에 새하얀 돌로 복원된 동 석탑이 금빛 원형 상륜부와 지붕 귀퉁이마다에서 울리는 풍령 소리가 조화를 이루며, 10년이 된 지금도 방금 복원이 끝난 듯 산뜻한 모습으로 나그네들을 반기고 있다.
본래의 미륵사는 목탑을 가운데로 동서로 두기의 석탑이 있었다. 구별해서 말하자면 미륵사터 서석탑이라고 불러야 하겠지만, 관습상 미륵사석탑이라 불려진다. 국보 제 11호인 이 탑은 본래 한쪽 면이 떨어져 나간 채 6층으로 남아있었다. 그나마 일제 시대인 1915년에 이루어진 붕괴 방지공사로, 서남쪽엔 시멘트가 덧 발려져 보기 안타까운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복원된 동탑과 비교해 보면 고색창연 한 그 모습에서 마치 고대와 현대의 교차점을 연상케 한다.

 

지난 98년 전라북도 의뢰로 탑의 안전진단을 맡았던 '한국건설안전기술원'은 '미륵사지 서탑 학술세미나'에서 "일부 기단부 기둥에서 압축파괴로 보이는 균열이 발생하여 그대로 둘 경우 무너질 위험이 높다"는 진단에 따라 해체 후 복원이라는 최종 결론을 내린바 있다. 이에 따라 지난 2001년 10월, 총공사비 80억 원을 들여 2007년 완성을 목표로 해체·보수작업을 진행중이다.
서탑과 동탑 사이, 목 탑이 있었던 중간 위치에서 두 탑을 번갈아 보면 볼 수록, 동탑의 원래의 모습이 서탑과 같았으리라고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사람들은 탑 주위를 돌아보고 당간지주를 살피면서 백제의 숨결을 느껴볼 뿐이다. 한지호 자동차여행가

 

 

익산 미륵사탑서 사리장엄 등 유물 500여 점 쏟아져

국보 제11호 미륵사지석탑을 보수·정비하는 과정에서 국보급 유물 ‘사리장엄(舍利莊嚴)’이 발견됐다. 금으로 만들어 사리를 담은 병 ‘금제사리호(金製舍利壺)’와 그 이력을 금판에 새겨 넣은 ‘금제사리봉안기(金製舍利奉安記)’, 은으로 만든 모자 장식물 ‘은제관식’, 시주 명단과 액수를 얇은 금판에 적은 ‘금제소형판’ 등의 유물 500여 점이 수습됐다. 무령왕릉 출토에 버금가는 발견이라 평가될 정도의 성과다. 이건무 문화재청장은 “백제사 연구에 더없이 귀중한 자료”라고 말했다. 중앙일보2009.1

 

백제 최대의 가람인 미륵사는 신라 진평왕의 딸 선화(善花) 공주를 아내로 맞아들인 백제 서동 왕자가 제30대 무왕(武王·재위 600~641)으로 즉위한 뒤 지었다고 『삼국유사』는 전한다. 이 절의 건립 과정에서 진평왕이 여러 공인(工人)을 보내 도왔다는 기록도 있다. 그러나 『삼국유사』는 ‘설화’란 시각이 많아 그 기록에 대한 신뢰도는 그리 높지 않았다. 국보 제11호 미륵사지석탑에서 발견된 ‘사리장엄’으로 그동안 미스터리로 남아 있던 미륵사 창건 설화에 대한 의문이 상당 부분 해소될 것으로 보인다.

 

이번에 발견된 ‘금제사리봉안기’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기록돼 있다. 가람을 건립한 백제 왕후가 “좌평 사택적덕의 따님”으로 “기해년 정월 29일(639년)에 사리를 받들어 맞이했다”고 적혀 있다. 사택씨는 백제 8대 성족의 하나로 부여·공주 일대의 귀족이다. 즉 백제 무왕대에 왕비가 건립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은 정확한 것으로 밝혀졌으나, 그 왕비가 선화 공주가 아닐 가능성도 제기된 것이다.  

 

사택적덕은 현재까지 기록에서 등장한 바 없다. 노중국 계명대 사학과 교수는 “무왕의 부인이 몇 명인지 모르겠으나 그중 하나가 사택씨임이 밝혀진 것”이라며 “미륵사는 삼원(三院) 형식의 절이라 이번에 발굴된 서탑과 서쪽 가람만 사택씨의 왕후가 짓고, 나머지 가람은 다른 왕후들이 지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노 교수는 “기축년(629년)이란 도장이 찍힌 기와가 이전에 출토된 점을 미뤄보면 중원의 목탑은 미륵사지석탑보다 10년 앞서 건립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덧붙였다.

 

미륵사는 삼원 병렬식 가람이다. 동탑과 중원의 목탑을 비롯한 가람 대부분이 소실되고 서탑인 미륵사지석탑만 일부 남아 있던 것을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2001년부터 해체 조사하기 시작했다. 이번에 맨 아래층의 심주석을 드러내는 과정에서 사리장엄이 일괄 수습된 것이다. 동탑과 목탑 자리에서는 사리장엄이 발굴되지 않았다. 또 서탑에 지렛대 자국이 남아 있는 등 도굴을 시도한 흔적이 남아 있는 사실도 확인됐다. 배병선 미륵사지석탑 정비·보수단장은 “사리공(사리를 넣는 구멍) 위를 1.2t가량의 돌로 막고 회로 봉해 1400년 전의 유물이 고스란히 보존돼 있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미륵사지석탑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석탑이기도 하다.

높이 13㎝짜리 금제사리호는 백제 미술의 절정을 보여준다. 연꽃잎, 당초 무늬와 연주문을 빼곡히 새기는 등 세련되면서도 섬세한 문양이 특징이다. 중국의 사각함과 달리 둥근 몸체에 긴 목을 지닌 사리함을 만든 것도 독특하다. X선으로 촬영한 결과 사리함 안에는 소형 사리병이 안치되어 있고, 외병으로 조립해 고정시킨 이중 구조였다. 국립문화재연구소 이귀영 미술문화재 연구실장은 “사리 문양의 원칙을 지키면서도 백제화시킨 대단한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김봉건 국립문화재연구소장은 “은제관식 은 모자에 꽂았던 장식을 즉석에서 벗어 넣은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중앙일보2009.1 이경희기자 

 

 

마한·백제의 숨결이 살아 숨쉬는 미륵신앙의 요람 '미륵산'

 백제의 최대 가람이자 미륵산앙의 요람으로 마한과 백제의 문화가 살아 숨 쉬는 미륵사는 신라의 최대 가람이자 화엄신앙의 요람으로 신라문화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경주 황룡사와 함께 삼국시대의 대표적 사찰이다.

미륵산성은 우제봉과 장군봉 두 봉우리에 동쪽으로 계곡을 돌아서 쌓은 석성이다. 동국여지승람에 고조선의 왕 기준이 이곳 금마 땅에 내려와 마한을 개국하고 이 성을 쌓았다 하여 기준성으로 불린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성안에서 출토되는 유물에는 마한 시대의 것은 발견되지 않고, 백제 후기의 토기와 금마저성이라 쓰인 백제 와편이 여러 곳에서 출토되고 있어 이곳을 ‘금마저’라 칭한 백제 성으로 백제 말기에서 조선시대까지 몇 차례 개축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벽의 총길이는 1,823m이고, 동쪽 계곡 수구문 근처에 정문터가 남아 있고, 남벽 중앙부에 남문터가 있다. 성 외벽은 수직으로 쌓고, 성벽 높이는 4~5m이며, 성벽의 넓이는 3~5m이다. 성내에는 우물터와 여러 채의 건물터가 남아 있다. 산 중턱에는 기름 한 말을 끊일 수 있는 홈이 파인 큰 바위의 등잔암과 사자암, 심곡사 등이 있고, 구멍이 패어 있는 투구바위 등이 명산의 면모를 갖추었다.

 

 미륵산(彌勒山·430.2m)에서 3.3km 거리에 있는 용화산(龍華山·342m)은 남쪽의 왕궁면 용화리에서 따온 것으로 추측되며, 왕궁면과 여산면에 걸쳐있는 옥녀봉, 선인봉, 노승봉, 성태봉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다. 옥녀봉에는 30여 명이 머물 수 있는 자연석굴이 있다. 북쪽의 성태봉에는 석성이 있고, 선인봉 동쪽 기슭에는 도산사, 동산사, 상원사 등 몇 개의 절터가 남아 있다.

 

용화산 자락의 원수리 샘골 동쪽 기슭의 절벽 중간에는 30평 정도의 자연석굴에 작은 샘이 있어 약수로 이용된다. 혹자는 현재 위치와는 반대인 용화산쪽 기슭 상원사 마을 앞 작은 동굴과 위로 통하는 굴이라고 한다. 이 굴에서 불을 때면 연기가 그쪽에서 나온다는 이유다. 굴 높이는 10m쯤 되는 암벽에 있다. 이곳에 기생하고 있는 소나무 뿌리를 이용하여 굴 안으로 출입할 수 있게 통로를 만들었다.

 

 미륵사지와 냉정약수를 거쳐 소나무숲으로 올라서면 계단이고, 5분쯤 오르면 등산로가 바윗길로 가파르다. 산이 대부분 바위로 이루어져 있고, 평야지역에 우뚝 솟아 제법 산행미가 있다. 전망대 바위에 서면 북으로 익산시가지, 동으로 정상의 암벽과 그 주변의 바위들이 아름답게 다가온다. 이곳부터는 송림과 올망졸망한 바위들이 어우러진 급경사를 오르면 거대한 바위가 있는 쉼터다.  

 냉정약수

 

 정상이 바로 지척이고 흉물스런 한국통신과 군부대 통신시설이 보인다. 큰 바위 뒤에는 항공촬영하기 위하여 설치한 도근점이 있고, 곧이어 정상에 닿는다(미륵사지에서 1시간 소요). 조망도 좋지만 널따란 공터가 있다. 북쪽에 있는 통신시설은 미륵신앙의 요람인 산의 정기를 빼앗고, 정상의 간이매점은 쓰레기를 유발시켜 안타깝다.

미륵산에서 북릉의 산줄기가 뚜렷하다. 이 때문에 정맥꾼들이 무심코 송신탑 방향의 산줄기를 따라가다 보면 중간지점에 금강홍수통제소가 있어 더욱 혼선을 가져오게 돼 산 아래까지 내려갔다 돌아오는 수고를 하기도 한다.

▲ [좌]미륵산 정상부의 경사진 암부. [우]미륵산 정상.

 

 미륵산에서 본 미륵사 터/원불교신문

 

정상에서 정맥은 남쪽(미륵사지 방향)으로 200m쯤 내려가다가 서쪽 장항동 방향 이정표가 있는 곳에서 송림으로 꺾여 내려야한다. 10분쯤이면 사거리인데, 곧바로 운행하다보면 등산로가 마치 임도처럼 넓어진다. 잠시 후면 독도에 유의하여 대판 마을 뒤 잘록이에서 정맥이 넓은 등산로를 버리고 북으로 꺾어진다. 동으로 미륵산이 우뚝하다. 월간산 김정길 전북산사랑회 회장

 

산행길잡이

○제1코스  쑥고개(1번 국도)~(2.7km)~용화산~(1.8km)~아리랑고개~(1.5km)~미륵산~냉정약수~(2.4km)~미륵사지 <8.4km, 3시간30분 소요>
○제2코스  미륵사지~냉정약수~(2.4km)~미륵산~(3km)~석불사 <5.4km, 2시간20분 소요>
○제3코스  종평~구룡~주차장~사자암~미륵산~교원연수원 <5km, 2시간 소요>

 

미륵탑순두부(대표 양현명·063-473-9188)와 미륵산순두부(대표 강순임·063-836-8919)에서 산행 후 직접 담근 동동주와 함께 순두부 요리를 맛볼 수 있다.
익산 시내에 있는 조선가마솥설렁탕(대표 김정숙·063-841-0030)에서는 설렁탕, 갈비탕, 도가니탕, 산채비빔밥 등을 저렴하게 맛볼 수 있다. 

 

석왕동 산55  사적87호 쌍릉

 

쌍릉은 백제말기 굴식 돌방무덤으로 봉분이 동서로 약 200m의 사이를 두고 자리하고 있으며, 동쪽의 능은 '대왕뫼'라 불리며, 서쪽의 능은 '소왕뫼'라 불린다. 내부는 모두 부여 능산리 고분 돌방과 같은 형식으로, 백제 말기인 7세기 전반의 형식이며 부근의 미륵사지가 백제 무왕때 창건되었음을 감안하면 이 능은 무왕과 왕비의 능묘일 가능성이 많다고 한다. 이 왕릉은 고려 충숙왕 13년 왜구에 의해 도굴되었으며, 1917년 일인학자에 의해 발굴조사되어 나머지 유물은 국립 전주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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