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화 청량산 청량사
‘작은 금강산’ 올라 약차 한 잔 음미하며 시 한 수 읊어볼까
“청산은 어찌하여 만고에 푸르며 유수는 어찌하여 주야로 그치지 않는가. 우리도 그치지 않아 만고에 늘 푸르리라.” (퇴계 이황 ‘도산십이곡’ 중)
자연은 겨울 준비에 한창이겠다. 경북 봉화군 청량산 들머리인 입석(立石)에서 잠깐 오르막을 올라 생강나무 노란빛에 취해 산길을 걸었다. 햇빛은 산골짝 깊은 곳까지 비췄고 산은 온통 단풍으로 고왔다.
일제에 저항한 의병 투쟁 근거지
입석에는 숙종때 병조정랑을 지낸 권성구가 청량산을 유람하며 ‘금강산에 버금가니 작은 금강산이라 이를 만하다’고 읊은 글귀가 적혀있다. 가을은 낙동강을 따라 내려오며 청량산에서 절정에 이른다. 소나무 푸른빛이 산과 조화를 이룬다. 기암괴석으로 이뤄진 금탑봉 아래를 크게 돌아 청량사로 가는 쉬운 길을 택해 걸어본다.
예전에 몇 번이나 올랐던 자소봉, 탁필봉, 연적봉의 기암들이 눈에 선하나 오늘은 산의 정취를 마음으로만 즐길 생각이다. ‘산꾼의 집’에서 차 한 잔 해야겠지.
청량산을 오르는 길목에 화전민 집을 오가는 사람들의 쉼터 역할을 하는 공간이 있다. 빨간 지붕의 황토집 돌담 옆에는 ‘약차를 그냥 먹는 집’이라는 하얀 글씨의 기둥이 세워져 있어 차를 마시며 쉬어가는 곳임을 알려준다. 돌담 문으로 들어서면 청량산의 아홉 가지 약초를 달여 만든 구정차를 무료로 제공하는 향곡 김성기 시인이 기거한다.
시인의 시집도 들여다보고 차 한잔을 마시는데 아코디언 연주를 한 곡 해주겠단다. 시인은 “교습을 받으려니 한 달에 15만 원 달라기에 혼자 연습했어요”라고 하며 악보를 넘긴다. 풀잎으로 떨어지는 빗방울이란 의미의 패티김이 불렀던 ‘초우’가 아코디언 음률로 퍼진다.
단풍은 산을 물들이고 햇볕은 아직 따뜻한 오후, 깊은 산중에 울려 퍼지는 가녀린 소리는 햇빛을 반사하며 낙엽이 돼 떨어진다.
진열된 사진과 시집, 빼곡하게 들어찬 서각들을 보고 있자니 작은 재미도 있고 마음도 따뜻해진다. ‘그리움 찾아 먼 길 떠나왔더니, 떠나온 곳이 또 그리움이더라.’ 담장 대문 옆에 걸려 있는 시를 읽으며, 수많은 솟대가 서 있는 담장을 쳐다보니 바로 옆집이 ‘청량정사(淸凉精舍)’다.
청량정사는 ‘오산당(吾山堂)’이라고도 불렸다. 퇴계 이황이 공부하던 곳에 사림들의 합의로 1832년(순조 32년)에 창건됐다. 그 후로 이곳은 퇴계 선생을 기리는 수많은 학자들의 학문과 수양의 장소가 됐고, 1896년에는 청량의진(淸凉義陣)이 조직돼 의병 투쟁의 근거지가 되기도 했다.
청량정사를 지나 산길을 돌면 천년 고찰 청량사가 나온다. 한때는 신라의 고찰인 연대사와 망선암 등 크고 작은 27개소의 암자가 있었다. 창건 당시에는 승당 등 33개의 부속 건물을 갖췄던 대사찰이었다. 봉우리마다 자리 잡은 암자에서는 스님들의 독경소리가 청량산을 가득 메웠다고 한다. 하지만 조선시대로 넘어오며 숭유억불 정책에 따라 현재는 청량사와 부속 건물인 응진전만이 남아있다.
청량산의 최고봉인 의상봉은 화엄종의 시조인 의상대사가 입산수도 한 곳이었고, 보살봉, 연화봉, 축융봉 등 12개의 암봉과 어풍대, 밀성대, 풍혈대, 학소대, 금강대 등 11개의 대, 그리고 8개의 굴과 4개의 약수터가 있었다.
1544년(중종 39년) 당시 풍기군수 주세붕이 열두 봉우리의 이름을 자소봉, 탁필봉, 연적봉 등 지금의 이름으로 바꿨다. 불가의 산은 유가의 산으로 변했고 유교의 명산으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퇴계 이황이 평생 학문 탐구한 곳
최치원, 김생 등 학자들의 발자취와 이야기들이 많이 남아있다. 청량산은 옛 퇴계 가문의 산으로 그의 5대 고조부 이자수가 송안군으로 책봉되면서 나라로부터 받은 봉산이기도 했다. 퇴계는 평생을 이 산에 올라 학문을 탐구했으며 꿈에서도 이 산을 잊지 못했다.
퇴계는 시 ‘독서여유산(讀書與遊山)’에서 “피어오르는 구름을 보고 앉아서 미묘함을 알았고, 골짜기 끝에 가서 이르러 처음을 깨닫고자 했다”고 노래했다. 퇴계는 ‘청량산인’이라고 스스로 호를 지어 불렀을 정도로 청량산을 마음에 뒀다. 산을 유람하는 것은 책 읽는 것과 같았다고 한다. 청량사 불탑에서 바라보는 산은 화려하고 먼 골짜기는 오후 햇살의 푸르름으로 아득하다. 한겨울 함박눈이 내리다 그친 조용한 산사의 풍경을 잠시 그려본다.
태백 고원에서 발원한 낙동강은 석포, 승부, 분천의 산악지형을 굽이굽이 돌아 봉화군 명호면의 청량산(870m)・만리산(792m)・황우산(601m) 등 급경사지를 지나 안동호에서 잠시 멈춘다. 청량산은 축융봉을 기점으로 봉화와 안동으로 나뉜다.
퇴계는 “축융봉에 오르지 않은 사람은 청량산을 말하지 말라”고 했다. 축융(祝融)은 ‘서로 화합해 조화를 이루는 모습을 기린다’는 뜻이다. 축융봉에 올라야 청량산의 12봉우리 전체를 볼 수 있다는 의미다.
청량산 입구인 광석나루터에서 1㎞만 가면 안동 가송리 부락이다. 낙동강이 건지산(557m) 줄기를 휘돌아 흐르는 곳에 있는 반원형 마을이다. 낙동강 변으로는 고산정과 농암종택, 분강서원이 있다. 고산정은 퇴계 이황이 청량산을 오갈 때 자주 들러 경치를 즐기고 여러 편의 시를 남겼던 곳이다.
주세붕의 ‘청량산록’에 쓴 발문을 통해 퇴계는 청량산을 이렇게 적고 있다. “안동부의 청량산은 예안현에서 동북쪽으로 수십 리 거리에 있다. 나의 고장은 그 거리의 반쯤 된다. 새벽에 떠나서 산에 오를 것 같으면 오후 5시가 되기 전에 산 중턱에 다다를 수 있다.
비록 지경은 다른 고을이지만, 이 산은 실지로 내 집의 산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부형을 따라 괴나리봇짐을 메고 이 산에 왕래하면서 독서했던 게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낙동강과 정자, 한폭의 그림 연상
안동 예안의 온혜에서 청량산까지는 불과 40여 리로 한나절이면 갈 수 있는 곳이어서 퇴계는 제자들과 자주 청량산을 찾았다. 중간의 고산정은 퇴계 이황의 제자인 성성재 금난수가 세운 정자다. 축융봉 아래 쉼터의 역할도 했으리라. 낙동강과 정자가 조화를 이뤄 한 폭의 그림을 연상케 하는데, 이곳이 바로 도산구곡 중 제8곡인 고산곡이다.
고산정에서 1.5㎞를 가면 농암종택과 분강서원에 이른다. 왕의 잘못된 판단이나 정책을 바로잡는 역할을 했던 사간원 정언으로 재직하던 농암 이현보는 연산군 때 왕의 미움을 받고 안동으로 유배됐다.
농암종택은 안동호가 만들어지며 분천마을의 수몰로 분강서원과 함께 지금의 자리로 이전해 건립됐다. 농암종택의 ‘예일당’ 아래 낙동강을 따라 걷다 보면 기암의 학소대를 만난다. 다시 강길과 산길을 따라 단천교에 이르면 육사 문학관과 퇴계종택을 만난다. 강 건너 왕모산(648m) 자락에는 단천리, 원천리 등 낙동강 오지 마을들이 평화롭다.
/ 출처 한국아파트신문 2024.12 이성영 여행객원기자 ㈜한국숲정원 이사. 산림교육전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