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이런거 저런거/군대이야기

북파공작대 육군첩보대 선갑도부대 HID북파공작원

by 구석구석 2023. 1. 31.
728x90

1967년에 북한의 침투 사건은 114건으로 급증했는데 그중 69건은 무장 공격이었다. 이로 인해 미군 16명과 국군 115명 그리고 민간인 22명이 사망했다. 북한측 '무장공비'도 228명이 사망했다. 대표적 사건이 67년 1월 19일 동해에서 한국 해군 PCE-56함이 북한측 해안포 공격으로 침몰해 장병 39명이 사망한 사건이다. 그해 5월에는 북한 무장군인들이 DMZ 밖에 있는 미 2사단 막사를 폭파시켰다.

한국군도 다양한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이에는 이, 눈에는 눈'으로 대응했다. '간첩 잡는 방첩대'까지 북파 무장공작에 나설 정도였다. 특히 북파 무장공작의 주축인 육군 첩보대는 육상뿐만 아니라 해상과 공중(공수)에서 다양한 '응징보복 저강도 전쟁'을 전개했다.

한반도에서 게릴라전을 벌이면 한국군의 베트남전 추가파병을 막고 미국도 '두개의 전쟁'을 수행하진 못할 것이라는 김일성의 전략은 결과적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다음은 '한국현대사와 박정희시대에 관한 가장 완벽한 평가서'라고 불린 미 하원 국제관계위원회 국제기구소위의 프레이저(Fraser) 보고서의 한 대목이다.

"(한미 간의) 추가파병의 진전된 논의와 일치하여, 북한은 휴전선 도발, 침투, 살상의 극적 증가로 특징되는 대남교란 캠페인을 시작했다. 1967년 한 해만 하더라도, 침투로 인해 131명이 죽었다. 한 해 전의 35명과 비교하면 상당한 증가였다."

김일성의 '저강도 전쟁'으로 한국군의 추가 전투사단 파병은 중단되었지만, 한국군 역시 이에 맞서 '되로 받고 말로 갚는' 응징보복전을 감행했다. 특히 1967~1969년 3년 동안 수많은 북파 무장공작원들이 끊임없이 반복된 응징보복전의 '소모품'으로 희생되었다.

728x90

1967년 여름 육군 첩보대 인천101지구대와 속초903지구대서부·중동부 전선 5개 군단에 배속된 201문산대·202춘천대·203양구대·205운천대·206전곡대의 북파 무장공작대 8개팀 48명이 서부·중동부 전선에서 동시에 침투한 것도 응징보복의 일환이었다.

8개팀이 군사분계선을 넘어 적진으로 침투해 북한군 군관 막사 건물을 폭파∙기습공격해 적병을 사살하고 장비를 노획해 오라는 중앙정보부와 한남동 HID본부의 전통(電通) 지령에 따른 것이었다. 북파 무장공작대 1개팀은 장교인 팀장과 척후조(1명)∙폭파조(2명)∙전후방 경계조(2명) 등 6명으로 편제되었다.

인천101지구대(위장명칭 '한국문화사')의 번개1팀과 번개2팀은 각각 인제 12사단과 양구 21사단 관할 GOP(전방초소) 철책선 통문으로 침투해 임무를 완수하고 귀환하라는 지시를 하달받았다.

이행근 팀장(육군 대위)이 지휘한 번개2팀은 북한군 군관 막사 폭파 임무를 완수하고 천신만고 끝에 귀환했다. 하지만 최강형 팀장(육군 대위)이 지휘한 번개1팀의 팀장과 김덕재∙김창덕∙장정혜∙전운성 등 5명은 살아서 돌아오지 못했다. 속초903지구대의 북파 무장공작대원 강교춘∙김용태도 '불귀의 객'이 되었다.

67년 8월 응징보복 작전에서 전사한 7명 가운데 장교인 최 팀장을 제외한 6명은 인천 국립소년직업훈련소 출신의 소년병이었다. 당시 국립소년직업훈련소 '운영규정'(보건사회부령 제155호)에 따르면 입소 연령은 '시설에 수용된 14세부터 18세 이하의 아동'으로 제한되었다. 정부가 '고아이면서 신체가 건강한 아동들'을 데려가 북파 무장공작의 '소모품'으로 쓰고 버린 것이다.

1967년 4월 20일 판문점 군사정전위원회 244차 본회의장 주변에 전시된 북한 무장간첩 장비. 군사분계선 남방 1900m까지 침입했다가 피살된 북한 무장간첩 3명으로부터 회수한 총기와 실탄 등 노획 무기와 장비들이다. [국가기록원]

그보다 더 충격적인 것은 적진에서 전사한 소년병들의 시신 인수를 대한민국이 거부한 사실이다.

인천101지구대 번개1팀 폭파조 홍재곤(당시 17살)은 1967년 8월 북파 무장공작 임무 수행후 인천 월미도에서 체력 단련 및 공작 훈련 대기중에 번개1팀의 전사 소식을 들었다. 팀원 6명 중 척후조 신○환을 제외하곤 전원이 북한군과 교전중 전사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그보다 앞서 속초903지구대로 배치된 강교춘∙김용태도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불과 보름여 전에 홍천 갈림길에서 인제와 양구로 헤어지면서 서로 부둥켜안고 등을 두드리면서 "우리 죽지 말고 임무를 성공해 반드시 살아 돌아와 다시 만나자"고 약속했던 전우이자 국립소년직업훈련소 동기들이었다. 번개2팀의 홍재곤과 소년직업훈련소 동기생 이종승(폭파조), 두 사람은 '반드시 살아돌아와 다시 만나자'고 했던 동기생들의 마지막 모습이 어른거려 울고 또 울었다.

하지만 전우와 동기생을 잃은 슬픔은 곧 분노로 바뀌었다. 북한측이 판문점 군사정전위원회 본회의장 옆에 전우들의 시신 7구와 유류품(遺留品)을 전시해 놓고 남측의 정전협정 위반을 강력히 항의했는데, 유엔사측은 중앙정보부와 육군 첩보대의 부인 방침에 따라 "북측의 자작극"이라며 북파 무장공작 사실을 강력 부인했기 때문이다.

당시 홍 씨와 전우들이 판문점 현장에 간 육군 첩보대 관계자들의 전언에 따르면, 북측은 북한군 복장을 한 전우들의 시신 7구와 북한군 배낭, 그리고 개머리판 없는 M2카빈소총과 수류탄 등 노획품을 판문점 회담장 주변에 '정전협정 위반 증거품'으로 전시해 놓고 본회의에서 강력 항의했다.

북파 무장공작원의 적지역 침투시 개인 휴대장비 [그래픽 김상선]

M2카빈소총 탄창 4개(120발), 세열수류탄 4개, 인명살상용 크레모아와 유도선, 건물 폭파용 콤포지션 C-4 폭약, 대검, 수통, 군관 납치용 포승줄, 목함지뢰 탐침, 나침반, 5만분의 1 지도, 쌍안경, 판초우의, 비상식량(쌀가루와 우유를 압축한 6박7일분) 등 북파 무장공작원의 20가지 침투장비를 그대로 전시한 것이다.

101지구대의 번개1∙2팀 전우들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인천 장수동 소래산 육중봉쇄 침투훈련장에서 30kg 모래배낭을 메고 1시간에 20km를 주파하는 훈련을 감내한 것은 25kg에 달하는 이 침투장비를 짊어지고도 민첩하게 기습작전을 성공하고 살아남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유엔사(한미) 측은 북측이 침투 중에 전사한 북파 공작원 사체의 확인을 요구하자 "우리 군의 병사가 아니다"라고 부인했다. 오히려 "우리는 정전협정을 위반한 사실이 없다"면서 "시신에 북한 군복을 입혀 놓고 꾸민 자작극"이라고 덮어 씌우기로 일관했다. 홍 씨는 "당시 전우들이 살아서 그 얘기를 들었다면 억울해서 눈을 감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홍 씨는 "정부가 인간의 존엄성과 인도적 견지에서 북파 무장공작 사실을 인정하고 전우들 시신을 인수했다면 시신이나마 가족의 품에 안겼을 것인데 이를 부인한 것은 북파 공작원을 '일회용 소모품'으로 취급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홍 씨는 그로부터 1년 뒤인 68년 8월 북측 강원도 평강군에 침투해 '호랑이공작' 임무를 수행할 때 북파 공작원의 토막난 시신을 실제 목격했다.

팀장 김일동 대위와 척후조 임창호∙폭파조 홍재곤∙전방경계조 최운권∙후방경계조 이용우 등 5인이 수행한 '호랑이공작'은 아군 3사단(백골부대) 지역에서 북강원도 평강군에 침투해 적 잠복호를 폭파하고 잠복조를 사살하고 귀환하는 응징보복 전선공작이었다. '호랑이'라는 공작명이 붙은 까닭은 단순했다.

북파 무장공작원은 '북괴군('당시 군의 공식 용어) 복장으로 임무를 수행하고 귀환할 때 남파공작원 침투에 대비해 매복한 아군의 총에 맞는 '개죽음'을 당하지 않으려면 반드시 침투한 지역으로 되돌아와야 한다. 다른 아군 부대에서는 북파 공작원 침투 및 복귀 사실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호랑이'라는 암구호는 백골부대 수색대 및 매복조에 아군임을 알리는 생사가 걸린 구호였다.

전방 부대는 남파공작원 침투 예상지역에 사계청소(射界淸掃)를 위해 제초제를 살포한다. 제초제를 살포한 지역은 나무와 풀이 자라지 않는다. 1960년대 후반~1970년대 초반에 군사분계선 접경지역에 근무한 장병들 가운데 일부가 고엽제 노출 피해로 인한 보상을 받게 된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1968년 7월 베트남에 파병된 국군이 호랑이를 잡은 동료들과 기념촬영을 하는 모습 [정부기록사진집]

호랑이공작 팀은 68년 8월 하순 아군 3사단 지역에서 제초제가 살포된 군사분계선을 넘어 적진 DMZ 들어가자마자 고인돌처럼 넓고 납작한 바위에 오른팔과 왼팔, 두 다리, 그리고 목까지 절단된 끔찍한 시신을 목격했다. 한 맺힌 표정으로 눈을 부릅뜬 그 시신은 직감으로 북한군에 사살된 단독첩보수집 공작원이었다.

1개팀 5~6명이 폭파∙납치∙사살 임무를 수행하는 무장공작원과 달리 첩보수집∙정찰 공작원은 단독으로 임무를 수행했다. 북측이 단독공작원의 토막 낸 시신을 눈에 잘 띄는 곳에 전시한 것은 북파 공작원들에게 공포심을 불러일으켜 사기를 꺾고 투항을 유도하려는 고도의 심리전이었다.

대원들은 잠시 침투를 멈추고 고개 숙여 묵념으로 고인을 추모했다. 이어 척후조가 잘려진 몸통의 배 위에 조그만 돌 하나를 올려 놓는 것으로 예(禮)를 다하고 대원들은 침투를 계속했다. 이런 상황에서 대남 확성기에 '김일성 장군님의 품으로 오라'는 심리전 방송이 울려 퍼지자 대원들은 오히려 '빨갱이 새끼들 다 죽여버리겠다'는 적개심으로 치를 떨었다.

당시는 남북한 공히 특수부대 또는 유격대가 군사분계선을 넘나들며 적진에서 폭파·납치·사살하는 '전선공작'을 벌인 것이 비일비재한 일상이었다. 하지만 두 눈을 부릅뜬 공작원의 시신을 목격한 북파 무장공작원들은 판문점에 전시한 7구의 시신도 DMZ 북방한계선 너머 적진의 어느 산야와 골짜기에 이리저리 뒹굴며 쓸려 다닐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저려왔다.

 

54년이 지났지만 '비공개'로 분류된 1967년 군사정전위 회의록

 

북한측이 북파 무장공작원 시신과 유류품을 판문점에 전시해 놓고 항의한 시기는 번개1∙2팀의 침투공작 시점과 중요 도발 사건 정황을 고려할 때 군사정전위 제254차 본회의(67년 9월 8일 개최)로 추정된다. 다만 1967년을 전후한 시기의 군사정전위 회의록이 '비공개'(기밀)로 묶여 있어 관련 사실을 증언이 아닌 문서기록과 사진으로 입증하기는 어렵다.

'공공기록물 관리법'에 따르면 30년이 지난 비공개 공공기록물은 공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이에 따라 정부는 지난 2006년부터 그동안 공개되지 않은 군사정전위 일부 기록(291~369차 본회의 회의록)을 공개했다. 본회의 개최 시기로 보면 69. 8. 14~75. 12. 10 기간의 기록이다.

하지만 이 기간에도 민감한 내용이 포함된 일부(제298~300차) 본회의 기록은 비공개이고, 특히 1969년 8월 이전 시기의 군정위 회의록은 통째로 '비공개'로 분류돼 있다. 법령 상의 비밀이나 국익 침해 등을 이유로 비공개한 경우이다.

이런 경우 정부는 관련 규정에 따라 해마다 비공개로 재분류된 기록물의 유형별 현황을 공고하게 돼 있다. 지난 3월 19일 국가기록원이 비공개로 재분류한 기록물 현황에 따르면, 군정위 회의록은 국방 등 국익 침해 유형(1만7765건)으로 분류된다. 54년이 지났지만 1967년 254~255차 본회의 회의록은 '비공개'인 것이다. 회의록은 물론 관련 사진이나 영상도 비공개이다.

HID북파공작원 유족동지회는 앞서 공개한 군정위 291~369차 본회의 회의록을 열람해 1969년 8월부터 1972년까지 3년간 침투했다가 체포된 북파 공작원 41명의 명단을 공개한 바 있다. 유족동지회는 아울러 1953년부터 1968년까지의 회의록이 공개되면 북한에서 체포돼 돌아오지 못한 공작원 140여명의 명단도 추가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실제로 군사정전위 제203~214차 본회의 발언록을 담은 '남북협상사례'(1994년, 통일원 남북대화사무국)를 보면 당시 정부의 보도통제 등을 이유로 언론에 공개되지 않아 전혀 관련 기록이 없는 민감한 사건들이 발견된다(이 책자는 남북대화사무국이 심리전 전문가인 윌리엄 P. 야보로 미군 소장이 유엔측 수석대표로 근무할 때의 본회의 발언록을 대북협상 참고자료로 삼기 위해 발간한 것이다).

정전협정 및 군사정전위의 산증인인 이문항 씨의 당대의 기록으로 꼽히는 'JSA-판문점(1953~1994)'에서도 해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이 책의 부록에는 1967년 8월 27일 발생한 북한군의 국군초소 기습 사건으로 국군 6명이 사망하고 13명이 부상해 9월 8일 254차 본회의에서 이를 안건으로 다룬 것으로 기록돼 있다.

1970년 1월 당시 판문점 군사정전위 본회의장 주변에 전시된 북한측 전시물 [국가기록원]

북한군 초소를 기습한 북파 무장공작 소년병 6명이 전사한 시점과 겹치는 기간에 열린 군정위 본회의에서 공교롭게도 '북한군의 국군초소 기습으로 국군 6명이 사망'한 사건이 안건이 된 것이다. 당시 남북한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하루가 멀다 하고 응징과 보복의 '저강도 전쟁'을 반복하던 시기였다.

또한 남북한은 그동안 군정위 회의에서 서로 수십만 건(북측 42만여 건, 남측 45만여 건)의 정전협정 위반 건을 항의하면서도 자신의 위반 사실은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공개된 군정위 본회의와 비서장회의 회의록을 보면, 북한만 남한 어부를 납북한 것이 아니다. 남측 첩보대도 고의건 실수건 북한 어민을 납남(拉南)한 적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럼에도 조∙중(朝中)측뿐 아니라 유엔사(한∙미)측도 정전협정 위반 사실을 시인하지 않고 상대방에게 덤터기를 씌우는 설전으로 일관해왔다.

예를 들어 북측은 제168차 본회의(63. 5. 17)에서 서해에서 남측 무장선박이 조업중인 북한 어민을 공격해 살해한 사건을 항의하며 납치된 어민(이윤근)의 송환을 요구했다. 이에 유엔측은 북측이 주장한 사건을 부인하며 오히려 사흘 전에 북측 선박이 서해에서 남측 어선을 공격해 남측 어부들을 살해한 사건을 항의했다.

앞서의 야보로 소장이 수석대표로 참여한 207차(65. 5. 10) 본회의 기록에도 북측이 남측 정찰기의 북측 영공 침입과 무장선박의 연해 침입에 이은 어로작업중인 고깃배와 어민(황해남도 연안군 발산리 협동농장어업반 황찬곤∙염경수) 납치에 대한 항의 및 반환 요구가 나온다. 이에 유엔측은 북측의 '상투적 비난'이라고 잡아뗐다.

한편 1967년 당시 전사한 북파 공작원의 시신을 인수했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군정위의 산증인인 이문항 씨의 '전사자 유해송환' 기록과 남북대화사무국이 펴낸 〈판문점 수첩〉(1994년)의 '군정위 창구를 통한 시체 송환 현황'에 따르면, 1954년부터 1979년까지 한국군과 미군의 시신(1~3구씩)을 군정위 창구로 송환받은 사례가 간헐적으로 기록돼 있지만, 1967년에 송환된 시신은 한 구도 없다.

1968년 6월 26일 군사정전위 본회의장 주변에 전시된 북한 무장간첩들로부터 노획한 장비들 [국가기록원]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 이후 '비전향 장기수' 63명이 인도적 차원에서 북한으로 송환되었다. 그중 대부분이 남파 공작원 출신이다. 북한은 이들의 송환을 요구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통 큰 결단'과 애민사상에 따른 것으로 칭송한다. 그가 '남파 간첩'의 송환을 요구함으로써 정전협정 위반을 사실상 시인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 정부는 북한에 침투했다가 체포된 북파 공작원들에 대해 송환을 요구하기는커녕, 북측이 북파 공작원 사체의 확인을 요구하자 "우리 군 병사가 아니다"라고 부인했다. 당연히 시신의 송환은 거부되었다. 국군의 시신임을 확인하고 시신을 인수할 경우 정전협정 위반을 시인함으로써 국익을 해친다는 핑계였다.

하지만 군사정전위 자료에 따르면 한국전쟁 휴전 이후 정전협정 위반 건수는 북한측이 42만여 건, 남한측이 45만여 건이나 된다. 상호간에 수십만 건의 정전협정 위반 사례가 있는데, 정전협정 위반 사실이 두려워 전사자의 시신을 인수하지 않았다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그보다는 불법행위로 인한 군 조직과 국가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서라고 보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다.

그동안 북파 공작원들이 적진에 침투해 임무를 수행하고 복귀하는 과정에서 한두 명이 사살돼 '미복귀'나 '실종' 처리된 사례는 적지 않았다. 하지만 북측이 침투 과정에서 사살된 북파 무장공작원 시신을 무더기(7구)로 전시해 놓고 인수해 가라고 하는데도 정부가 '북한의 자작극'이라며 인수를 거부한 사실이 복수의 관련자 증언과 정황 기록으로 확인되기는 처음이다.


UPI뉴스 / 김당 대기자 dangk@upinews.kr

 

 

북파공작원 핵심장교 최초 증언 '대북 작전 비사'

"32명의 북파공작 부대원들은 사형수와 무기수들이었으며 사면을 조건으로 채용됐다."

HID(북파공작원) 핵심 장교들의 최초 증언을 월간조선이 보도했다.

북파공작 장교 출신 모임 ‘진백회(眞白會)’ 회장 김원한(78·예비역 대령)씨와 ‘특수임무수행자 복지진흥회’ 명예회장 이춘국(78·예비역 대령)씨는 월간조선에서 “공군의 '실미도 부대'처럼 육군도 대북 특수공작부대인 '선갑도(仙甲島)부대'를 1972년 7·4 남북 공동성명 발표 직후까지 운영했다”고 증언했다.

선갑도는 서해에 있는 섬으로 행정구역은 인천시 옹지군 자월면 승봉리다. 현재 무인도이며, 6·25 전쟁 때는 미국 극동군 사령부 주한연락처 8240부대가 주둔하기도 했다. 대북 특수임무공작부대는 1968년 1월 21일 김신조를 비롯한 북한군 특수부대 124군 부대 소속 무장공비 31명이 청와대를 공격했다 실패한 일이 발생한 후 생기기 시작했다.

“영화로 이름 알린 실미도 부대는 민간인들을 선발했지만 선갑도 부대는 무기수와 사형수 32명을 선발했으며 실미도 부대는 우리와 게임이 안 된다”는 게 이씨의 증언이다. 이씨는 “1972년 남북공동성명 발표 후 부대원들을 사면 조치하고 1인당 150만원을 지급했다”고 말했다. 일부 선갑도 대원 생존자들의 ‘제대로 보상을 못 받았고 사면도 엉터리였다’는 주장에 대해선 “사면하는 데 법조항이 없다고 해서 관계 법률을 전부 뒤져 ‘장관급의 승인이 있으면 사면이 된다’는 예외 조항을 직접 찾아내기까지 했다”고 말했다.

 

선갑도 부대원들은 실제 대북침투작전으로 1969년 백령도로 2회 출정했으나 중앙정보부 승인이 안 떨어져서 돌아온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중앙정보부 차장이었던 이철희씨가 잘못하다가는 큰 문제가 생길 것 같으니 그만두라고 했다는 것이다.  김씨는 “1·21 청와대 습격 보복 차원에서 첩보부대 공작과장을 맡고 있던 1968년 11월 장교 공작원 6명과 공작원 6명으로 팀을 구성해 DMZ의 북한군 GP를 공격, 소련 군사고문단 1명을 포함 23명을 사살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날의 공로로 이들 팀에는 충무무공 훈장 5개 등 훈장이 12개가 수여됐다고 한다. “북한에 대한 직접적인 침투공작은 1980년대까지 이어졌다”고 김씨는 기억했다.

 

이들은 “6·25 때 모택동(毛澤東)이 밀사를 보내 유엔군이 38선을 돌파할 시 중공군이 개입하겠다는 것을 경고했다” “일본의 ‘오무라 난민수용소’를 대북 침투 우회 루트로 이용했다”는 내용 등을 증언하기도 했다. 월간조선 2007.6월호 전재

 

인천 앞바다 선갑도에서 훈련을 받았던 이 부대의 정식 명칭은 육군 첩보부대 산하 902정보부대 803대로 요인암살을 목표로 했던 실미도 부대와 달리 발전소 등 북한의 기간시설을 폭파하는 임무를 위해 비밀 훈련을 받았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