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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 - 제릉 후릉

by 구석구석 2023. 3.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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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의 제릉과 후릉

42기 조선왕릉 중 남한에 있는 40기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돼 있다. 북한에 소재한 두 기의 능은 거기서 빠져 있다. 하나는 태조의 첫 번째 부인 신의고황후 한씨의 제릉이고, 다른 하나는 정종과 정안왕후의 후릉이다.

태조 첫부인 한씨, 8남매 키우며 내조

태조의 첫 번째 부인으로 향처(鄕妻)인 신의고황후 한씨(1337~1391)는 안변이 본관인 안천부원군(安川府院君) 한경(韓卿)의 딸로, 1337년(고려 충숙왕 복위 6) 함남 영흥에서 태어났다. 열다섯 살 되던 1351년(고려 공민왕 즉위) 같은 고향 사람 이성계와 혼인했다. 실록에는 이성계가 고려의 장수로 수십 년 동안 전쟁터를 오가느라 집안을 보살필 여유가 없었는데, 부인 한씨가 집안을 다스려 뒷바라지했다고 기록돼 있다. 또 그녀는 투기하지 않는 성품으로 첩과 시종들을 예(禮)로써 대우했다고도 쓰여 있다.

제릉 능침

한씨는 이성계와의 사이에 방우(진안대군), 방과(정종), 방의(익안대군), 방간(회안대군), 방원(태종), 방연 등 아들 여섯을 뒀다. 고려의 관직을 역임한 맏이 방우는 조선 개국 이듬해 술병으로 죽었다. 셋째 방의는 제2차 왕자의 난 때 관직을 사퇴하고, 태종 즉위 후 만년에는 병으로 두문불출하다가 4년 뒤에 죽었다. 넷째 방간은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으나 방원에게 패했다. 친형제였던지라 죽임을 면하고 유배된 그는 1421년 홍주(지금의 홍성)에서 병들어 죽었다. 막내 방연은 고려 우왕 때 과거에 급제했으나 개국 전에 죽어 고려의 관직인 원윤(元尹)을 증직 받았다. 태종 때 문안군에 추증되고, 고종 때 덕안대군으로 추봉됐다. 한씨는 딸도 둘을 뒀는데 경신공주와 경선공주다. 

개경(開京)에서 스물한 살 연하의 신덕왕후 강씨를 경처(京妻)로 맞은 이성계는 강씨에게서 장녀 경순공주(생년 미상), 1381년 장남 방번, 1382년 차남 방석을 낳았다. 따라서 한씨는 10여 년을 경처 강씨 뒷전에서 이성계의 조강지처 역할을 했던 셈이다.

한씨는 조선 건국 전인 1391년(고려 공양왕 3) 9월 55세로 세상을 떴다. 조선의 첫 왕비는 경처 강씨의 몫이 됐다. 그녀가 죽자 송경(현 개성)의 성(城) 남쪽 해풍군(海豐郡) 치속촌(治粟村) 언덕에 장사지냈다. 조선 개국 후 그녀에게는 절비(節妃)라는 시호가 올려지는 한편, 묘도 능으로 추봉돼 능호를 제릉이라 하고 경기도 해풍군 북율촌(北粟村)으로 천장했다. 
 

대한제국 때 신의고황후로 추존

1398년 정종이 왕위에 오르자 신의왕후(神懿王后)로 추존했다. 1408년(태종 8)에는 제릉을 대대적으로 개수하고 신의왕후에게 ‘승인순성신의왕태후(承仁順聖神懿王太后)’라는 시호를 추상했다. 또 1410년(태종 10)에는 태조와 함께 신의왕태후의 신주를 종묘에 부묘했다. 세종 때인 1430년(세종 12) 신의왕태후와 원경왕태후(元敬王太后, 태종비)의 시호에만 ‘태(太)’자가 있는데, 이는 고려의 옛 제도로 조선의 전례(典禮)에 합당치 않다는 논의가 제기됐다. 이에 따라 신주 이외에 제사의 축문 등에서는 ‘태’자를 빼고 신의왕후로 일컫다가 숙종 때인 1683년(숙종 9) 신주에서도 ‘태’자를 빼면서 ‘승인순성신의왕후’로 고쳤다. 대한제국 때인 1899년(광무 3) 고종이 태조를 황제로 추존하면서 부인 신의왕후도 신의고황후(神懿高皇后)로 추존했다.

태조와 신의고황후 한씨의 둘째 아들 정종(1357~1419, 재위 1398~1400)은 1357년(고려 공민왕 6) 함흥 귀주동 이성계의 사저에서 태어났다. 원래 휘(諱)는 방과(芳果)인데 훗날 왕위에 오르면서 경(曔)으로 고쳤다. 용맹과 지략이 뛰어났던 그는 일찍이 아버지 이성계를 따라 출정해 무공을 세웠고, 1390년에는 예산에서 왜적과 싸워 대승을 거뒀다. 1392년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자 왕자로서 영안군(永安君)에 봉해지고 의흥친군위 절제사로 임명됐다. 1398년(태조 7) 8월 26일 태조의 와병 중에 방원이 일으킨 제1차 왕자의 난으로 폐위된 이복동생 방석의 뒤를 이어 왕세자로 책봉됐다.

이때 방원의 추종자들은 태조에게 정안군(방원)을 세자로 삼으라 청했으나 정안군은 사양하며 영안군을 세자로 세우라 청했다. 영안군은 ‘당초부터 나라를 세워서 오늘날의 일까지 이르게 된 것은 모두 정안군의 공로이니 내가 세자가 될 수 없다’며 사양했으나 정안군이 고사하자 할 수 없이 받아들였다. 세자로 책봉된 그는 9월 5일 태조의 양위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오늘날 개성인 송경(또는 송도)에 세워진 조선은 건국 초 한양과 송경을 오가며 수도를 몇 차례 옮겼다. 태조는 1394년(태조 3) 10월 송경에서 한양으로 천도했다. 그러나 정종은 1399년(정종 1) 3월 송경으로 환도했다. 후에 태종은 1405년(태종 5) 9월 다시 한양으로 환도했다. 정종은 재위 중 정무보다는 격구와 사냥 등을 즐겼는데, 임금이 격구를 즐기는 것을 근심하던 대사헌 조박에게 자신이 격구를 즐기는 것은 ‘병이 있어 수족이 저리고 아프니 때때로 격구를 해 몸을 움직여서 기운을 통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또 사냥도 즐겨  노루나 꿩을 잡으면 즉시 태상전(太上殿)으로 보내 아버지에게 드리게 했다.

1400년(정종 2) 1월 아우 방간이 박포와 함께 일으킨 제2차 왕자의 난을 방원이 진압하자 정종은 방간을 동북면의 토산(兎山)으로 추방했다. 이어 2월 1일에는 방원의 심복인 하륜 등이 정안공을 세자로 세우기를 청하자 정종은 동생인 방원을 세제가 아닌 세자로 삼는다는 전지를 내렸다. 같은 달 박포는 주살했으나 방간은 안산군(安山郡)으로 옮겨 안치하면서 땅과 식읍을 줬다. 정종이 왕세자로 책립된 방원에게 군국의 일을 맡김에 따라 방원은 사실상 국정을 주무르면서 왕족, 권신 등의 사병을 혁파해 삼군부에 편입시켰다.

사실상 허수아비 왕이 된 정종은 그해 11월 11일 왕세자에게 선위하겠다는 교서를 내렸고, 이틀 후 방원은 수창궁에서 왕위(태종)에 올랐다. 태종은 그에게 ‘인문공예상왕(仁文恭睿上王)’이라는 존호를 올렸다. 상왕이 된 정종은 이후 인덕궁에서 지냈으며 1418년 태종의 선위로 세종이 왕위에 오르자 노상왕(老上王)이 됐다. 상왕(태종)과 정종이 둘 다 상왕인 까닭에 정종을 노상왕이라 구별한 것이다. 왕위에서 물러나 20년 가까이 격구, 사냥, 온천 등을 즐기며 여유롭게 지내던 그는 1419년(세종 1) 9월 6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세종은 죽은 상왕의 시호를 ‘온인공용순효대왕(溫仁恭勇順孝大王)’이라 하고, 능호를 후릉(厚陵)이라 했다. 세종은 그에게 묘호를 올리는 대신 명 황제가 내린 공정왕(恭靖王)이라는 시호로 종묘에 신주를 모셨다. 이로 인해 이후 정종은 오랫동안 공정왕 또는 공정대왕으로 불리게 됐다. 임금이 죽으면 시호와 함께 종묘에 부묘하기 위한 조(祖)·종(宗)의 묘호를 올리는데 정종은 묘호를 받지 못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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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후 262년 만에 정종(定宗) 묘호 받아

공정왕에게 정종이란 묘호가 올려진 것은 사후 262년이 지나서였다. 정종이 이처럼 오랫동안 왕으로서 예우받지 못한 것은 그가 죽어 묘호와 시호를 정할 때 했던 세종의 말에서 비롯됐다. 세종은 신하들에게 자신은 ‘죽은 상왕에게 (조정에서 올리는) 사사 시호(私諡)는 올릴 수 없고, 단지 (명나라 황제가) 하사하는 시호(賜諡)만 쓰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세종의 이 말은 이후 금과옥조처럼 여겨졌다. 공정왕의 묘호 문제가 거론될 때마다 조정 대신들은 태종과 세종이 공정왕의 묘호를 올리지 않은 데는 ‘반드시 깊은 뜻이 있었을 것(必有深意)’이라는 판에 박힌 대답으로 논의를 피했다.

이 문제를 처음 거론한 이는 예종이었다. 1469년(예종 1) 예종은 공정대왕에게 묘호를 올리고자 했으나 대신들은 발을 빼기에 바빴다. 신숙주 등은 ‘태종은 선위 받고도 칭종하지 않았고 세종조에는 예(禮)가 갖춰졌는데도 칭종하지 않았으니 그 까닭은 모르겠지만 반박 논의가 있어서 그랬던 게 아니겠습니까’라며 물러섰다. 정인지도 ‘칭종하지 않은 데는 반드시 뜻이 있었을 것 입니다’라며 반대 의사를 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종은 공정왕의 묘호를 희종(熙宗)이라 정했음이 성종 때 밝혀진다. 또 숙종 때는 예종이 공정왕의 묘호를 안종(安宗)으로 정했었다는 문헌에 대해서도 언급된다. 그러나 예종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공정왕에게 묘호를 올리는 일은 실행되지 못했다.

세조의 장남 의경세자는 요절했고, 그의 아들 성종이 왕위에 올라 1470년 아버지를 의경왕(懿敬王)으로 추숭했다. 이어 1475년(성종 6)에는 의경왕을 명 황제로부터 받은 시호인 회간왕(懷簡王)으로 고치고, 같은 해 10월에는 회간왕의 묘호를 덕종(德宗)으로 올려 종묘에 부묘하기로 정했다. 덕종의 부인이자 성종의 어머니인 대왕대비(소혜왕후 또는 인수대비)까지 나서 부묘 장소에 대해 논의했다. 이때 정인지 등이 종묘 정실(正室)의 공간 부족을 이유로 공정왕을 정실에서 영녕전(永寧殿) 협실(夾室)로 옮기자고 건의하면서 공정왕은 정실에서 쫓겨났다.

역시 성종 때인 1482년(성종 13) 후손 이효성이 공정왕의 묘호를 추상해달라고 상소했다. 신료들은 ‘태종과 세종의 깊은 뜻’을 들어 반대했다. 결국 성종은 공정왕의 묘호를 ‘종(宗)’으로 할 수 없다고 결정했다. 그 후 1515년(중종 10)에도 이장손 등 공정왕 후손들의 상소가 있었으나 중종은 선대 왕들이 거행하지 않은 일이라며 묘호를 올릴 수 없다고 전교했다.

1681년(숙종 7) 5월 왕실 족보인 선원계보 교정청(璿源系譜校正廳)에서 공정대왕의 묘호가 빠져 있다고 숙종에게 보고하면서 다시 논의가 이뤄졌다. 마침내 그해 12월 공정대왕의 묘호를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크게 염려했다’는 뜻으로 ‘정종(定宗)’이라 정했다. 이때 역대 왕들의 시호는 모두 여덟 글자인데 공정대왕에게만 네 글자의 시호를 올렸던 것은 전례(典禮)에 어긋난다는 의견이 제시됐다. 이에 세종 때 올린 묘호에 인 ‘공정온인순효대왕(恭靖溫仁順孝大王)’에 ‘정종’이란 묘호를 추상하는 동시에 시호에 ‘의문장무(懿文莊武)’ 네 글자를 더해 ‘정종공정의문장무온인순효대왕(定宗恭靖懿文莊武溫仁順孝大王)’으로 신주를 고쳐 썼다. 또한 정안왕후에게도 ‘온명장의(溫明莊懿)’라는 휘호를 추상했다.

 

정종 아들 사칭한 지운 끝내 참형

흔히 정종은 동생 방원을 두려워해 왕권에 욕심부리지 않았던 인물로 알려져 있는데, 다른 면을 보여주는 일화가 실록에 등장한다. 그는 10명의 후궁에게서 15남 8녀를 뒀다. 1398년 왕위에 오른 지 두 달 후 그는 왕이 되기 전 첩이었던 유씨(劉氏)를 후궁으로 맞아들였는데 대사헌 조박의 집안 누이였다. 이미 다른 남자와 혼인했던 유씨에게는 불노(佛奴)라는 아들이 있었다. 

정종은 모자를 궐에 들여 유씨를 가의옹주(嘉懿翁主)로 책봉하고 그 아들 불노를 원자(元子)라 일컬었다. 원자는 세자로 책봉되기 전 임금의 맏아들을 부르는 말이니 다음 임금은 자신이라 여겼을 방원을 긴장하게 했다. 방원의 추종자들이 들고일어나자 정종은 불노가 자기 자식이 아니라 맹세하고 궐 밖으로 쫓아냄으로써 사건이 마무리됐다. 그러나 쫓겨난 불노는 그 후로도 자신이 상왕의 아들이라 주장하다가 태종 때 결국 공주에 안치됐다.

또 정종에게는 기매(其每)란 여종이 있었는데 그녀가 바람을 피워 낳은 아들 하나가 정종 사후 머리를 깎고 절로 들어가 지운(志云)이란 법명으로 중이 됐다. 그는 자신이 임금의 아들이라 사칭하고 다니다 고을 현감에 의해 체포돼 의금부로 압송됐다. 당시 상왕이던 태종은 그에게 의식을 하사하고, 앞으론 왕자라 사칭하지 말고 멀리 도망가라고 명했다. 그러나 그는 풀려나서도 다시 사칭을 계속하다가 잡혀 와 결국 참형에 처해졌다.

후릉능침

정종비 정안왕후(定安王后) 김씨(1355~1412)는 본관이 경주인 증 문하시중 김천서(金天瑞)의 딸로, 1374년(공민왕 23) 방과와 혼인했다. 1398년 영안군이 왕세자로 책봉되자 덕빈(德嬪)에 봉해졌고, 정종이 왕위에 오르자 덕비(德妃)로 책봉됐다. 실록에는 그녀가 ‘덕이 있고 투기하는 마음이 없어 내조가 대단히 많았다’고 쓰여 있다. 

정종은 후궁들에게서 많은 자녀를 뒀으나 정작 정안왕후에게서는 소생을 얻지 못했다. 1400년 정종이 상왕으로 물러나자 순덕왕대비(順德王大妃)가 된 그녀는 1412년(태종 12) 6월 인덕궁에서 58세의 나이로 남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태종은 대비의 시호를 ‘정안왕후(定安王后)’라 올리고, 능호를 ‘후릉(厚陵)’이라 했다. 정안왕후가 죽자 태종은 정종을 위로하는 술자리를 마련했는데 대비의 죽음에 대한 슬픔 때문에 상왕이 도중에 일어나 환궁했다는 기록이 있다. 수많은 후궁을 뒀음에도 정종이 정안왕후를 애틋하게 여겼음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정종과 정안왕후 묻힌 백마산 후릉

412년 정종비 정안왕후 김씨가 왕대비의 신분으로 세상을 떠나자 그해 8월 8일 정안왕후를 송경(松京) 해풍군 백마산(白馬山) 동쪽 기슭 후릉에 장사지냈다. 1419년(세종 1) 정종이 노상왕의 신분으로 세상을 떠나자 이듬해인 1420년(세종 2) 1월 3일 후릉 정안왕후의 능 옆에 장사지냈다. 쌍릉인 후릉은 능침 앞쪽에서 바라보아 왼쪽이 정종, 오른쪽이 왕후의 능이다.

능침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을 둘렀으며, 왕과 왕후의 능 앞에 각각 혼유석 1좌씩이 배치됐다. 문·무석인 각 2쌍, 석마·석양·석호 각 4쌍씩이 배치됐는데 이는 태종의 헌릉과 같은 형식으로 고려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현·정릉 제도를 따른 것이다. 현재 사진상으로는 왕후릉의 문석인 하나가 없어졌다.

살아서 왕비의 자리에 올라 보지 못한 신의왕후, 죽어서도 왕 대접을 제대로 못 받은 정종 부부는 멀리 개성에서 잠들어 있다. 오래된 사진 몇 장을 통해 흔적을 읽을 수 있는 제릉과 후릉이 우리 눈앞에 생생한 모습으로 되살아날 날은 언제쯤일까. 

/ 한국아파트신문 2023 유병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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