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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경상북도

안동 가송리 퇴계오솔길 농암종택

by 구석구석 2014. 3.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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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호는 여름철에는 수상스키와 래프팅을 즐기는 사람들이 몰려드는가 하면 베스낚시대회가 거의 일년 내내 열려 강태공들의 순례코스가 됐고 시내를 가로지르는 낙동강에는 조만간 수상공원을 만들어 뱃놀이까지 즐길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수상 레저도시로서의 가능성을 연 것은 안동호에서 전국 베스낚시대회가 열리면서부터다.

싱싱하고 힘 좋은 베스가 잡힌다는 소문이 나면서 급기야 지난 95년에는 한.미.일 3국의 낚시꾼들이 참가하는 국제 베스낚시대회가 창설되기에 이르렀고 그 이듬해부터는 한국스포츠피싱협회 등이 자체적으로 개최하는 행사가 이어지면서 현재는 매년 10차례 내외의 베스낚시대회가 열리고 있다.

아시아에서는 최고의 베스 낚시터로 평가받고 있는 안동호는 주변에 80여척의 모터보트를 정박할 수 있는 선착장 등 부대 시설이 거의 완벽하게 마련돼 있고 넓은 면적에다 1급수를 자랑할 만큼 물이 깨끗하다. 한 해 평균 2천여명의 베스낚시 애호가들이 안동호를 찾고 있는데 대부분 자기 소유의 보트를 직접 몰고 낚시를 즐길 만큼 부유한 계층이어서 이들이 지역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결코 작지 않다.

 


베스낚시 못지 않게 래프팅의 새로운 명소로 떠오르고 있다.
도산면 가송리의 빼어난 절경을 따라 낙동강을 타고 내려오는 코스와 병산서원에서 하회마을까지 내려오는 코스 등 두 곳에서 모두 7개 업체가 성업 중이다. 매년 여름 이 곳을 찾아 래프팅을 즐기는 관광객은 1만명에 육박하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는데 강원도 영월이나 경북 봉화 등 기존의 래프팅 명소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여기에다 안동호 인근 임하호에서는 올해부터 수상 스키대회가 열려 또다른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안동호에서 배스를 낚는 스포츠 피싱을 비롯해 래프팅 업체 7곳과 4곳의 수상레저 업체가 성업중이며 동력수상레저기구 조정면허도 안동에서 취득할 수 있어 수상레저를 위한 여건이 잘 갖추어져 있다.

 

안동에서 봉화 방향으로 35번 국도를 타고 도산서원을 거쳐 퇴계 종택까지 간다. 퇴계 종택에서 퇴계 묘소까지 약 1.5㎞. 묘소를 지나자마자 왕모산성 방향으로 좌회전해 1㎞쯤 달리면 이육사 생가 터와 이육사기념관이 나오고 이어 퇴계 오솔길의 시작점인 백운지교가 나온다.

 

날선 펜끝으로 광복을 노래한 초인 이육사문학관 도산면 원천리900 054-840-6539

 

경북은 이육사를 비롯한 김동리, 조지훈 등 유독 문인들이 많이 배출돼 전통적으로 문향(文鄕)으로 불린다. 그 중 '청포도'로 유명한 이육사 문학관이 육사의 고향인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에 있다.

 

누구나 한번쯤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하고 애송한 국민시라 할만한 이육사의 시(詩) '청포도'를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이면 이육사 시인을 떠올릴 만큼 선생은 온 국민에게 추앙받는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였다.

 

 

이육사 선생의 본명은 원록이나, 이육사로 널리 알려져 있다. 1927년 여름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돼 대구형무소에서 1년7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그때의 수인번호 이육사(二六四)를 따서 호를 육사(陸史)로 지었다.

 

 고향마을 뒷산에는 이육사의 무덤이 있고, 무덤을 올라가는 입구 도로변을 끼고 이육사 문학관이 위치하고 있다.

 

이육사 문학관은 육사 선생이 탄생(1904)한지 100년 되는 해를 기념하기 위해 2004년에 개관했다.

 

이육사 문학관은 도산서원, 퇴계종택에 인접하나 워낙 한갓진 곳이라 일부러 찾지 않으면 접근할 수 없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 들어서면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이육사 선생의 생애와 문학세계를 만날 수 있다. 일일평균 50여명꼴로 방문한다고 한다.

 

선생은 조부 치헌 이중직에게서 한학을 배우고 보문의숙을 거쳐 도산공립보통학교를 졸업했다.

1921년 결혼 후 백학학원에서 수학하고 9개월간 교편을 잡았다. 1926년부터 중국 북경 등지에서 유월한국혁명동지회에 참가해 조직활동을 펼쳤다. 1927년 여름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돼 대구형무소에서 1년7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1930년 중외일보 기자로 재직하면서 첫 시 <말>을 발표했고 이후 <청포도> <광야> <절정> <꽃> 등 총 39편의 시를 남겼다.

 

 

1943년 중국으로 갔다가 귀국, 이해 6월에 동대문경찰서 형사에게 체포돼 북경으로 압송당해 이듬해 1월16일 마흔의 나이에 북경주재 일본 영사관 감옥에서 순국했다.

그는 일생을 일제에 대항하는 일에 바쳤기 때문에 끊임없이 감옥 속에서 살며 조국의 자주독립과 광복을 바라는 마음을 시로 나타냈다. 그가 쓴 시들에는 빼앗긴 조국에서 고통받았던 우리민족의 설움과 독립의지를 느끼게 한다.

이육사 문학관에 들어서면 2층의 문학관 뒤에 생가(복원)인 육우당이 있고 뜰 소나무 아래에는 육사 시인의 전신상과 시비가 있다.

 

입구에는 육사의 독립운동 코너로, 다섯개 사건으로 육사의 독립운동 발자취 꾸며 놓았는데, 264 수인번호를 달고 감옥살이 재현 등이 흥미롭다.

그리고 이육사 문학관을 찾는 초행길은 조금 헷갈린다. 35번 국도에서 바로 진입하는 것이 아니고 도산서원 주차장을 지나서 고개를 넘으면 35번 국도에서 들어오는 길과 만나는 삼거리가 나오며 우회전하여 산허리를 돌아서 가면 오른편에 있다. 안동시내에서 도산서원 방향의 35번 국도 주변의 농촌 풍경도 볼만하다. 옛적 농촌 풍경을 느낄 수 있는 시골길이다.

경북일보 곽성일기자

 

 

대한민국 구석구석 - 권원태의 안동 퇴계 오솔길

퇴계 이황(1501∼1570)이 ‘그림 속으로 들어가는 길’이라고 극찬한 퇴계 오솔길은 안동시 도산면의 백운지교에서 시작된다. 퇴계는 열세 살 때 숙부인 송재 이우에게서 학문을 배우기 위해 퇴계 태실에서 청량산까지 오십리 낙동강 강변길을 걸었다. ‘예던길’로도 불리는 당시의 길은 세월 탓에 대부분 옛 모습을 잃었다. 일부는 아스팔트로 포장되고 일부는 흔적조차 사라졌다. 하지만 백운지교에서 미천장담∼경암∼한속담∼학소대∼농암종택∼월명담∼고산으로 이어지는 6㎞ 길이의 강변에는 500여 년 전 퇴계가 다니던 옛길의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 있다.

 

 

 백운지교에서 미천장담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고갯마루까지는 시멘트로 포장돼 걷기는 편하나 운치가 덜하다. 하지만 전망대를 겸한 고갯마루에 서면 산과 산 사이로 흐르는 낙동강이 두루마리 산수화를 펼쳐놓은 것처럼 장관을 연출한다. 퇴계는 이 아름다움을 ‘미천장담(彌川長潭)’이라는 시로 풀어냈다.

 

‘굽이굽이 맑은 여울 건너고 또 건너니 / 우뚝 솟은 높은 산이 비로소 보이네 / 맑은 여울 높은 산이 숨었다가 나타나니 / 끝없이 변한 자태 시심을 돋워주네’.

 

고갯마루에서 농암종택을 잇는 3㎞ 길이의 강변길은 전형적인 오솔길이다. 수풀을 헤치고 고갯길을 내려서면 폐가를 방불케 하는 허름한 가옥 몇 채가 짙은 녹음 속에서 나그네를 맞는다. 길섶에 뿌리를 내린 뽕나무는 가지에 까맣게 익은 오디를 주렁주렁 달고 있다. 새콤달콤한 맛의 오디 몇 알에 금세 동심으로 돌아간다. 어린 퇴계도 오디를 따먹으며 걸었을까?

 

퇴계의 시심을 불러일으킨 낙동강 상류의 절경은 지명처럼 유난히 흙과 돌이 붉은 단천(丹川)에서 농암종택 사이에 숨어 있다. 태백 황지에서 발원한 원시의 낙동강은 시냇물로 흐르다 청량산을 만나면서 강폭을 넓힌다. 그래서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낙동강은 청량산을 지나면서 비로소 강이 되었다’고 말했다.

 

퇴계 오솔길은 시야가 확 트인 강변을 만나자 외줄처럼 일직선이 된다. 강변은 둥글둥글한 돌로 뒤덮인 자갈밭. 오랜 세월 흐르는 강물에 닳고닳은 탓이다. 이마에서 땀이 줄줄 흐른다. 퇴계도 아마 이쯤에서 땀을 식히기 위해 얼음처럼 차가운 강물에 발을 담갔으리라.

 

강변을 벗어나자 오솔길이 산을 오른다. 인적 드문 탓인지 산속은 온통 산딸기 밭이다. 달착지근한 산딸기 맛에 홀려 수풀을 이리저리 헤매다 강변에 우뚝 솟은 잘생긴 바위 하나를 만났다. 퇴계가 ‘경암(景巖)’이라고 부르며 시 한 수를 선물했던 바위다.

 

‘부딪는 물 천 년인들 다할 날 있으련만 / 중류에 우뚝 서서 기세를 다투누나 / 인생의 발자취란 허수아비 같은지라 / 어느 누가 이런 곳에 다리 세워 버텨보리’.

 

경암을 지나니 곧이어 한속담(寒粟潭)이다. S자로 휘도는 낙동강이 흐름을 멈춘 듯 담을 이룬 곳이다. 상류 쪽으로 기암절벽과 농암종택, 그리고 멀리 산안개 피어 오르는 청량산 자락이 펼쳐진다. 말을 타고 오솔길을 걷던 퇴계는 절경에 반해 다시 또 시 한 수를 남겼다.


‘벌벌 떠는 여윈 말로 푸른 뫼를 넘어가서 / 깊은 골짝 굽어보니 찬 기운이 으시으시 / 한 걸음 두 걸음 갈수록 선경이라 / 기괴한 돌 긴 소나무 시냇가에 널렸구료’.

 

한속담 상류의 수직절벽은 학소대(鶴巢臺). 천연기념물인 먹황새가 서식하던 곳으로 절벽 아래에는 ‘천연기념물 제72호 오관 번식지’라는 표석이 잡초 속에 묻혀 있다(보존가치 상실해 지정 해제). 먹황새 대신 왜가리 한 마리가 학소대 주위에서 원을 그린다.

 

 

뽕나무 두 그루가 한 몸이 된 남녀를 연상하게 하는 연인나무를 지나면 미루나무 사이로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 보인다. 아름다운 소나무가 있는 마을이란 뜻의 가송리로 올미재 아래에 둥지를 튼 농암 이현보(1467∼1555)의 종택이다. 농암은 퇴계의 숙부와 함께 과거에 급제한 사이로 퇴계는 농암의 아들과 서로 편지를 주고받을 정도로 깊은 인연을 맺었다.


농암종택은 1975년 안동댐이 들어서면서 수몰을 피해 여기저기 흩어졌다 다시 모였다. 농암종택 앞의 절벽은 벽력암이다. 태백에서 떠내려 온 뗏목들이 절벽에 부딪혀 우레 같은 소리를 냈다 해서 얻은 이름이다.


퇴계가 걷던 길은 농암종택에서 아스팔트길을 따라 청량산까지 이어지지만 오솔길은 아쉽게도 이곳에서 막을 내린다. 어린 시절 청량산으로 공부하러 가던 길에 낙동강 상류의 선경에 취했던 퇴계는 예순네 살까지 이 길을 대여섯 번 더 왕래하며 바위와 소, 협곡, 단애를 주제로 수십 편의 시를 남겼다. 사서삼경을 옆구리에 낀 어린 퇴계와 말을 탄 늙은 퇴계가 수풀 속에서 불쑥 나타날 것만 같은 퇴계 오솔길. 외줄처럼 가늘고 긴 이 길은 묵향 그윽한 산수화를 닮았다.

워크홀릭 2008. 7

 

농암 이현보

안동시 도산면 분천리 일대에 있던 농암 이현보 선생의 유적이 안동댐 건설로 해체복원되는 과정을 거쳐 흩어져 있던 긍구당과 사당, 분강서원, 애일당, 농암각자, 신도비, 명농당 등 농암 선생 관련 9점의 문화재를 한데 모은 농암유적지가 가송리에 분강촌으로 거듭 났다.

 

 

가송리는 안동에서 청량산 쪽으로 가다가 청량산 조금 못미처 만나는 낙동강을 따라 오른쪽으로 휘며 펼쳐지는 강마을이다.

 

청량산 줄기가 만들어내는 협곡을 끼고 흐르는 강 주변, 단애(斷崖)와 은빛 모래밭이 어우러지는 가을 풍경은 처연히 아름답다.

 

안동댐 건설 이전의 분강촌은 도산서원 진입로 아래의 강변마을이었다. 댐이 건설되면서 여기저기 옮겨진 유적을 한데 모아 '고향을 다시 만들자'는 후손들의 뜻과 경북북부의 '유교문화권개발' 계획이 맞아 떨어졌다. 그 결과 청량산 농암묘소 뒤편의 수려한 가송리에 새로 깃들인 마을이 현재의 분강촌이다. 마을은 어귀부터 종택과 분강서원이 널찍한 사이를 두고 펼쳐져 있고, 저 안쪽 산기슭에 들어앉은 애일당과 강각(江閣)으로 이어진다. 마을 앞 낮은 언덕 아래로 강이 흐른다.

 

농암 이현보(1467~1555)는 세조∼명종 대의 문신이다. 본관은 영천. 서른둘에 벼슬길로 나아가 사간원 정언, 안동부사·충주목사·대구부윤·경상도 관찰사를 거쳐 형조와 호조의 참판 등을 지냈다. 76세 때 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으나 사퇴하고 고향에 돌아와 만년을 강호에 묻혀 살았다.

 

 애일당은 마치 산사의 요사채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장호철

 

농암(聾巖)은 그의 자호(自號)다. 그는 마을 앞에 있는 귀먹바위(이색암(耳塞巖), 즉 농암(聾巖))를 가리켜 "앞강은 상류의 물살과 합류하여 물소리가 서로 향응하여 사람들의 귀를 막으니" 유래한 이름이라 했다. 그래서 그는 "승진, 좌천에 달관한 은자가 산다면 진실로 어울리어 '농암'이라 하고, 늙은이가 자호로 삼았다"고 말했다.

 

농암은 이현보가 고향으로 돌아와 강호에 묻혀 시를 지으며 한거하는 자신의 삶을 상징적으로 드러낸 이름인 셈이다. 이 바위에 올라 농암이 부른 노래가 유명한 '농암가'다.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 노시인의 홀가분한 마음이 드러나는 이 시에서 시인은 변함없는 자연을 예찬했다.

 

 

그는 또 청량산 만학천봉을 구비 돌아 흘러온 "물굽이가 농암 아래에 이르면 넓고 가득하게 퍼지고 쌓여 조그만 배를 띄우고 노를 저을 수 있게 되는데, 이를 '분강(汾江)'이라 했다"고 전한다.

 

1612년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그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향현사(鄕賢祠)가 뒤에 서원으로 개편될 때 '분강'이라는 이름을 붙인 까닭도 여기 있다.   

 

 분강서원을 지나면 종택의 돌축대 위에 긍구당이 날아갈 듯 날렵하게 서 있다. 긍구당은 종택과 애일당 등 분강촌에 있는 고가 중에서 가장 고가다워 뵈는 종가의 별당이다. '긍구당'은 서경에서 따 온 구절로, '조상의 업적을 길이 이어 받으라'는 뜻이다.

 

긍구당처마의 등불 / 장호철

 

분강서원을 지나면 종택의 돌축대 위에 긍구당이 날아갈 듯 날렵하게 서 있다. 긍구당은 종택과 애일당 등 분강촌에 있는 고가 중에서 가장 고가다워 뵈는 종가의 별당이다. '긍구당'은 서경에서 따 온 구절로, '조상의 업적을 길이 이어 받으라'는 뜻이다.

 

농암은 이 긍구당에서 태어나 여기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죽은 후에도 긍구당은 농암 종택의 중심 건물로 모든 문중사가 여기서 결정되었다. 농암은 여기서 여든다섯 살 생일상을 맞았는데 그 감격을 '생일가'를 통해 노래했다.

 

분강촌은 몇몇 고가를 빼면 그리 예스러운 느낌이 나는 마을이 아니다. 그러나 산자락을 낀 넓지 않은 평지지만 넉넉하게 자리 잡은 종택과 서원이 시원하다. 마을 옆을 끼고 흐르는 강도 위압적이지 않다. 마을 안에서 내다보면 마을로 드는 굽잇길이 아득하다. 마을은 완전히 세속과 절연되어 있는 형국인 것이다. 그래서일까. 분강촌은 떠나는 게 어쩐지 미련이 남는 마을이다. 

오마이뉴스 2008 장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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