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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경상남도

창녕 창녕읍-교상리 만옥정공원 도성암

by 구석구석 2009. 10.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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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상리 28-22 만옥정공원

 

 

 면적 1만㎡의 도시공원으로 공원내는 진흥왕척경비(국보 제33호)창녕객사, 퇴천3층석탑, 창녕척화비, UN전적비, 창녕현감비군, 지석묘(고인돌)가 있으며, 열린 문화공간인 야외공연장도 있다. 봄에는 벚꽃이 유명하여 읍민들의 쉼터로 널리 이용되고 있다.

 

 

화왕산 등산로가 옆에 위치해 있어 산행전에 구경해보는 것도 괜찮다

 

신라진흥왕척경비拓境碑 국보 제33호 / 1962년 12월 20일 지정

원래 화왕산 기슭에 있던 것이 소풍 갔던 학생에게 발견되어 알려졌는데, 학계에 보고된 것은 1914년 2월7일 창녕 초등학교 일본인 교장 하시모토(橋本良臧)에 의해서였다. 그 후 1924년 지금의 만옥정으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흔히 순수비로 통칭되나 북한산, 황초령, 마운령에 있는 순수비 처럼 순수관경이란 말이 없고 다만 왕이 새 점령지를 다스리는 내용과 이에 관련된 사람들을 열거 했으므로 따로 척경비라 일컫는다. 순수의 기원은 중국의 고대로 거슬러 올라갈 수가 있는데 중국의 황제들이 자신의 영토를 둘러보고 그 곳에서 천신께 제사를 지냈다고 하며 순수한 기념으로 비를 세우기 시작한 것은 진나라 시황제(BC.259∼BC.210)부터라고 한다.

이 비는 자연 암석을 이용하여 개석이나 대석을 사용하지 않은 삼국시대 비문의 일반적인 형식을 갖추고 있으며 한 면을 간 다음 바깥 면 비석의 형상에 따라 음각의 줄을 돌렸는데 오른쪽 상부는 암석이 사면을 이루고 있는 관계로 일행(一行)씩 낮추어 계단식으로 되어 있다. 비문은 27행으로 한 행의 자수는 일정하지 않아 끝 행은 3자 뿐인 것도 있으나 26자의 행이 가장 많고 후반부는 위에서 2행마다 1자식 낮추어져 있다. 비문의 내용은 순수의 년시(신사년 2월), 사적, 수가인물(수행원)의 3부분으로 되어있고 인물의 기록순서는 속부, 인명, 직관, 직위를 표기하여 삼국시대신라비문의 일반적 형식을 따르고 있다. 서체는 해서체이며 글자간격은 4㎝이다. 앞부분이 마멸되어 자획이 불분명한 점이 있다.

 

송현리8 도성암

 공원 매표소를 지나 주차장에 차를 주차시키고 도보로 오르다보면 음식점이 즐비하고 도선암이 나오는데 여기를 지나 곧장 오르면 오른쪽길은 화왕산 정상으로 오르는 등산로이며 왼쪽의 다리를 지나면 도성암이 바로 나온다.

 

도성암은 신라 현덕왕 2년(810)에 창건한 고찰로 임진왜란 때 전소되어 한 때 역사가 끊어진 사찰이었다. 그러나 현재의 도성암은 아미타부처님의 위신력에 기대어 창녕의 주산이자 절경으로 잘 알려진 화왕산 중턱에 자리하면서 현묘한 자성을 찾는 염불기도 영험도량으로 거듭나고 있다.

 

송현리 105-4 석불좌상 보물 제75호 / 1963년 1월 21일 지정

 

큰 바위에 앞면을 돌출되게 조각한 마애불(磨崖佛)로 바위 자체를 몸 전체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로 이용하고 있다.

민머리에는 상투 모양의 큼직한 머리(육계)가 있으며, 둥근 얼굴에는 살이 통통하게 올라 온화한 인상을 풍긴다. 어깨는 넓게 떡 벌어져 있고, 팔과 가슴은 넓고 풍만하지만 크기에 비해 어딘지 힘이 빠진 듯한 느낌이다. 왼쪽 어깨를 감싸고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면서 입은 옷은 얇게 신체에 밀착되었는데, 형식적으로 처리된 계단식의 옷주름 때문에 사실성이 떨어진다. 손모양은 오른손을 무릎 위에 올리고 손끝이 땅을 향한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으로 악귀를 물리친다는 의미를 지닌다.

 

대체로 이 석불은 얼굴이나 얇게 밀착된 옷 등에서 석굴암 본존불 계열의 양식을 이어받은 작품으로 보이지만, 석굴암 불상보다는 사실성이 줄어들고 힘이 빠져 통일신라 후기 불상의 양식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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