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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전라북도

김제 흥사동-흥복사

by 구석구석 2009. 7.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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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사동 263 흥복사 (興福寺) 063-547-7364

주차장도 넓고 사찰 앞으로 연꽃이 많이 심어져 있어 연꽃 피는 시기를 맞추어가면 더욱더 아름다울 것이다.  

 흥복사는 전북지역 근대 불교계의 정화운동을 이끌었던 중심사찰이다. 흥복사가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1943년 법운스님이 극락전과 관음전 등을 중수하면서부터이다. 흥복사는 1954년 불교정화운동 때 임시 조계종 전북종무원으로 되어 약 1년간 교단의 행정본부가 되었으며, 1961년에는 월주스님이 금산사와 흥복사의 주지를 겸임하면서 전라북도 지역 불교정화운동의 핵심역할을 했다. 곧 이어서 1965년에는 전강스님을 강사로 하여 선원을 개설하는 등 많은 발전을 이루었다.

 

 이 지역의 승려들의 정신적인 구심점 역할을 하던 흥복사는 1969년에 도영스님이 주석하여, 1976년부터 1979년까지 3년간 대대적인 중창불사를 거행하면서 절의 면모가 일신되었다.

 

현재에도 절에는 대웅전을 비롯해서 미타전, 미륵전, 삼성각, 사천왕전, 정혜원, 요사 및 수각인 불유각 등 여러 채의 건물이 널찍널찍하게 자리잡고 있어 절의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더구나 선원 내에는 수도에 열심인 스님들이 계심을 섬돌 위에 가지런히 놓인 고무신에 의해 느낄 수 있다. 스님들의 용맹정진을 방해할까봐 경내를 다니면서도 독경소리보다 발걸음소리를 적게 내려고 조심조심 다니곤 했다. 새들도 조용히 스님들의 수도에 동참하는 곳이 바로 흥복사이다.

 

넓은 경내에 시원스럽게 배치된 전각과 그 내부에 모셔진 불보살상과 불화 등이 서로 어우러져 부처님의 법력을 웅변으로 증명하는 곳이다. 앞쪽에 자연스럽게 조성해 놓은 연꽃밭조차 넓고 시원하여 사찰의 규모와 원력이 느껴지는 그런 곳이다.

흥복사는 650년(의자왕 10) 고구려에서 온 보덕이 창건하여 승가사라 하였다. 한때는 이 곳에서 도교가 성행하였다고 하는데, 아마도 당시 고구려가 중국으로부터 도교를 도입해 한창 숭상하던 때였으므로 그 영향을 받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절은 곧이어 불교도량으로서의 기반이 확고해지면서 많은 고승들이 이곳에서 수도했다고 전한다. 아쉬운 것은 창건 이후 조선중기까지의 연혁이 거의 전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나 뒷날 많은 불교 고승이 배출되었다. 그 뒤 여러 차례 중건과 중수를 거듭하였으나 현재로서는 알 수 없고,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 절은 완전히 불타버려 절은 폐허가 되어 버렸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1625년(인조 3) 김제에 살던 흥복처사가 부처님의 감응을 받아 이 절을 기원도량으로 삼아 극락전을 중건하면서 다시 법등을 잇게 되었고, 절의 이름을 흥복사라 불렀다.

 

 사찰 경내에는 부도옥개석 2점이 있을 뿐 특별한 문화재가 없으나 수령 600년 가량의 신단수와 설천이라는 우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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