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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경상남도

거제 하청-칠천도 거북선

by 구석구석 2009. 6.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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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철갑선 거북선탐사 / 이순신프로젝트

 

 

 1597년(선조 30년) 음력 7월 15일 거제도 칠천량(漆川梁). 현재 행정구역으로 따지면 경남 거제시 하청면 앞바다인 이곳에서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은 당시 조선의 주력 수군을 이끌고 좁은 해역을 통과하다 왜군의 기습공격을 받았다. 결과는 처참했다. 왜선 600척과 맞서 1만여명의 조선 수군이 목숨을 잃었고 170여척 중 거북선 7~8척을 포함, 150척이 넘는 함선이 수장되는 치욕적인 패배를 당했다.

 

그로부터 410년이 지났다. 지난 6월 2일 거제도 북쪽 끝, 1200여명의 주민이 살고 있는 작은 섬 칠천도에서는 1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이순신 프로젝트: 거북선 탐사 출항식’이 열렸다. 바닷속 어딘가에 잠들어 있을 거북선을 반드시 찾아 이 충무공의 호국의지를 이어받겠다는 뜻이다.

 

칠천도 곳곳에는 주민들의 염원을 담은 플래카드가 내걸렸다. ‘이번에는 꼭 찾아야 한다. 이 충무공의 거북선’ ‘이 충무공의 호국정신, 거북선 찾아 보답하자’ ‘경상남도의 거북선 찾기는 대한민국의 기상이다’….

 

옥계마을 운동장에서 열린 출항식 행사는 수륙 새남굿 공연으로 시작됐다. 임진왜란 때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장수와 이름 없이 스러져간 군졸들의 넋을 위로하고 이번 거북선 발굴을 반드시 성공으로 이끌자는 바람이 담긴 무대였다. 곧이어 출항 선포가 행사장을 울렸다.

 

“410년 전 남해안을 호령하며 왜적을 물리친 이순신 장군의 애국 애민의 충정을 되살려 320만 도민과 7000만 민족의 염원을 담아 세계 최초의 철갑 전선(戰船)인 거북선을 찾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다. 임진왜란 7년, 누란의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고 장렬히 순국한 조선 수군과 선인들의 영혼을 추모하며 옷깃을 여미고 명복을 빈다. 조선 수군의 한이 서린 칠천도 해역에서 이 충무공의 철갑 거북선을 반드시 찾고야 말겠다는 굳은 신념으로 역사적인 거북선 찾기의 출항을 엄숙히 선언한다.”

 

곧이어 김태호 경남지사가 “가슴이 설렌다”며 축사를 시작했다. “어려운 도전이 시작됐습니다. 역사는 도전하는 사람들의 편이었습니다. 아무리 어렵고, 또 실패의 과정을 거친다고 해도 그런 과정을 통해 새로운 변화와 역사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어려울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1%의 가능성만 있어도 도전하는 무한도전의 정신, 바로 그것이 경남의 정신입니다.”

 

이광수 경남문학관장의 축시(祝詩)도 이어졌다. ‘진군의 큰 북을 울려라. 왜군을 무찔러라/ 한 척도 남기지 말고 모조리 섬멸하라// 님께서 호령하신 추상 같은 호국의 외침/ 천지를 진동하였네//… 오 불패의 화신 이순신 장군/ 님의 가없는 애국애족 충절의 정신 이어받고자/ 여기 남해의 푸른 파도를 갈라/ 거북선 찾기에 나섰노라// 7000만 겨레의 염원과/ 320만 도민의 간절한 기원을 담은/ 성스러운 출항식// 구국 투혼의 산 증거 찾아 힘찬 깃발을 올리나니 님께서 남기신 고귀한 발자취 묻어둔/ 역사 앞에 부끄러운 후배의 멍에 벗어나리라….’

 

주민들은 “이번에는 꼭 찾아야제” 하면서 한 마음으로 성공을 기원했다. “바로 여가 연구리(蓮龜里) 아닌가. 임진왜란 당시 거북선이 연꽃처럼 여러 척 떠 있었다고 해서 붙여졌다고 들었지.”

 

임진왜란 격전지 어온·옥계·금곡리 포구 쪽 집중 / 수심 얕고 해류도 약해 발견 가능성 높아

 

 

 거북선 탐사’는 경남도가 추진하고 있는 ‘이순신 프로젝트’의 대표적 사업이다. ‘남해안 시대를 열겠다’는 경남도의 ‘이순신 프로젝트’는 △이순신 장군 세계화 사업 △임진왜란 관련 유적지 정비와 복원 등을 통해 이순신 장군을 국가 브랜드로 만들고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겠다며 2006년부터 추진되고 있다. 총 33개 사업에 소요되는 예산만 3550억원. 1단계인 2010년까지는 △한산대첩 이순신 광장 조성 △거북선 등 군선(軍船) 건조 △이순신 리더십 국제센터 건립 등 16가지 프로젝트를 마무리할 계획. 2단계(2014년까지) 사업으로는 △이순신 비엔날레 △한산대첩 420주년 세계축제 △백전백승 해전관 건립 등을 준비하고 있다.

 

본격적인 탐사는 한국해양과학기술·한국수중공사·빌리언21 등 공개입찰을 통해 선정된 탐사전문업체 3곳의 컨소시엄이 거제시 칠천도 해역 1584만㎡에서 벌이게 된다. 탐사 작업의 베이스 캠프는 옥계 마을회관에 차렸다. 탐사 사업비는 8억원. 대우조선해양·삼성중공업·성동조선해양·STX 등 경남 지역의 조선 4사가 2억원씩 지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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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체적인 대상 지역은 역사고증자문위원 7명의 의견과 기존 탐사 자료를 면밀히 분석해 칠천도 해역으로 정했다. 2009년 5월 말까지 탐사를 벌인 뒤 결과를 분석해 탐사를 계속할지 여부를 결정할 예정이다. 거제도와 칠천도 사이 ‘칠천량 해로’를 비롯한 칠천도 인근 해역은 수심이 20~30m로 비교적 얕고 뻘 퇴적층이 3~4m 두께로 넓게 분포한 것으로 나타났다. 전문가들은 바람과 해류의 흐름이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해 거북선과 판옥선, 각종 무기류 등 당시 해전의 잔해들이 바다 밑바닥에 매몰돼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이순신 프로젝트 역사고증위원회 나종우 위원장(원광대 교수)은 발견 가능성이 가장 높은 지역으로 칠천량 해역 중에서도 당시 왜군이 정박한 조선 수군을 공격해 격전이 벌어진 정박 포구 쪽을 꼽았다. 당시 조선 수군은 어온리 포구, 옥계마을 앞 포구와 금곡리 포구 등 3곳에 배를 댔다. 나종우 위원장은 “이 같은 사실은 당시 일본의 ‘협판가전기’의 기록과도 일치한다”고 밝혔다.

 

이밖에 조선 수군이 후퇴하면서 왜군과 격전을 치른 칠천량 해로도 가능성이 높은 지역으로 알려졌다. 조선 수군의 패전 기록이 남아 있는 가조도와 거제도 사이의 견내량 입구 해역, 진동 앞바다 진해만 일대, 원균이 상륙했다 전사한 곳으로 알려진 안정만 일대도 1차 탐사 대상지에 포함됐다.

 

거제향토사연구소 이승철 소장은 “전투 해역은 물론 전투 이전에 조선 수군이 정박했을 가능성이 있는 포구, 패전한 뒤 해상 도주로까지 광범위하게 탐사할 예정이라 해저 유물 발견의 가능성이 그 어느 때보다 높다”고 말했다.

 

음파·자기 탐지기, GPS 등 첨단장비 동원 수심 6000m 아래 3.5㎝ 물체 포착도 가능

▲ 거제 칠천량 해역을 조사할 탐사선.

 

거북선 탐사는 결국 희망에 그칠 것이라는 부정적인 전망도 없지 않다. “격전 이후 너무 오랜 시간이 흘렀고 전란 당시에는 배를 불태운 경우도 많아 거북선을 찾는 것이 쉽지만은 않을 것”이라거나 “이전에도 조사가 이뤄졌지만 결국 거북선을 찾는 데는 실패했다”며 회의적인 시각으로 탐사 사업을 바라보는 전문가도 있다.

하지만 이번 사업 관계자들은 “과거 칠천량 해로 등에 대한 조사가 있긴 했지만 남해안 전역을 조사하는 과정의 일부에 그쳐 정밀한 조사가 이뤄지지 못했다”면서 “이번에는 한정된 장소를 대상으로 첨단 장비와 인력이 집중적으로 투입되는 만큼 기대를 걸어볼 만하다”고 밝혔다. 탐사에 동원되는 장비는 해저 지표와 해저 지층을 탐사하는 기기로 나뉜다.

거북선 발굴 탐사대원들이 거제도 하청면 영구리 괭이섬 앞바다에 입수하고 있다/경남신문

우선 해저 지표 탐사 장비로 ‘사이드 스캔 소나’가 있다. 미사일 모양으로 생긴 사이드 스캔 소나는 음파를 이용해 해저면에 노출된 유물의 이미지 정보를 영상물로 담아내는 장치. 최고 수심 6000m에서 3.5㎝ 크기의 작은 물체를 포착할 수 있을 정도다. ‘멀티빔’은 탐사체 주변을 3차원의 입체적인 형상으로 보여주는 기기.

해저 지층 탐사에 사용되는 고주파 지층 탐사기는 해저면 아래 20m 안팎에 매몰된 물체를 탐지하게 된다. 해저에 음파를 쏜 뒤 반사되는 굴절파를 수신해 목표물의 위치와 형태를 추정하는 방식이다. 바닷속에 감춰진 금속제 물체, 자성(磁性)을 띠는 무기류를 탐사하기 위해서는 ‘자기 탐지기’가 사용된다. 이밖에 탐사 해역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기 위한 위성항법장치(GPS), 수중카메라, 다방향카메라 등 30여종의 장비도 함께 투입된다.

 

첨단 장비를 활용해 해저 지형과 해저면에 대한 영상조사, 지층탐사가 이뤄진 뒤에는 데이터를 전문 판독관에게 보내서 정밀 분석 과정을 거친다. 선체의 잔해나 무기로 추정되는 물체가 감지되거나 징후가 보이면 잠수부를 투입해 영상 촬영과 확인 절차를 거치게 된다. 이어 역사고증자문위원에 의뢰해 거북선 관련 유물로 판단될 경우 문화재보호법에 따라 발굴 작업을 진행하게 된다. 경남도는 주민들의 협조와 제보가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거북선 구조 논란

 

경남도는 이번 거북선 탐사와 함께 3층 구조로 거북선을 복원하는 작업도 추진한다고 밝혔다. 실물 크기의 거북선을 3층으로 복원하는 것은 경남도가 처음으로, 2010년까지 170억원을 들여 임진왜란 당시 거북선과 군선 7척을 복원할 계획이다. 올 연말까지는 50억원을 들여 거북선과 군선 1척씩을 제작한다.

거북선의 구조와 관련해서는 그동안 2층 구조설과 3층 구조설 등 견해가 갈렸으나 경남도는 전국 이순신 전문가들로 구성된 이순신 프로젝트 역사고증자문위원회 고증과 학술 심포지엄을 통해 1592년 당시의 거북선이 3층 구조로 이뤄졌을 것이라는 데 의견을 모았다. 기존에 복원 전시된 거북선은 임진왜란 당시에서 200여년이 지난 뒤인 조선 정조시대(1795년) 규장각에서 편찬한 ‘이충무공전서’를 근거로 제작된 것인데, 이 책에 나온 간략한 그림 외에는 거북선에 대한 형태, 수치, 규모 등 구체적인 사료가 없어 정확한 구조와 모양에 대해서는 주장이 갈렸다.

 

이순신 프로젝트 역사고증자문위는 기존의 2층 구조설에 대해 “노를 젓고 활과 포를 쏘는 전투 행위가 거북선 안에서 동시에 이뤄졌음을 미뤄볼 때 만약 2층 구조였다면 노군·사수·포수가 함께 전투 행위를 원활하게 펼치기에는 한계가 있었을 것”이라며 3층 구조설을 제시했다. 150㎡ 정도의 주갑판 공간에서 150명 이상의 병력이 활동하면서 전투 행위를 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추정에 따른 것이다. 3층 구조설에 따르면, 1층인 선실은 군졸들의 휴식 장소와 군량·무기 창고로, 2층인 갑판은 노를 젓는 격군(노군)과 사수의 전투 장소로, 3층인 상갑판은 포수들의 전투 장소로 운용했을 것이며 이럴 경우에만 거북선이 전함으로서 전투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경남도는 자문위의 연구 결과와 주장에 따라 통영 강구안, 남해 노량해전지, 고성 당항포에 전시된 2층 구조의 거북선을 2009년 모두 3층 구조로 재복원하겠다는 계획도 밝혔다.

 

이와 관련, 고대 선박 전문가인 원인고대선박연구소 이원식 소장은 거북선 내부 구조가 2층에서 3층으로 바뀌었다는 견해를 제기해 눈길을 끌었다. 이원식 소장은 “자문위는 18세기 기록 등을 바탕으로 1592년 거북선의 형태를 단정했다”라며 “충무공의 글과 후대의 관련 자료를 보면 18세기에 제작된 거북선은 3층이지만 임진왜란 당시 제작된 거북선은 2층”이라고 주장했다.

 

그 근거로 내놓은 것은 1592년 충무공 이순신의 장계(전쟁보고서) 등에 나오는 ‘거북선 등판에 창을 꽂았다’는 기록. 3층 구조설에 따르면 거북선 등판의 바로 아래 공간이 3층인데, 이 공간은 한옥의 대들보 위처럼 좁은 데다 대들보에 마루를 깔지 않는 것처럼 갑판으로 구분되지 않기 때문에 독립된 층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또 이곳에는 창칼을 꽂아 소총수나 포수가 활동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원식 소장은 “박문수(1691~1756)의 지방 순찰 기록 등을 보면 거북선의 모습이 (예전에 비해) 변했다는 내용이 있다”면서 “200년 세월이 지나는 동안 거북선의 형태가 달라질 수 있음을 고려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70년대 부터 4차례 나섰지만 실적 없어 1989년엔 해군 충무공 유물 발굴단 창설

거북선 탐사 조사는 이번이 5번째다. 1970년대 초반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모두 4차례에 걸쳐 발굴 조사가 이뤄졌지만 거북선의 실체는 끝내 드러나지 않았다. 첫 발굴은 1973년 문화재관리국 발굴조사단에 의해 진행됐다. 6년에 걸쳐 발굴이 이뤄졌지만, 탐사 장비의 정확도가 떨어지는 등 기술적 제약이 많아 큰 효과는 보지 못했다.

▲ ‘사이드 스캔 소나’등 탐사장비들.

 

1989년에 해군 충무공 해저유물 발굴단이 정식 창설됐다. 발굴단은 1991년까지 칠천량 해로와 노량 등 54.4㎢의 해역에 걸쳐 탐사를 벌여 침몰선 잔해로 추정되는 목재 등을 발견하기도 했다. 비슷한 시기에 당시 노태우 대통령의 특별지시로 서울대 해양연구소와 한국해양연구소, 동력자원연구소, 농어촌자원공사 기술진이 고성만, 한산만, 칠천량 해로 등에서 합동 탐사를 벌였으나 성과는 없었다.

해군은 1992년부터 1995년까지 763일에 걸쳐 해상과 육상에서 정밀 탐사를 벌여 별승자총통 등을 인양했다. 1996년에는 이 충무공 해저유물 발굴단장이었던 황모 대령이 가짜 귀함(龜艦)별황자총통을 통영시 한산면 앞바다에 떨어뜨린 뒤 새롭게 인양한 것처럼 국민들을 속인 사실이 드러나 사법처리되고 발굴단이 해체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1998년에는 28명으로 구성된 해군 해저유물 탐사반이 활동을 재개했지만 특별한 실적을 올리지는 못했다.

/ 주간조선 2008.6 채성진기자 사진 = 이상선 조선영상미디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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