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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충청남도

청양 화성면-619번지방도-화암 기덕 한옥민박

by 구석구석 2009. 5.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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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안고속도로 - 서해안고속도로 금천IC - 광천IC - 광천IC 교차로에서 청양|광천|천북 방면 - 산성삼거리에서 청양 방면 - 기덕리

 

 

 

화성면 기덕리 322번지 삼전고택(임영기016-9253-4303)

임영기씨가 소유하고 있는 삼적고택은 덕명마을에 위치해 있다. 이곳은 평택임씨의 두 형제 집안이 나란히 집을 짓고 수백년을 지켜오고 있는 곳인데 두 가문 중 삼전고택이 형님집이다. 동생집인 송운고택과는 처마를 맛 대고 있을 정도로 지척의 거리이며 삼전고택이 앞에 있고 송운고택이 뒤에 있다. 송운고택과 똑 같은 형태로 지어진 삼전고택도 호서지방 특유의 가옥 구조를 잘 보여준다. 

 

남도아래쪽은 주로 한 일자 형태로 길게 지어진 집들이 많고 안동을 중심으로 한 중부내륙은 ㄷ자형태나 ㅁ자형태로 지어진 집들이 많은 반면에 이곳 내포지방은 二 자 형태로 집을 짓는데 삼전고택이 바로 그 전형을 이룬다. 장방형의 마당을 사이에 두고 바깥쪽으로 사랑채가 있고 안쪽에 안채가 배치되는 형태다. 이러한 구조는 남녀를 구별했던 내포지방 양반 가문의 유교적 정서에서 찾을 수 있다.

 

또 하나 이 집의 특징을 살펴보면 대문이 두 곳에 나 있다. 사랑채의 서쪽에 커다란 대문이 나 있어 안채나 마당에서 바로 밖으로 통할 수 있도록 해둔 반면에 동쪽에도 밖으로 통할 수 있는 일각대문이 하나 더 있다.

이는 안채에서 사랑채의 어른방을 거치지 않고 밖으로 나가거나 수발을 들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란다.

 

삼전고택의 사랑채는 퍽이나 아름답다. 사랑채 앞으로 비스듬한 경사를 따라 키 낮은 수목을 심고 꽃을 가꾸어 놓았으며 바로 앞의 대추나무와 은행나무가 시원스러운 그늘을 만들어 준다. 막돌과 황토를 사용하여 담벼락을 만들었으며 그 가운데 대문이 나 있다. 대문 옆에 오래된 고목이 수호신처럼 버티고 있어 고풍스럽고 지붕의 아름다운 곡선과 주변 산세가 잘 어울리는 집이다. 마루에 앉으면 얕은 담장 너머로 너른 들녘이 한눈에 들어와 조망권도 좋다.

건물 뒤는 높지 않은 야산인데 수백년 된 소나무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다. 사랑채와 더불어 민박을 위한 별채를 하나 더 지었는데, 이곳에 공동주방시설과 현대식 화장실이 갖춰져 있다. 다소 투박하고 소박한 건물 이지만 시골의 훈훈한 인심을 느낄 수 있는 정겨운 한옥이다. 한국관광공사

 

기덕리 323번지 송운고택(임승팔고택) 041-942-4303

덕명마을에 위치해 있다. 이곳은 평택임씨의 두 형제 집안이 나란히 집을 짓고 수백년을 지켜오고 있는 곳이다. 송운고택이라 명명되고 있는 임승팔 가옥은 형제 중 동생집에 해당한다.  

 

실내는 옛 모습 그대로 보존하면서 깨끗하게 도배를 하여 한옥 체험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따뜻한 방을 제공하고 있으며 화장실도 현대적으로 보수하여 하룻밤 이용하는데 불편함이 없다. 

 

큰방 1실, 중간방 2실, 작은방 3실로 4인~8인이 이용할 수 있고 계절에 따라 50,000원 ~ 100,000원.

 

화성면 화암리 222번지 와송정사 (임동일010-6415-9200)

충청남도 청양군 화석면 화암리와 기덕리는 서로 이웃한 마을인데, 평택 임씨들이 주로 모여산다. 이 마을의 내력은 조선 명종때의 인물인 임식에서부터 시작되는데 홍주의병 육의사 중 한 명인 성헌 임한주 선생을 비롯해 8인의 애국지사가 나온 곳으로 유명하고 국무총리를 지낸 이현재씨의 외가이기도 하다. 이러한 명망 높은 마을에서도 가장 이름난 고택이 와송정사다. 

 

화암리의 작은골 안에 홀로 앉아있는 와송정사는  평택임씨의 입향 4세인 동암 임헌의 옛 집터에 구한말 새로이 살림집과 서당으로 지은 고택이다. 이곳은 살림집과 더불어 사랑채에 학동을 가르치던 별도의 공간이 있어 상당히 독특한 구조를 띄고 있다.

사랑채에 덧붙여 사방이 트인 공간이 하나 더 있는데 논산의 윤증고택에서 똑 같은 모양을 찾을 수 있다. 와송정은 이름처럼 소나무와 어우러진 정원이 아주 아름답다. 뜰에서 연못을 향애 누워있는 세 그루 소나무가 특히 눈에 띄는데, 와송정이라는 이름도 이 나무들에 기인한다.

 

와송정가는 내포지방의 전형적인 가옥구조에 양쪽면으로 창고와 광을 하나씩 넣어 미음자 형으로 꾸몄다. 마당 안쪽으로 안채가 있고 바깥쪽에 사랑채가 있는 구조다. 동서쪽은 각각 한채씩의 창고와 광이 나란히 서 있는 구조다.

안으로 들어서면 처음으로 마주하는 건물이 사랑채인데 정면 6칸 측면 2칸의 아담한 건물로 가운데 3칸은 마루가 설치되어 있고 건물 오른쪽으로는 같은 지붕으로 연결된 정자 형태의 마루가 넓게 설치되어 있는 특이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가운데 부엌이 있고 이곳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방이 마련되어 있다. 사랑채에서는 집 앞의 연못과 솔숲이 바로 내다 보이고 연못쪽으로 작은 툇마루까지 있어 경관을 감상하기에 좋도록 되어있다. 민박으로 활용하고 있는 안채는 벽면과 일부의 목재를 새롭게 보수 하였는데 오래된 사모기둥의 목재와 잘 조화를 이루어 전통미와 현대미를 동시에 느낄 수 있다.

 

이 집은 방문이 양쪽으로 있어  여름이면 양쪽으로 시원한 산들바람이 불어오고 뒷문을 열면 뒷산의 아름다운 산세가 한눈에 들어와 청량감을 주는 자연 친화적인 건축물이다. 또한 안채와 사랑채 사이에 있는 창고는 새롭게 개조돼 주인내외의 그림그리는 공방이자 외지인들에게 체험공간으로 이용되고 있다. 특히 이 창고 뒤에는 사철내내 똑 같은 양의 물이 나오는 샘이 있어 눈길을 끈다. 한국관광공사

 

방은 원룸형식의 가족형으로 5~7인용이며 5만원으로 현금만 가능하다.

 

화성면 농암리 다락골줄무덤

 

 

 줄무덤(줄묘)은 화성면 농암리 다락골에 있는 천주교 신자들의 순교자 묘지다. 대원군 집정 이후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심할 때 당시 홍주감옥에서 순교한 교도들이 많았는데, 그 친척들이 야간을 이용하여 이곳으로 운구 암장한 것이라 한다. 한 분묘에 여러 분을 줄줄이 모셨기 때문에 줄묘 또는 줄무덤이라 한다.

 

그 순교자수와 성명과 순교경위를 알 수 없지만 가족 단위로 묻혀 37기가 있으며 지금도 이 다락골에는 소실된 인가의 흔적이 10개소나 되는 것으로 보아, 당시 천주교도의 집단마을로서 마을 전체가 참화를 당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곳은 김대건신부와 더불어 최초의 유학 신부이며, 김대건 신부에 이어 두 번째 신부(사제)인 최양업신부(1821~1861)의 출생지이다. 숨어다니며 신자 마을을 찾아 수 십리 길을 걸어 다니는 등 눈부신 전교활동을 한 신부이다. 천주교 신자를 비롯하여 관심있는 사람들이 많이 찾고 있는 성지이다.

성역화 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방윤석 베르나르도 신부님에 의해 이 마을의 구전과 사료를 수집하여 현지 답사를 계속한 끝에 1981년에 줄무덤이 한 군데가 아니고, 세 군데임을 밝혀냈으며, 편의상 제 1,2,3 줄무덤으로 구분하였다. 제1줄무덤은 14기로서 세 단계로 모셔져 있다. 오기선 신부님의 증언에는 17라는 하셨으나 지금은 14기가 있는데 비신자인 최씨들이 임자없는 무덤이라 하여 이장하는 바람에 아깝게도 3기가 파묘 유실되었다.

 

제 1줄무덤 서남쪽으로 밑으로 20m쯤 떨어진 지점에 10기의 제2줄무덤이 있다. 제3줄무덤은 제1줄무덤에서 100m 떨어진 능선 너머에 위치해 있는데 13기가 있다. 이렇게 이곳에 있는 무명 순교자의 무덤 수는 모두 37기가 된다. 그러나 각 무덤에 몇 구의 유해가 들어있는지 확인되지 않았지만, 개발 당시에 무덤들이 100년이 넘었고 흙을 쌓지도 않았는데, 유난히 봉분이 큰 것으로 보아 한 무덤 안에 여러 유해가 있을 가능성이 있다. 1982년 대전교구에서는 이들 무명순교자들을 위한 묘비를 세워 기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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