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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경상북도

포항 구룡포읍-구룡포 적산가옥

by 구석구석 2009. 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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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역사를 간직한 곳, 구룡포 '적산가옥' 거리

 

포스코를 지나 조개가 많이 잡히는 도구해수욕장의 황량한 겨울 백사장과 영일만이 시야에 들어온다. 이어 10여분만에 도착한 곳이 구룡포 수협 앞 어판장. 추운 날씨 탓인지 아니면 오전 경매를 마친 것인지 어판장은 다소 썰렁하다. 그러나 여행객들에게는 오히려 오전의 조용한 포구가 더 정겹게 느껴진다. 흔히 '구룡포' 하면 떠오르는 것이 어업 전진기지다. 그렇다, 구룡포는 일제강점기때부터 동해안에서 어선 세력이 큰 몇 안되는 어업전진기지중 하나로 지금도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한창 고기가 많이 잡히던 70년대까지만 해도 '천원짜리 지폐는 개도 안물고 다녔다'고 할 정도로 흥청망청했던 구룡포. 그러나 요즘은 어획부진과 인구감소로 옛 만큼의 활기찬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단지 아직도 남아 있는 몇몇 군데에서 구룡포의 옛 전성기를 느낄 따름이다.

 

그 중 한곳이 다름아닌 일제강점기때 일본인들이 많이 살던 '일본인 거리'다. 이 곳은 구룡포항 바로 앞 큰 도로(국도) 바로 뒷쪽에 있다보니 외지인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다.

 

그냥 항구 옆 횟집과 방파제를 따라 대보 호미곶쪽으로 바로 가기 십상이다.

그렇다보니 포항사람 조차 이곳에 잘 보존된 적산가옥(敵産家屋) 거리가 있는지 모르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수년전 모 방송국의 인기드라마였던 '여명의 눈동자' 촬영지가 바로 이곳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도 그리 많지 않다.

 

 

이곳에는 현재 원형 그대로의 일본인 적산가옥(敵産家屋)들이 10여채 정도 남아있다. 수리를 한 10여채 역시 원형 그대로는 아니지만 일본식 건물임을 금방알 수 있다. 위치는 구룡포읍 시가지에 있는 구 파출소에서 구룡포 공원 동쪽 끝까지 역 500여m . 이곳을 일제강점기때는 서울의 종로처럼 번창했다 하여 '종로거리' '종로가' '선창가' 등으로 불렀다.

 

당시 이 거리에는 기생 10여명을 둔 고급 술집만도 10여군데에 이르렀다고 한다. 특히 고등어 등 고기가 잘 잡히던 가을철에는 일본 보따리 장사꾼들까지 몰려들어 한달 동안 야시장이 열리기도 했다는 것.

 

이곳에 일본인들이 집단으로 이주해 살기 시작한 것은 1920년초. 즉 1922~1923년쯤 구룡포 방파제 1차공사가 끝나고 어항이 제 구실을 하면서 일본인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곳이 고향인 구룡포 등록문화재 추진위원회 서인만(49) 대표와 함께 원형이 잘 보존된 적산가옥 한 곳을 찾아 들어가 봤다.

 

 24살때 시집와 55년째 이 집에서 살고 있다는 집 주인 김옥순(79)씨의 도움으로 집 구석구석을 둘러봤다. 당시 여관이라 그런지 1·2층 합쳐 방이 10여개가 넘었다.

 

김씨는 "지난해 여름 당시 이집에 살았던 일본인 집주인의 손자가 집 뒤 정원에서 6살때 찍은 사진을 들고 찾아왔었다"며 "해방과 함께 집 주인이 가재도구 일체를 놓고 일본으로 간 것을 남편(지난해 작고)이 곧바로 인수한 것"이라고 말했다.

 

김씨는 현재 1층 입구방 한칸만 수리해 살고 있었다. 2층으로 올라가니 전형적인 일본 다다미 방 그대로였다. 당시 일본인들이 쓰던 책상, 장롱 등 가재도구들이 그대로 놓여져 있었다.

잠시 타임머신을 타고 해방전으로 되돌아 간 느낌이었다. 낡은 방문틀의 창호지로 사용한 색바랜 일본 신문에 눈길이 멈춘다.  

 

갑자기 술집에서 나는 기생들의 웃음소리, 술취해 여관으로 들어오는 부두 노동자와 어부들이 시끄러운 소리, 아침 햇살이 창살사이로 비치자 자리에서 일어나는 일본인들의 모습이 오버랩됐다. 당시 이 종로 거리를 쏘다니던 아이들은 지금쯤 몇살쯤 되었을까. 살아있다면 무얼하고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니 피식 웃음이 나온다. 그렇다면 일제 강점기에 구룡포에는 일본인들이 얼마나 살았으며, 주로 무엇을 했을까.

 

 

'영일군사'(1990년 발행)에 따르면 1933년의 경우 구룡포(당시 창주면)에는 1천123명(275가구)이 살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당시 포항읍 전체(포항면에서 1931년에 읍으로 승격) 2천563명에 이어 영일군에서 두번째로 많은 수다. 구룡포 일본인들은 주로 큰 배로 고기를 잡거나 배와 관련한 업종, 즉 식당이나 술집, 옷가게 등을 했다.

 

공원으로 오르는 계단 양쪽의 화강암 비석이 눈길을 끈다. 앞면에는 한국사람들의 이름이 있지만 뒷쪽에는 시멘트로 발라 지워져 있다. 서 대표는 "원래는 구룡포항을 건설할 때 공이 많은 일본인들의 이름을 뒷면에 새겼으나 해방 후 구룡포 공원을 조성할때 공이 많은 구룡포 사람들의 이름을 반대면에 새긴 것"이라고 설명했다. 

 

구룡포 공원은 해방전까지 일본 신사가 있었던 곳. 해방이후 공원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땅에 파묻혀 일부만 땅위에 드러나 있는 신사를 상징하는 화강암 돌이 눈에 띈다. 또 옆에는 구룡포항을 건설할 당시 공이 많았던 일본인 '十河彌三郞'(도가와 야사브로)의 공덕비가 세워져 있지만 글씨를 시멘트로 칠해 보이지 않는다. 뒷쪽 역시 연대가 새겨져 있지만 시멘트로 칠해져 있다.

 

화강암으로 된 하부와 기단석위에 높이가 7m나 되는 제법 큰 기념비로 푸른색을 띈 기념비 돌이 특이했다. 일본인 거리와 구룡포 공원을 보면서 일제 강점하의 아픈 역사가 가슴을 때린다. 한편 포항시는 적산가옥 거리 일대를 복원해 관광자원화할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 포항시 이병기문화관광과장은 조만간 문화재청 전문위원들이 이곳을 현장 답사할 거라고 귀띔했다.  경북일보 2008.2 임성남기자

 

 

 

호랑이의 꼬리 부분에 위치하는 구룡포해수욕장은 보통 해수욕장들과는 달리 가파른 언덕길 중간 부분에 있어서 바람이 거의 들어오지 않는다. 바로 뒤가 산이라는 것도 특이하며 산으로 더 올라가면 용흥사가 있는데 해맞이 절로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다. 반달형 백사장의 길이는 400m 이고 폭은 50m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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