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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충청남도

세종시 연기리 연기향교

by 구석구석 2015. 11.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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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향교

☎ 044-863-4219

연기면 교촌3길 10(연기리)

세종시기념물제6호(2012. 12. 31)

건립 - 1416년(태종16) / 1887년 현재위치 이전

규모 - 2,579평방미터

소유 - 충남향교재단

관리 - 연기향교

 

연기향교의 창건시기에 대해서는 정확한 연대를 확인할 수가 없다. 다만 조선초 대부분의 각 지방 군.현에 향교가 건립되었던 1407년(태종 7)~1413년(태종 13)사이에 창건되었을 것으로 추측될 따름이며, 창건 당시의 위치도 현재의 위치가 아니었다.

 

1530년(중종 25)에 완성된『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향교가) 현에서 서쪽으로 1리 떨어져 있다’는 기록과 1824년에 간행된 『연기지(燕岐誌)』의 ‘향교가 현의 동쪽 2리에 있다’는 기록의 차이에서 『신증동국여지승람』이 간행된 1530년부터 『연기지』가 간행된 1824년 사이에 향교의 이건이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정확한 이건연대나 그 사유는 확인할 수가 없다.

 

현의 서쪽 1리에 있었다는 향교의 원래 위치는 현재의 남면 월산리 황골마을 입구인 아랫말 야산의 남동향사면 중하단부로 추정되는데, 이곳에서는 향교건물의 축대 일부로 보이는 화강암의 자연석재가 주변에서 발견되었으며, 주변에는 무문, 어골문의 회청색 와편과 청자, 분청, 백자편이 산포해 있다.

 

현재의 향교 건물은 구릉지의 경사진 곳에 전학후묘식으로 배치되어 있는데, 남북으로 길게 2단의 대지를 조성하여 하단에는 강학공간인 명륜당을, 상단에는 제향공간인 대성전을 배치하였으며, 외삼문 대신 좌우 1칸 규모의 조그만 일각대문으로 정문을 삼고 있다. 또한 연기향교에는 향규 및 향안, 절목, 유생안 등 조선후기 연기지방의 신분구조와 향촌사회 운영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들이 지금까지도 전해지고 있어 주목된다.

 

연기현학명륜당 중수기

우리나라 정전에는 지방관이 살펴야 할 일곱가지 일이 있는데, 학교를 일으키는 것이 그 가운데 하나이니 급선무로 살펴야 할 것이다. 근세 이래로 크고 작은 고을의관리들이여기에 정성을 다한 자가 과연 몇 사람이나 되겠는가. 옛날 주나라 선자가 진 나라를 지날 적에 나그네가 이르렀는데 객관을 주지 안하는 것을 보고 진나라가 장차 망하리라고 탄식하였다. 무릇 객관의 건물이 흥망에관계가 없거늘, 주나라 관료의 성대한 제도가 폐기되고 추락함이 이와 같으미 그 연고를 알 수 있는 것이다. 하물며 학교의 설립이 얼마나 중대하거늘 허물어지고 비가 새고 기울어진 것을 어찌 그냥 내버려 둘 것인가. 진실로 능히 생각이 여기에 미친다면 정치 체제의 큰 것을 알 것이다.

 

지금 연기 현학의 여러 선비들이 이임받아와서 나에게 고하기를. "지난해 경인년 봄에 송현령이 대성전의 중수를 시작하여 공사를 이루지 못하고 임기를 마쳤는데, 이종영 현령이 이어 잘 준공하였습니다. 몇 해가 지나 지금 조현령이 부임한지 4년이 지났는데, 한 마음으로 공무에 정성스럽고 부지런하여 학교의 정사에 정성을 다하여 명륜당이 무너져 내린 것을 크게 근심하고 개탄하여 녹봉을 출연하고 재물을 모아 향교 가운데 몇몇 사람들과 더불어 다방면으로 나누어 계획하여 몇 달이 지나보니 보수하여 지붕을 이은 것이 새 집과 같아서 문과 담장과 동,서재와 요사채들이 또한 매우 튼튼하고 완벽하게 되었습니다.

 

공부할 때는 물론 실 때에도 학문을 닦는 것을 전념하여 이에 그 알맞음을 얻으니 시로 우리 현령의 정치적 교화를 잊을 수 없는 한 실마리가 되었습니다. 원컨데 선생님의 함 마디 말을 얻어서후세에 알리고자 합니다."하고 하니, 아! 이것은 진실로 기록하지 않을 수 없도다. <중략>

 

참조자료 - 연기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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