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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경기한강유역

김포 48번국도-애기봉 한재당 장만선생

by 구석구석 2008. 4.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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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금리(佳金里)
본래 통진군 소이포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가좌동, 금포리, 두월리를 병합하여 가좌와 금포의 이름을 따서 가금리라 하여 하성면에 편입됐다. 금월동, 애기봉, 충정공별묘, 풍덕펄, 한재당별묘, 보신암, 가좌동 등의 자연부락이 있다.
 

 

하성면 가금리, 조강리에 걸쳐 있는 높이 155m의 애기봉

관리사무소 031-988-6128, 휴게소 및 주차장 031-988-0878

 

병자호란 때 평양감사와 애첩인 애기(愛妓)와의 슬픈 사랑의 일화가 서린 곳이다. 한 해에 약 20여 만명이 방문하고 있으며, 김포 반도 최북단 서부전선의 수도권 근접 지역에 위치, 북녘땅을 건너다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해마다 성탄절이면 이곳에서 대형 크리스마스 트리가, 석탄일이면 대형 연등이 불을 밝혀 북녘땅까지도 밝은 빛을 전한다. 

한강과 임진강이 서로 만나 서해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지점이라 경치도 아름다워서, 실향민이 아닌 사람들에게도 휴일 나들이 장소로 좋다. 지금은 전망대가 들어서 국민 안보 교육 현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실향민의 망배를 위하여 1993년에는 망배단이 세워지기도 했다. 
 

해병대의 투혼이 깃든 전적지로도 유명하다. 애기봉 관광 및 견학 수익금은 재향군인회에서 전액 보훈기금으로 활용하고 있다.

 

○ 관람내역  
 - 망원경 및 관람경 이용 북녘땅과 북한관광 명소관람
 - 김포지구 해병대 전적비 기념탑 관람
 - 해병대 관련 VTR시청(강당 300여석)
 - 애기봉 브리핑 실시(1-2일전에 예약시 가능)

 

 통일 대비 평화-협력-교류의 중심으로서 김포시의 이미지를 대내외에 널리 알리기 위해 애기봉 평화공원을 조성한다. 애기봉 평화공원은 월곶면 조강리 산4-1번지 일원으로 1단계 애기봉 관광지개발, 2단계 배후단지 개발사업을 단계적으로 추진할 방침이다.


1단계는 월곶면 조강리 산4-1번지 일원으로 7만㎡면적에 2011년까지 사업비 180억원을 투입, 전망대, 해병대전시관, 전쟁체험관, 애기-평화의소 영상관을 설치할 계획이다. 2단계는 하성 가금리 238일원으로 26만㎡에 대해 민자사업을 추진 검토중에 있다. 이 곳엔 예술인촌, 테마(워터)파크, 전원휴양촌, 자연생태촌, 분수광장 등을 설치, 종합적인 테마마크로 조성될 전망이다.

애기봉은 북한을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천혜의 김포 관광자원으로 시설 보완 등을 통해 국내외 관광객이 쉽게 찾을 수 있는 테마공원으로 조성할 예정이다.

1975년 9월 5일에 경기도기념물 제47호(1975.9.5)로 지정된 한재당은 조선시대의 문신 이목(李穆)선생의 위패를 봉안한 곳으로, 1848년에 건립된 구사당과 1974년에 건립한 신사당이 있다.

 


구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목조와가로 건평이 10여 평이며 원래의 사당은 일주문과 담장이 둘러져 있었으나 신사당이 건립되면서 일주문은 없어졌고 지금은 담장만 남아 있다. 신사당은 12평 규모의 콘크리트 건물이며, 건물 내에 이목선생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으며, 1717년(숙종 43년)과 1722년(경종 2년)에 추증한 교지가 보관되어 있다.

 
선생은 성종2년(1471)에 출생하여 일찍이 점필제, 김종직에게서 학문을 배웠으며 연산군1년(1495)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연산군 4년(1498)에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윤필상의 모함을 받아 김일손, 권오복 등과 함께 사형을 당하였다. 그러나 형장에 나갈 때 조금도 안색이 변하지 않았고, 스스로 절명의 시를 짓고 세상을 떠났다.

 

가금리102 장만선생 영정 및 공신록권 지방유형문화재 제142호

선조22년(1589) 생원·진사의 양시에 합격하고 선조24년(1591) 별시문과에 합격하고 김지남·박진원등과 함께 병과로 급제하여 성균관에 들어갔다. 승문원을 거쳐 예문관 검열이 되었으며, 전생서주부, 형조와 예조의 좌랑, 성균관 전적·직강 시강원 사서·사간원 정언·사헌부 지평을 두루 역임하였다. 선조32년(1599) 외직으로 나아가 봉산군수가 된 후 다음해 품계가 올라 통정대부로 승정원동부승지를 제수 받았다.

수년동안 안으로는 형조와 병조의 참판을 거쳤고, 밖으로는 전라도·함경도의 관찰사를 역임하였다. 선조40년(1607) 함경도관찰사로 재임할 당시 누루하치의 침입을 경고하여 그 방어책을 세우도록 상소하였다. 광해군2년(1610) 다시 함경도관찰사가 되어 방위의 시급함을 역설하고 동지중충부사로 제수 받아서는 호지의 산천지도를 그려 바쳤다.


심하에서 변고가 일어날 조짐이 보이자 체찰부사로 임명되어 그곳을 진무하였다. 이 공으로 다시 품계가 올라 숭정대부가 되어 병조판서를 제수 받았다. 인조반정때는 도원수가 되었다. 이 당시 임금이 손수 모화관에서 전송하면서 어도를 내리고 수레바퀴를 밀어보낼 정도로 극진하였는데 평양에 개부하였다.  이괄의 난을 평정하여 진무공신 1등에 보국승록대부에 오르고 옥성부원군에 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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