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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강원도

고성 송강리마을 육송정 홍교 건봉사 건봉산 향로봉

by 구석구석 2008. 3.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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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강리마을

송강리는 거진읍의 상수원이자 지역 농사의 젖줄인 노루목 저수지와 송강천 그리고 푸르른 산과 들이 아름답게 펼쳐지는 산골 마을로, 물 좋고, 산 좋은 산촌마을이다. 특히, 청정한 자연환경에서 친환경 오리농법 금강산 오대미를 생산하여 자연과 건강이 담긴 밥상을 소비자들에게 올리고 있다. 제한 된 공간이 아닌 넓은 산과 들에서 야생산닭, 흑염소를 기르고, 산에서 나는 산나물과 도라지, 산더덕, 감자, 옥수수 등 순수 자연식품을 공급하고 있다.


송강리를 대표하는 상징물로 송강천과 노루목저수지 그리고 건봉사가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천년고찰(千年古刹) 건봉사(乾鳳寺)가 인근에 위치한 역사 깊은 마을로 아직까지도 사찰지가 발굴의 손길을 기다리는 문화와 전통이 서려 있는 곳이다. 학봉산하에 있는 대대골(大谷村)과 고대에 동구(東口)섬이라 부르던 몽강촌(夢江村)을 합하여 상걸탄리(上巨呑里)라 불러오다 후에 송강리라 부르고 있다.

수복 당시 마을에 뒤늦게 입주가 허용되었으며, 속칭명은 동쪽에 송정리, 서쪽에 수동면, 남쪽에 석문리, 북쪽에 용하리가 위치하고 있어서 사거리라 부르기도 하며 마을을 가로지르는 송강천과 주변에 계곡이 많아 쉴 곳이 많다.

 

해상리 1041 보물 제1337호(200.2.2) 육송정 홍교

건립년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건봉사 능파교와 함께 을축년(1745년)의 대홍수로 붕괴되었던 점을 고려할 때 능파교(1704년)와 비슷한 시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1748년에 편찬된 <杆城郡邑誌>에 육송정홍교가 언제 만들었는지 알 수 없다고 기록되어 있어 능파교보다 더 오래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간성읍 해상리와 탑현리의 경계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하천의 폭이 12.3M정도 되는 곳에 석축을 쌓고, 길이 10.6M의 다리를 놓았다. 현재는 상면에 목교(木橋, 폭3M)가 가설되어 있다.

홍예의 기초는 자연지형을 잘 활용하여 동쪽은 암반(높이 1.7M)을 그대로 이용하여 그 위에 홍예돌과
비슷한 크기의 장대석으로 1단의 지대석(높이30Cm)을 두었다. 서쪽에서는 3단의 지대석을 쌓은 후 그 위에 홍예를 올렸는데, 1단에 2개식의 장대석을 이어서 만들었다. 서쪽지대석의 높이는 1단이 묻혀 있어 정확히 알 수 없으나 2단이 70Cm, 3단이 60Cm로 매우 거대하다. 

 

신라 법흥왕 7년(520년) 창건된 건봉사

 

건봉사는 전국(全國) 4대사찰(四大寺刹)의 하나로 월정사(月精寺)와 더불어 전국 31개 사찰의 본산(本山)으로 승려수만 700여 명을 헤아리는 큰 사찰이었다 한다. 이 절은 신라(新羅) 법흥왕(法興王) 7년(520)에 아도화상(阿道和尙)이 금강산(金剛山) 남쪽 명당을 찾아 이곳에 당시 원각사(圓覺寺)를 건립(建立)하였다.


그 뒤 경덕왕(景德王) 17년(758)에 발징화상(發懲和尙)이 중수(重修)하고 고려(高麗) 공민왕(恭愍王) 7년(1358)에 나옹화상(懶翁和尙)이 중수하였다고 한다. 건봉사라 이름을 바꾼 것은 이 절의 서쪽에 새 모양으로 생긴 바위가 있어 건(乾)과 봉(鳳)을 합쳐 지은 이름이다.
 

건봉사 불이문, 건봉사의 당우 가운데 전란을 피한 것은 불이문 하나다. 불법을 수호하는 금강저가 기둥 받침돌에 새겨진 불이문에는 총탄의 상처가 남아 있다./최원석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서산대사(西山大師)가 선조(宣祖)의 명(命)을 받들어 팔도십육종도총섭(八道十六宗都摠攝) 겸(兼) 의병대장(義兵大將)의 직책을 받게 되자 그 제자인 사명대사(四溟大師)가 승병(僧兵)을 모집하였는데 모두 6,000여 명의 승병이 이곳에 합집, 왜적(倭敵)을 무찔렀다 한다. 한국전쟁으로 불타 지금은 옛 절터만 남아있다.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진 건봉사. 석가모니 부처의 치아사리를 직접 볼 수 있는 곳

 

아도화상과 도선국사, 나옹화상, 사명대사, 만해 한용운 등이 이 절의 이름을 널리 알린 고승들이니 한국불교사가 여기 있다. 사명대사는 임진왜란 때 이곳에서 승군을 일으켰고, 일본에서 석가모니의 치아 사리를 찾아 건봉사에 봉안하기도 했다. 사명대사가 가져온 석가모니의 치아 사리는 만일염불원에 모셔져 있어 일반인들의 친견이 가능하다.

 

이 치아 사리는 본래 통도사에 있었다. 이것을 임진왜란 때 일본이 훔쳐가자 사명대사가 직접 일본으로 건너가 담판을 벌여 되찾아 왔다. 그 후 건봉사는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으로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1900년대 초까지 영화로운 시절을 보냈다.

 

 

진신사리

건봉사는 한국전쟁 때 잿더미가 되었다. 사람들이 일으킨 전쟁으로 폐허가 된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1945년 북한의 통치권에 묶이고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5월10일. ‘부처님 오신 날’을 불과 3일 앞두고 재앙을 맞이했다고 한다. 유엔군은 후퇴하던 북한군의 중간집결지였던 건봉사에 무차별 공습을 벌인다. 3~4대의 폭격기는 대웅전 지역의 모든 전각을 불태웠다. 국보 412호 ‘금니화엄경’ 46권과 도금원불, 오동향로, 철장 등 사명대사 유물이 모조리 사라졌다.

 

이 지역은 2년간 처절한 고지전의 현장이었다. 향로봉·건봉산 전투는 물론 북한 쪽의 351고지전투, 월비산 전투 등 전사에 남을 지루한 싸움이 벌어졌다. 1951년 4월부터 휴전 직전까지 16차례의 공방전에서 국군이 쏘아댄 포탄만 10만발에, 미 7함대 함포사격과 공군기 폭격으로 초토화됐다.

 

적멸보궁에서 바라본 전경

 

국군 수도사단을 시작으로 이곳에 교차 투입된 국군 부대가 7개 사단에 이르고, 그때마다 이곳에 주둔하던 국군에 의해 건봉사의 남아 있던 전각과 요사채는 군부대 막사와 땔감으로 헐려 나갔단다. 휴전 후에는 주둔한 군부대의 실화로 낙서암 지역이 소실되는가 하면 고승들의 부도탑이 밀반출되고 그 많았던 중요 문화재들이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건봉사의 당우 가운데 전란을 피한 것은 불이문 하나다. 불법을 수호하는 금강저가 기둥 받침돌에 새겨진 불이문에는 총탄의 상처가 남아 있다.

 

건봉사 부도밭

건봉사의 부도는 80여기. 이 가운데 온전하게 남은 것은 60여기이고, 나머지 10여기는 부도비는 없고, 받침돌만 남아 있다. 이 부도밭에는 특이하게 ‘생사리탑’이 있다. 이 부도는 살아있는 몸에서 얻은 사리를 안치한 것이다. 만해 한용운이 집필한 ‘건봉사 및 건봉사 말사 사적’에 따르면 1854년부터 10여명의 스님이 3년간 수도하면서 살아있는 몸에서 빼낸 26과의 사리를 안치한 것이다.

 

 

건봉사 능파교와 적멸보궁

 

고성 건봉사 보물제1336호(2002.2.1) 능파교는 건봉사대웅전 지역과 극락전을 연결하고 있는 홍예교로서 규모도 비교적 크고 잘 보존 되어있다. 조선시대 숙종 30년(1704)부터 숙종 33년(1707)사이에 처음 축조되었다는 것을 경내 불이문 옆에있는 능파교신창기비(凌坡橋新創記碑.숙종 34년 1708 건립)를 통해 알 수 있다.
그 후 영조 21년(1745)에 대홍수로 붕괴되어, 영조 25년(1749)에 중수하였고, 고종 17년(1880)에 다시무너져 그 석재를 대웅전의 석계(石階)와 산영루(山映樓)수축에 이용하기도 하였다.

다리 규모는 폭3M, 길이14.3M, 다리중앙부의 높이는 5.4M이며, 다리의 중앙부분에 큰아치(홍예)를 틀고 그 좌우에는 장대석으로 축조하여 다리를 구성하였는데 홍예는 하부지름이7.8M이고 높이는 기석(基石)의 하단에서 4.5M이므로, 실제의 높이는 조금더 높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돌솟대의 머리에는 돌로 새긴 오리가 앉아 있다. 또 능파교 양켠에 있는, 수행의 과정을 나타내는 십바라밀을 새긴 석주 또한 건봉사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다.

 

문화재자료35호(84.6.2) 건봉사불이문

불도를 닦는 한가지 마음만을 가지라는 대자대비하고 심오한 불교의 교리를 담고 있다. 거진읍 냉천리 건봉사 사지내에 있는 불이문(不二門)은 1902년에 건립되었으며 6.25동란 중 766칸의 건봉사 사찰이 소실되었으나 유일하게 남아있는 당시의 건물로 강원도 문화자료 제35호로 지정 보존되고 있다.

원통형으로 다듬은 높이 1.61m의 4개의 석주위에 나무기둥을 세워 지은 겹처마 팔작지붕의 다포집으로 석주에는 길이 90cm크기의 금강형과 비슷하게 생긴 문양이 새겨져 있고 건물 위쪽 중앙에는 조선말기 명필인 해강(海岡)선생이 쓴 불이문 현판이 걸려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불이문의 뜻은 이문을 들어서는 사람은 두가지 마음을 갖지말고 오로지 불도를 닦는 한가지 마음을 가지라는 대자대비하고 심오한 불교의 교리를 담고 있어 이문을 지나는 신도의 옷깃을 여미게 한다.

해강은 조선의 마지막 왕세자인 영친왕이 일본에 볼모로 끌려가기 전 서도스승으로 서예에 뛰어났으며 본명은 김규진(金圭鎭)이다. 그가 금강산 구룡폭포 석면에 미륵불이라고 새겨놓은 글씨는 획 하나가 사람이 들어설 정도로 깊고 거대하며, 이 글씨를 쓸 붓이 없어 칡넝쿨의 섬유질로 묶어서 썼다하며, 암벽의 각자는 유점사 승려가 3년의 공을 들여 새겼다 한다.

 

찾아가는 길    진부령휴게소 → 46번국도 → 진부령계곡 → 광산초교 지나 229m 정도 직진 후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진입 → 해상리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진입 → 건봉사 안내판 → 건봉사

 향로봉·건봉산 천연보호구역 천연기념물 247호(1973년 7월 10일)

고성군과 인제군에 걸쳐 위치한다. 칠절봉으로부터 향로봉·건봉산을 지나 비무장 지대까지 이르는 이곳은 우리나라 중부 온대림의 특성을 그대고 지니고 있다. 건봉산의 고진동 계곡에는 신갈나무가 주로 자라고 철쭉·산앵도나무·조록싸리·조릿대 등이 함께 숲을 이루며, 소나무·전나무·서어나무·층층나무도 자라고 있다.

향로봉 지역은 해발 500m부터 서어나무류 군락, 700m부터 사스래나무와 함박꽃나무 군락이 형성되어 있다. 정상 부근은 군 작전상 큰 나무들을 제거한 탓으로 미역줄나무, 다래덩굴이 엉키어 있고 능선 전반에 걸쳐 하늘말나리,금강초롱 등의 희귀 식물들이 자라고 있다.

 

 

 

 
향로봉과 건봉산의 계곡에는 칠성장어·산천어·금강보치·버들치·가는돌고기 등 보호가 필요한 물고기들이 서식하고 있으며, 조류는 건봉산 지역에서 24종, 향로봉 지역에서 11종이 확인된 바 있다. 포유류는 24종이 확인되었는데, 이 가운데 수달·사향노루·산양·곰·하늘다람쥐 등은 특별한 보호가 필요하다.

향로봉·건봉산 천연보호구역은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천연의 숲이 그대로 유지되어 있고, 동·식물상이 잘 보존되어 있는 대표적인 지역이므로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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