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방방곡곡/인천광역시

인천 계양-계산역주변 부평도호부 욕은지

by 구석구석 2008. 3. 11.
728x90

 

 

 

 

부평초등학교 교정 동편에 위치하고 있는 욕은지(浴恩池 시문화재자료 제1호, 1982.3.2 지정) 는 장대석을 쌓아 가로 18cm, 세로 16cm 규모로 축조한 장방형의 연못이다. 연못 내에는 돌로 쌓은 작은 동산을 만들고 각종 초화를 심었으며 석교가 놓여 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 곳은 인조와 관련이 있다고 전하지만 인조는 부평에 거동한 적이 없어 실제로는 정조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정조는 왕위에 오르자 생부인 장헌(사도) 세자의 묘를 양주에서 수원 화산으로 옮기고 1년에 한 차례씩 전배하였다. 특히 21년(1789)에는 먼저 김포 장릉을 전배하고 부평·안산을 거쳐 현륭원(사도세자의 원)을 참배하였다. 이 때 정조는 부평에 주정(晝停 : 낮에 머뭄)하여 부사를 인견하며 활을 쏘고 이 곳 욕은지에서 손을 씻었다고 한다.

 

어사대(시문화재자료 제3호, 1990.11.9 지정) 는 욕은지 동쪽 10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는데 큰 돌로 대를 만들고 중앙에 『어사대 광서정해 중수 (御史臺 光緖丁亥 重修)』라고 새긴 돌이 놓여 있다. 이 곳도 인근의 욕은지와 같이 정조와 관련이 있는 곳으로 정조가 김포 장릉을 전배하고 부평·안산을 거쳐 수원 화산의 현륭원(지금의 융릉 : 사도세자 의 능)을 전배하러 가는 도중에 이곳에 들러 휴식을 취하며 활을 쏜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정조는 활쏘기를 즐겨하여 수원 행궁(임금이 거동할 때 묵었던 별궁)에 들를때마다 활쏘기를 하였을 뿐만 아니라 신하들에게도 활을 쏘게 하였다고 한다. 당초 이 곳 어사대 후문에는 정자가 있었다고 전하는데 현재는 고종 24년 (1887) 중수하였다는 표지석만 남아 있다. 

 

고려 의종 4년(1150) 안남도호부가, 고종 2년(1215) 계양도호부가 설치되었으며,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는 태종 13년(1413) 부평도호부(시유형문화재 제2호, 1982.3.2 지정)가 각각 설치되었다. [부평부읍지]에 의하면 부평도호부 내에는 객사, 동·서헌, 삼문, 근민당, 좌·우 익랑, 동·서책방, 사령청, 향청, 포도청, 훈무당, 부창 등 여러 채의 건물이 있었다고 전한다. 이러한 청사 규모는 인천도호부를 능가하는 것으로 이는 부평이 고려시대 이래로 내려온 웅부(雄府)였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현재 남아 있는 내아(동헌이라는 견해도 있음)건물은 당초 `ㄱ`자형 건물이었으나 현 위치로 이전하면서 `ㅡ`자형 건물로 변형되었으며 정면 6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도리집이다.

 

계산동 은행나무(시기념물 제11호, 1992.5.15 지정)는 수령 600년, 높이 25m에 달하는 노거수이다. 은행나무는 중국산의 낙엽침엽 교목으로 불교·유교를 따라 들어왔기 때문에 사찰이나 향교 뜰에 많이 심었으며, `은행`이란 이름은 열매가 겉으로 보기에는 살구같이 생겼으나 과육(果肉)을 제거하면 은백색의 종자가 나온다는 뜻으로 붙인 이름이다. 또한 잎은 두 갈래로 갈라지고 흡사 오리발과 비슷하다하여 중국에서는 압각수(鴨脚樹)라 부르고 있으며, 열매는 식용·약용으로 쓰이고 목재는 귀중한 가구재로 사용된다. 현재 부평초교 교정에 위치하고 있는 이 나무는 본래 부평도호부청사의 풍치목으로 심어졌다고 전한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