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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전라남도

영광 길룡리 원불교 개법성지 영산성지 최초설법지(이씨재각) 구수산

by 구석구석 2016. 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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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 개법성지인 '영산성지'

 

원불교 발상지인 이곳은 창시자인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가 탄생하여 성장과 구도의 과정을 거쳐 대각이라는 종교적 체험을 이룬곳으로 매년 수만명의 순례객들이 줄을 잇고 있다.

 

성지순례길영산원→영산 선학 대학교→중앙봉→노루목→대각터→구호동→삼밭재→설레바위봉→상여봉→옥녀봉→탄생가→구간도실→방언관리소터→정관평→영산원(소요시간:4시간)

 

원불교는 영광군 백수읍 길룡이 영촌마을에서 태어난 소태산 박중빈(1891~1943)이 창시한 종교로 세계에 500여개의교당과 100만 신도가 있다. 원불교에서 일컫는 성지는 소태사나 대종사가 탄생하여 개교한 영광의 영산성지인 이곳과, 교화의 장을 연 익산성지(익산 신룡동), 교리를 초안하고 교강을 발표한 변산성지 등이 있다.

 

개법성지인 이곳에는 대종사의 생가, 기도터인 삼밭재, 마당바위, 대각을 이룬 노루목, 제자들과 함께 바다를 막아 이룬 정관평 방언답 등이 있어 성지 순례차 전국의 많은 교도뿐만 아니라 관광객이 많이 찾아온다.

 

삶이 허전하고 마음이 갈피를 잡지 못할 때, 내 삶의 방향이 맞는지 헷갈린다 싶을 때, 훌쩍 영산성지에 들러보세요. 영산은 나의 허전함을, 갈 길 몰라 서성이는 마음을 다습게 안아줄 넉넉한 품을 가지고 있답니다.

영산은 대종사님께서 태어나시고, 구도하시고, 대각하시고, 언을 막으시고, 기도하신 성스러운 곳이기 때문입니다.

 

대종사님은 당신이 태어나신 이곳에서 해야 할, 할 수 있는 모든 일들을 전력을 다해 이루셨습니다. 영산이 다른 성지와는 달리 대종사님의 기운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이유입니다. 영산성지에서 제일 먼저 발길이 머무는 곳은 노루목 대각터입니다. 대각터에는 만고일월 비가 덩그라니 서서 온갖 바람을 맞고 있습니다. 이 비는 대종사의 대각을 기념하여 원기56년 9월, 개교반백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세웠습니다. 다섯 단의 기단 위에 2.1m 높이의 화강암 비신(碑身)을 세운 아주 단순한 구조인데요. 앞면에는 萬古日月, 뒷면에는 圓紀 圓年 (一九一六年) 丙辰 三月二十六日 이른 새벽 少太山 大宗師 이 터에서 大覺을 이루시다. 圓紀 五十六年 九月一日. 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습니다.

 

글씨는 유명한 서예가인 강암 송성용 선생 작품이랍니다. 글과 글씨가 어쩜 그리도 격이 맞는지 보면 볼수록 감탄사가 절로 나옵니다. 글자 뜻으로 풀면 ‘아득한 과거부터 무한한 미래까지 영원한 해와 달의 광명’으로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비는 ‘대종사의 지혜 광명과 공덕이 형상있는 것 중에서 가장 밝은 일월의 광명보다 더 밝고 영원하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참으로 멋진 표현입니다. 넓혀 해석하면 ‘대종사님의 대도정법이 영원한 세월동안 빛을 비춰 일체생령을 광대무량한 낙원으로 인도하겠다’는 뜻이라 할 수 있겠지요.

자료 - 원불교신문 문향허

 

 

 

 

 득도후 최초로 설법하신 이씨재각

 

돛드래미 이씨재각은 대종사가 대각 후 최초법어를 설하신 곳이다. 돛드래미는 행정상으로 길룡리 내에 있는 마을로 범현동이라고 한다. '범현에 돛달고 법성에 노저으니 밀물도 뜻있어 영산으로 돌아드네'라는 성가 3장 가사에서 범현이 바로 이곳이다.
돛드래미 이씨재각은 전주이씨의 재각으로 원불교 건축물은 아니다. 그럼에도 원불교에서 이곳을 중요시 하는 이유는 대종사가 대각 직후 인류의 나아갈 새 방향으로 최초법어를 설하시고, 그 첫 사업으로 저축조합을 조직한 교단 최초의 교화지라는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때 대종사가 설한 최초법어는 '수신의 요법, 제가의 요법, 강자 약자 진화상의 요법, 지도인으로서 준비할 요법'이다. 대종사가 최초법어를 설한 곳은 맨 오른쪽 방이다.

 

대종사님은 최초법어를 설하신 후 옥녀봉에서 천제를 올린 후 믿고 따르던 40명의 제자 가운데서 신심이 굳은 여덟 사람을 골라 표준제자로 삼고 저축조합을 만들었다. 이씨재각은 1918년 구간도실이 짓기 전까지 단원들의 모임장소로 사용되었다.

 

그렇다면 대종사님은 많은 장소 중에서 이씨재각에서 최초법어를 설하셨을까? 물론 이씨재각이 구간도실이 짓기 전까지 여러 사람이 모일 수 있는 공적 장소로 적합했기 때문에 이곳을 택하셨다고 볼 수 있다.

단지 그 뿐이었을까? 최초법어를 설한 것은 대각 직후라고 한다. 그 당시는 천제를 올리기 전이므로 제자들도 없었다. 대종사님은 이미 경전을 열람하시고 유불선 3교를 통합활용하는 광대하고 원만한 종교를 세울 청사진을 가지고 있었다. 불법을 바탕으로 인도상의 요법을 밝히는 생활종교를 건설하고자 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유교의 사당인 이씨재각을 택한 것은 '내 법이 인도상의 요법을 밝히는 법'이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실제로 최초법어의 내용이 이를 증명한다.

원불교신문 [1443호] 2008년 09월 26일 문향허기자

 


원불교 창시자 박중빈이 깨달음을 얻은 성지  구수산

영광이 낳은 인물은 고려시대의 문신 김심언, 조선 중기의 학자요 의병장인 강항, 근대의 원불교 창시자 소태산 박중빈, 현대의 국악인 공옥진을 꼽을 수 있다. 특히 소태산은 구수산의 정기를 받아 태어났으며, 원불교인들은 옥녀봉, 마촌앞산봉, 촛대봉, 장다리봉, 대파리봉, 공동묘지봉, 밤나무골봉, 서래바위봉, 중앙봉을 일컬어 아홉봉우리라 부른다.

또한 풍수지리 상 마을을 아홉 마리 호랑이가 둘러싸고 노리는 형국인 구호산(九虎山)이라고도 한다. 이 아홉 봉우리 위에서 소태산이 아홉 제자들과 기도를 드렸다고 해서 구수산을 신성스런 산으로 여긴다. 옥녀봉은 수행의 표본으로 소태산 박중빈이 7세 때부터 수양을 시작한 곳으로, 바위에 그려진 원은 원불교의 상징이다.

 

구수산(九岫山·351m) 주능선은 훌륭한 조망대로 북쪽은 홍농읍의 금정산, 그 우측은 옛적에 동진에서 우리나라로 불교가 처음 도래했다는 법성포, 서쪽은 서해바다 가운데 고슴도치 형상인 위도, 동쪽은 원불교의 상징인 동그란 원이 바위벽에 그려진 옥녀봉이 한눈에 잡힌다. 그 남쪽 아래 노송군락지에는 소태산의 생가와 아홉 제자들이 최초로 세운 교당 구간도실터가 있다.

 

1891년 소태산이 태어난 생가터에는 초가집이 옛 모습으로 복원돼 있고, 남쪽 개울 건너 노루목에는 그가 진리를 깨달았다는 대각지가 있다. 구수산 동쪽 기슭에 원불교성지, 서쪽에는 모자바위, 고두섬, 대종사가 제자들과 간척한 정관평 들녘이 풍요로움을 더해준다.

 

어려서부터 우주자연현상과 생로병사의 이치에 대해 큰 의심을 품고 20년에 걸친 구도와 고행 끝에 26세의 나이로 대각한 그가 후천개벽의 새문명사회를 이끌어갈 원불교의 문을 열었다는 것은 존경받아 마땅하다. 소태산이 득도한 영산성지의 북서쪽에는 서해바다의 거센 해풍을 막아주려는 듯 구수산이 솟아있다. 그 산자락을 산태극 수태극처럼 휘감고 도는 백수 해안일주도로는 유채, 동백, 코스모스가 사시사철 꽃길을 연출하고, 아름다운 바다 풍광과 서해낙조가 빚어내는 한 폭의 그림 같은 자태가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 중 9위로 선정된 길이다.

 

영산방언 주변을 보은강이라 하며 연꽃방죽

영산성지를 둘러보고 나오니 삼각추처럼 뾰쪽한 옥녀봉 중턱에 있는 바위에 원불교의 상징인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다. 도로변 해당화 꽃길에서 돌계단을 오르면 묘소 4기가 있고 곧이어 원불교에서 오석으로 세운 원불교 제명바위를 지나면 바위에 하얗게 그려진 원불교 상징인 동그라미가 마중 나온다.

 

바위를 돌아 오르면 소태산의 아우인 육산 박동국 대호법을 소개한 옥녀봉(152m)에 닿는다(들머리에서 15분 소요). 하얀색 표지판이 앙증맞다. 옥녀봉을 조금 지나면 전망대바위에서 노경호씨가 소태산이 제자들과 바다를 간척해서 황금들녘으로 만든 정관평이라고 설명해준다. 정관평에는 쇠스랑섬을 비롯한 몇 개의 육지 섬이 있고, 와탄천과 바닷물을 막은 배수관문이 내려다보인다. 그 뒤로 불교가 도래한 성지를 조성하고 있는 법성포가 손에 잡힐 듯하다.

 

탈렌트 박주실이 암투병을 하며 인재양성을 했다는 대안학교인 영산성지고교를 내려다보노라니 불현듯 퇴계 이황의 읊조렸다는 요산요수란 시 구절이 뇌리를 스친다. ‘청산은 어찌하여 만고에 푸르며, 유수는 어찌하여 주야에 그치지 아니하는고, 우리도 그치지마라 만고청청하리라.’

 

내림길을 가면 남쪽의 길룡리 구간도실터에서 오는 길을 만나고 오름길에서 뒤돌아보니 옥녀봉이 또 오라고 손짓한다. 앙증맞은 표지판이 있는 상여봉에는 묘소 1기가 지키고 있다(옥녀봉에서 25분 소요). 상여봉 옆 전망바위에 서면 북으로 정관평 들녘과 불교도래지 법성포가 지척이다. 서래바위봉을 지나면 남쪽 영산대학교에서 오는 삼거리를 만나고, 내려가면 남쪽 마당바위, 북쪽 구수리를 잇는 임도와 돌탑 2기와 이정표가 있는 삼밭재다(옥녀봉에서 1시간 소요).

 

능선을 올라서 산허리를 우회해서 오르면 불복재다(구수산에서 30분 소요). 사람들 발길이 닿지 않아 명감나무와 산딸기 가시, 잡목이 발길을 잡는 길을 가면 327m봉을 만난다. 

 

두 개의 바위가 석굴처럼 생긴 곳을 지나면 잡목이 발길을 사납게 잡아챈다. 시들어 버린 꽃무릇이 반겨주는 능선을 오르면 삼각점(영광 428)은 있으나 봉수대가 없는 봉화령이다(구수산에서 30분 소요). 봉우리 중 가장 높은 봉우리(374m)인데 왜 봉화령(嶺)이라는 고개이름이 붙었는지 아리송하다. 남쪽은 백수우체국에서 갓봉과 모재를 거쳐서 오는 코스고, 북쪽은 가자봉과 뱀골봉을 거쳐 해안공원이 있는 대신리 코스를 알리는 안내판이 고맙다.

 

서해바다와 백암염전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등산로 정비가 잘된 북쪽 능선으로 발길을 옮기면 서쪽 홍곡리 하산로를 만나고 곧이어 봉우재다. 봉화대터를 지나면 흐드러지게 핀 억새와 법성포 앞바다가 어우러져 가을정취가 흠뻑 묻어난다. 박영근 고문과 함께 노익장을 과시는 윤재천 선생이 바윗길을 내려오는 모습이 오늘따라 멋져 보인다. 가자봉은 북쪽에 있는 고스락인데 서쪽으로 가자골을 지나 해안공원으로 가는 하산로가 있는 안부에 가자봉이라는 이정표(북쪽 뱀골봉 1.7km)를 잘못 세웠다.

 

북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큰 바위가 산객을 맞는다. 고스락을 올라서면 가자봉이고, 회원들이 탁 트인 서해를 바라보며 환호성을 지른다.

 

삼각점(영광 425)이 있는 뱀골봉에 닿으면 이정표(덕산 1km)가 반긴다. 탁 트인 바다를 바라보며 실크로드를 가노라면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하늘을 찌를 듯이 쭉쭉 뻗은 해송들이 군신처럼 늘어서 있는 길을 가면 가을바람에 파도처럼 일렁이는 억새밭이 반기는 날머리다(구수산에서 2시간 소요).

 

/ 월간산 김정길 전북산악연맹 상근부회장

 

보은강 연꽃방죽

○제1코스  도로~옥여봉~상여봉~(2.5km)~삼밭재~(1.2km)~구수산~(3.5km)~봉화령~가자봉~(4.5km)~뱀골봉~(1.5km)~대신리 77번 국도 <13.2km, 5시간 소요(점심시간 포함)>
○제2코스  백수우체국~전망바위~(3.3km)~갓봉~모재봉~(3km)~봉화령~(3.5km)~구수산~(1.2km)~삼밭재~마당바위~(2km)~영산대학교 <13km, 5시간 소요>

 

일번지식당(356-2268) 영광굴비로 유명한 법성포에 위치한 이 식당은 250석을 갖추고 오직 굴비한정식을 고집하며 30여 종에 달하는 각종 푸짐한 반찬으로 입맛을 돋운다.

 

다랑거지식당(356-5588) 어머니 손맛을 이어가는 맛의 고장 법성포에서 50년간 꽃게간장으로 게딱지에 비벼먹는 밥이 일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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