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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경기도

안성 죽산리-봉업사지 죽산향교

by 구석구석 2008. 4.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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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업사지

봉업사란 말 그대로 나라를 창업하면서 받들던 절이란 뜻이다.

고려 창업을 기념한 국사찰이었으며 왕건의 영정이 봉안되어 고려가 망하기전 475년동안 고려왕실에서 한해도 빠짐없이 선왕에 대한 예를 올렸던 기록이 있다. 지금은 황량한 빈터에 5층석탑과 당간지주만이 서 있지만 그 당당한 위용에서 한 시절의 영광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5층 석탑은 고구려 양식을 계승한 늠름한 탑으로 고려 초기의 문화적 특징을 잘 보여준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곳에서 봉업사지와 죽산리 사지(1개 혹은 2개)를 만날 수 있다. 봉업사터는 지금 볼 수 있는 것은 5층석탑과 당간지주이고, 죽산리 사지에서는 3층석탑과 석불입상을 볼 수 있다. 보는 견해에 따라서는 죽산리 사지의 경우 두 개의 절터로 추정하여 석불입상과 그 옆의 (파손된)석탑을 한 개의 사지로 보고 3층석탑에 또 하나의 사찰이 있었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

 

봉업사는 언제 창건되고 언제 폐사되었는지 알 수 없어 ‘매곡리 폐사지’라 불리기도 했으나 1966년 경지정리작업시 출토된 유물에서 이곳이 봉업사였음을 말해주는 명문이 발견되어 비로소 봉업사지로 알려지게 된 것이다. 이 절의 명칭이 중요한 이유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말하는 ‘고려 태조의 진영을 모셨던 비봉산 아래의 봉업사’가 바로 이곳임을 밝혀주는 것으로, 사찰의 중요성이 증명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태조의 진영을 모셨다는 것은 이곳이 진전사원이었다는 의미인데 진전사원이란 왕실의 의지에 따라 죽은 왕의 진영을 모시고 위업을 기리며 명복을 비는 사찰로 태조의 진전사원은 전국의 이름난 사찰(개성의 봉은사, 논산 개태사 등)에 두었던 것으로 보아 봉업사가 결코 만만한 사찰이 아님을 밝혀주는 것이다. 
 

 이곳의 5층 석탑은 기단부의 둔중감, 1층탑신이 높은 점 등에서 고려시대 초기 탑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경기도 내의 탑들 중에 가장 조형미가 뛰어난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 특히 1968년 복원공사 때는 사리장치와 유물이 발견되었다.

 

다음으로 살펴볼 것이 죽산리 사지의 석불입상인데 죽주산성 아래 쓰러져 있던 것을 옮겨와 세웠다고 하는데 고려초기에 유행했던 지방불상 양식의 특징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몸체를 약간 뒤로 젖히고 가슴을 내밀어 꼿꼿하게 서 있는 모습이 매우 당당하다. 삼층석탑은 밭 한가운데 서있는데 기단 면석아래는 땅에 묻혀 온전한 모습을 알기 어렵고, 혜소국사와 연관이 있다고 전하나 확실하지는 않다. 마을 사람들은 석불과 삼층석탑을 기자신앙의 대상으로 삼았던 듯 하니, 근거리의 태평미륵과 함께 곳곳이 기자신앙의 흔적인 셈이다. 

 

죽산리 728  경기도유형문화제 제89호(1979년 9월 3일) 죽산리당간지주

부처와 보살의 공덕과 위신을 기리는 장엄용 불교 용구인 당(일종의 깃발)을 달기 위한 당간(幢竿)을 고정해 주는 두 개의 지주대를 말한다. 주로 절의 입구에 세워져 있다.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당간지주는 돌이나 철로 만든 것이지만 예전에는 목재를 많이 사용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 당간지주는 보물 435호로 지정된 5층 석탑 앞 약 30m떨어진 앞에 위치하고 있으며 높이 4.7m, 가로 0.76m, 세로 0.5m다. 오래전에 왼쪽의 당간지주가 밭가운데 도괴되어 있었던 것을 1968년 5층 석탑 복원공사 때에 현재위치에 바로 세웠다. 당간은 양지주가 동서향으로 대치해 있으며 아무런 조각이 없고 윗부분 안쪽에 구멍을 뚫어 간을 장치한 흔적이 있다.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방치되어 지주 한쪽이 매몰되었던 탓인지 기반석도 찾아볼 수 없다. 대체로 이 당간지주는 둔중한 느낌을 주며 아무런 조식(調飾)도 없고 확실한 조성연대는 알수 없으나 고려초 봉업사 창건 당시에 조성된 것으로 생각된다.

 

죽산리 148-5 유형문화재 제78호 죽산리5층석탑

고려시대의 큰 사찰이었던 봉업사(奉業寺)가 있었던 이곳은 조선시대에 폐사되었으나 명문이 있는 유물이 대량으로 출토되어 그 연혁을 알 수 있다.

 

이 탑은 높이가 6m로 여러장의 크고 넓적한 돌로 지대석을 만들고 그 위에 단층기단을 두고 위에 5층 탑신을 올렸다. 지상에는 수매(數枚) 판석으로 구성된 지대석이 놓이고 위의 중석은 각 면 일석식으로 되었다. 각 면에는 우주형(隅株刑)이 매우 희미하게 표현되었을 뿐 평평한 느낌을 준다.


갑석은 사매(四枚)로 두꺼우며 둔중한 느낌을 줄 뿐 아니라 밑의 부연(副椽)이 없고 윗면의 몰딩도 형식적이다. 탑신부는 초층 옥신만이 사매구성이고 초층 옥신은 기단중석보다 높아졌고 높이에 비하면 폭이 매우 좁은 우주형이 얕게 모각되었고 남면 중앙에는 소감실(小龕室)이 개설되었으나 형식에 흐르고 말았다. 이층 이상의 옥신은 초층에 비해 급격히 줄었고, 상층으로 갈수록 심한 체감(遞減)비례를 보이고 있다. 각 옥신에는 자체의 목에 비하여 좁은 우주형이 있을 뿐이다.

 
옥개는 평박(平博)한 편으로 받침은 각층 다섯 단이고 얇은 추녀가 전각에 이르기까지 수평을 이루었다.
낙수면은 완만한 경사를 지었고 전각의 반곡은 경미하여 옥정에 옥신을 받기 위한 괴임이 각출되었다.
상륜부는 전혀 남은 것이 없다.

 

이 석탑은 기단부 구성에서 둔중함을 보겠고 기단이나 옥신의 우부가 형식적으로 흘렀으며 탑신부의 체감비율도 건실한 편이 못된다. 그러나 석제 경구에서 규율성을 잃지 않았고 거대한 작풍에서 주목할 만하다. 안성시내에는 많은 석탑이 전하고 있으나 그 중에서도 오층 석탑이 가장 우수하다. 경기관광공사

 

경기도유형문화재 제97호 죽산리석불입상

원형 연꽃좌에 직립한 이 불상은 높이 3.36m로 풍문한 얼굴에 코는 마모가 심하지만 지긋한 눈과 작은 입매가 단정한 인상을 주며 소발(素髮)의 머리에 큰 육계와 긴 귀가 특징적이다. 얼굴에 비해 어깨는 왜소한 편인데 두 팔을 몸에 붙이고 있어 위축된 듯한 어깨와 더불어 경직된 모습으로 보인다. 
 
두 손은 신체에 비해 큰 편인데 오른손은 앞으로 들어 외장(外掌)한 여원인(與願印)의 수인(手印)을 취하고 아래로 내려 몸에 붙이고 있다. 양 어깨를 감싼 통견의 법의는 어깨에서부터 배 부근까지 일정한 간격의 평행주름을 이루며 흐르는데 양다리에서 각기 동신타우너형을 형성하고 있다.

 

이러한 옷주름 양식은 통일신라시대부터 많이 유행하던 불의표현 양식중의 하나인데 이 불상에서는 다소 경직된 모습으로 표현되고 있다. 무릎 아래에는 군의(裙衣)가 보이고 두 발은 현재 보수가 된 것인데 가지런히 정면을 향하고 있다. 복련이 돌려 새겨진 원형연화좌는 오랫동안 매몰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경기관광공사

 

문화재자료 제26호(1983년 9월 19일) 죽산향교
창건된 역사는 오래인 것 같으나 그 동안 원상(原狀) 변경이 많아 부속건물에도 근대식 가공흔적이 많이 노출되고 있다.

 
조선 제11대 중종 28년(1533) 3월에 창건되었다고 전한다. 현재 대성전(정면 3칸 8.8m², 측면 2칸 7.6m²)과 동제, 서제(6.6m×2.6m)내삼문(소슬3문, 4.7m×2m), 명륜당(정면 3칸 7.4m², 측면 2칸 5.2m², 겹처마 입작지붕)이 있다. 1972년에 담장을 신축하였다. 현재의 보존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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