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기념물 제104호 오윤겸묘
모현면 오산리 양촌 해주오씨 선영 서남향에 위치해 있다. 근래에 후손들이 묘역을 새로 단장하였다. 묘는 정경부인 경주이씨와 쌍분을 이루고 있으며, 봉분에 호석을 둘렀다. 묘 앞에는 상석과 향로석이 놓여져 있으며, 상석 전방에는 동자석이 좌우에 갖추어져 있다.
동자석 전방에는 망주석, 문인석 등의 석물이 좌우에 있다. 묘비는 화강암재료로서 비문의 마모가 심하다. 비좌는 축면에 당초문이 조각되어 있고 상부 모서리에는 복련 (覆蓮)이 새겨져 있다.비의 규모는 총높이 292cm, 비높이 226cm, 너비70cm, 두께25cm이다. 비문은 김상헌이 찬하고, 송준길이 쓴것으로, 비문 끝에 [崇禎丁亥]라는 년기가 있어 건립연대는 인조 25년(1647)임을 알 수 있다.
묘역은 1988년에 경기도 기념물 104호로 지정되었다. 오윤겸은 조선 중기의 문인으로 자는 여익이요, 호는 추탄, 사당이다. 본관은 해주이다. 성혼의 문인이며, 임진왜란 때 정철의 종사관으로 활약하였다. 1617년 첨지중추부사로 회답사가 되어 일본에 건너가 임진왜란 때 잡혀간 150명의 포로를 데려왔다. 이때부터 일본과의 국교가 정상화되었다. 인조 2년(1624)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왕을 공주에 호종하였고, 정묘호란 때는 강화에 피난하였다. 벼슬은 영의정, 영돈영부사 등을 거치고 기로소에 들어갔다. 시호는 충정이다.
오산리98-1 쇄미록 031-329-2064
임진왜란 때 오희문(1539∼1613)이 난을 겪으면서 쓴 일기로, 선조 24년(1591)∼선조 34년(1601) 2월까지 약 9년 3개월간의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오희문은 학문에 뛰어났으나, 과거급제를 못해 정식으로 관직에 오르지는 못했다. 그의 아들 오윤겸은 인조 때에 영의정을 지냈으며, 손자인 오달제는 병자호란 때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하다 청나라까지 끌려가 죽음을 당한 삼학사(三學士) 가운데 한 사람이다.
이 일기는 총 7책으로 되어있고, 각 책의 끝에는 국왕과 세자의 교서, 의병들이 쓴 여러 글, 유명한 장수들이 쓴 성명문, 각종 공문서, 과거시험을 알리는 글, 기타 잡문이 수록되어 있어서 당시의 사정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
그밖에 임진왜란 시기에 있어서 관군의 무력함에 대한 지적과 비판, 명나라가 구원병을 보낸 것과 화의 진행과 결렬, 정유재란에 관한 것 등 장기간에 걸쳤던 전쟁에 관하여 전반적이고 광범위하게 기록하였다. 이와 같은 기록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오희문 자신이 관직에 있지는 않았지만, 친분이 두터운 많은 고을수령들의 도움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당시 상황에 누구보다 정확하게 종합적으로 정보를 입수, 파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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